복수가 가져온 비애…‘퓨리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

[시리즈 칼럼]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2021년 6월 20일
업데이트: 2021년 6월 20일

삶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가 받은 고통의 대가를 그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만, 윌리엄-아돌프 부게로(William-Adolphe Bouguereau)의 작품 ‘퓨리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Orestes Pursued by the Furies)’를 감상하다 보면 복수보다 용서가 왜 더 좋은 것인지, 시각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복수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오레스테스는 트로이 전쟁 중에 그리스인들을 이끌었던 영웅 아가멤논 왕의 아들이었다.

아가멤논은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틴타레오스의 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결혼해 슬하에 세 딸과 아들 오레스테스를 두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 한 마리를 죽인 데다가, 그가 그녀보다 더 훌륭한 사냥꾼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아르테미스 여신의 분노를 사게 됐다.

아르테미스를 달래기 위해 그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이에 대해 신화는 두 가지 다른 결과를 전하고 있는데, 하나는 아르테미스가 이피게네이아를 불쌍히 여겨 마지막 순간에 그녀 대신 사슴을 바치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멤논이 아직 어린아이였던 딸을 잔인하게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딸을 희생시킨 아가멤논에게 이번엔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분노가 따랐다. 그녀는 남편이 토로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남편의 사촌인 아이기스토스와 밀통했다. 그리고 아가멤논이 돌아오면 죽이기로 공모했다.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그 끔찍한 일을 겪으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어머니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8년 후, 성인이 된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를 둘 다 죽였다. 그러나 모친을 살해한 죗값으로 그는 지하 세계의 여신이자 사악함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퓨리스들에 의해 시달리는 운명에 처했다.

세 명의 퓨리스 여신들은 주로 ‘멈추지 않는 분노’, ‘살인의 복수자’, ‘질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렇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는 결코 그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했다. 그는 복수 후에 퓨리스들의 분노와 시달림으로 오히려 더 비참해졌다.

윌리엄-아돌프 부게로(William-Adolphe Bouguereau)의 ‘퓨리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 1862년, 크라이슬러 박물관. | Public Domain

복수심에 괴로워하는 오레스테스

19세기 프랑스 화가 윌리엄-아돌프 부게로는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찌르는 순간과 퓨리스 여신들이 즉시 그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순간을 절묘하게 그려냈다.

그의 그림의 초점은 오레스테스다. 오레스테스는 흰 천을 두르고 있지만, 작품의 배경은 칠흑처럼 어둡다. 그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고 두 손은 두 귀를 꼭 막고 있는데, 퓨리스들의 질책과 분노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명의 퓨리스들은 오레스테스 뒤에 있다. 생기 없는 피부색에 머리카락 속엔 뱀들이 우글거린다. 맨 오른쪽의 퓨리스는 횃불을 들고 있고, 그녀의 바로 왼쪽에 있는 퓨리스는 뱀을 들고 있다.

그러나 맨 왼쪽에 있는 퓨리스는 한쪽 팔로 오레스테스의 죽어가는 어머니를 지탱하고 있다. 세 명의 퓨리스는 모두 클리타임네스트라의 가슴에 박힌 칼을 가리키며 오레스테스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가슴에 꽂힌 칼을 향해 손을 가져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손이 칼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칼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초점이 된다.

‘복수의 여신’ 퓨리스에 사로잡히지 않기

그러면 우리는 이 작품에서 어떤 도덕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부게로가 그림 한가운데에 그려 넣은 오레스테스는 그의 행위에 대한 어둠과 분노에 찬 퓨리스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살해한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그의 오랜 염원을 이뤘다. 그러나 그의 복수는 그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가져 왔다.

때때로 우리가 고통을 받게 됐을 때, 복수는 마치 유일한 출로처럼 보인다. 우리는 복수가 그간 견뎌온 고통을 바로잡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복수를 원한다. 그리고 그 복수로 인해 정의가 실현되고 고통도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복수는 오레스테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 못했다. 그는 더욱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 더해진 퓨리스들의 분노와 원망의 목소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귀를 틀어막고 있다. 그의 몸은 모든 고통과 압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마치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뛰쳐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지하세계에서 온 여신들인 퓨리스에게서 영원히 도망칠 수 없다. 그녀들은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영적으로 그를 괴롭힐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오레스테스는 이제 자신이 저지른 복수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서 어떻게 해도 도망칠 수 없게 됐다. 퓨리스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칼을 가리키고 오레스테스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그의 행동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데, 오레스테스의 고통은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고조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복수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더 큰 고통만 안겨준다’는 걸 설명하는 것일까? 복수라는 행위가 정말로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어떤 만족을 가져다준 적이 있는가?

오레스테스가 퓨리스의 분노를 부르지 않고 어머니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을까?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오레스테스는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방법이 오레스테스에게 더 큰 고통을 더하지 않고 완화할 수 있었을까?

용서는 더 나은 행동인가?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오레스테스는 그들이 받은 고통 때문에 복수를 추구했지만, 그들의 복수는 더 큰 고통만 낳았다. 그렇다면 용서가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오레스테스의 행동에 의해 야기된 모든 고통을 막을 수 있었을까?

더 넓은 관점

복수를 떠나, 필자는 이 그림을 신화와는 별개의 것으로 바라볼 때, 또 다른 해석의 층을 발견했다.

오레스테스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젊은이로, 그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 오레스테스의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자신의 생각과 신념, 전통을 가진 기성세대를 대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레스테스의 행동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위해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 중 하나다. 바로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것’이다.

오레스테스는 과거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건설하려 하지 않아 그가 예측할 수 없었던 고통을 야기했다. 퓨리스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신념을 위해 전통이 완전히 파괴될 때, 사회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나타낸다.

전통이 비록 건강하지 못한 신념과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전통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단지 그 자체의 건강하지 못한 관행을 더욱 심화할 뿐이다. 오레스테스는 과거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했지만, 과거의 가장 위험한 요소를 미래로 끌어들이는 위험을 감수하게 됐다.

세대가 함께 노력하여 전통의 긍정적인 면 위에 새로움을 만들어 내고, 전통에 저항하기보다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깨우쳐가는 그런 방법은 없는 걸까? 우리가 퓨리스의 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용서에 관한 문화와 전통을 구축하는 것은 어떨까?

* 고전회화는 현대인의 마음에서 그 의미를 잃어 가고 있는 영적 표현과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시리즈는 도덕적 통찰력을 통해 시각 예술을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오랜 세대를 걸쳐 고민해 왔던 질문들에 대해 절대적인 답을 제공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리즈를 통해 던져진 질문들이 ‘보다 진실하고 남을 위하며 용기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당신의 성찰 여정에 깊은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저자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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