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해협을 건너 중국으로, 대만으로 향한 귀순자 연대기

대만 택한 조종사들 '반공 영웅' 대접

최창근
2023년 12월 14일 오후 5:42 업데이트: 2023년 12월 16일 오후 9:53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과 대치하고 있는 중국이 대만군 현역 중교(중령)을 포섭하여 미국산 CH-47(치누크) 헬리곱터를 중국 항공모함에 ‘착륙’하는 방식으로 귀순 시키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대만 사회를 강타했다.

대만 육군항공특전지휘부 소속 셰(謝)모 중교는  1500만 달러(약 197억원)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대만해협 해상에서 극적 투항 장면을 연출하려다 대만 수사 당국에 체포되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만약 귀순 계획이 성사됐으면 귀순 보상금으로는 사상 최대 금액으로 기록될 뻔했다.

1949년 12월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정부의 대만 천도, 즉 ‘국부천대(國府遷臺)’ 후 양안 대치 속에서 조종사 망명 사건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중국과 대만의 귀순자 보상 정책이 귀순자를 양산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62년 중국 인민해방군은 통지문에서 비행기나 함정을 조종하여 귀순하는 사람에게 보상금 지급을 명시했다. 그러다 양안 긴장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1988년 귀순자 보상 조례 집행 정지를 발표했다. 대만 정부도 귀순자의 항공기 기종 등에 따라 한화 수십억 원에 달하는 고가의 황금을 지급했다. 1988년 중국의 보상조례 폐지에 발맞추어 1989년부터 대만 정부도 포상 금액을 하향 조정했다.

지난 세기 중국에서 대만으로, 대만에서 중국으로 귀순한 이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경로로 대만해협을 건넜을까.

1949년부터 1989년까지 대만행을 택한 중국 인민해방군 귀순은 13건, 반대로 대만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사례는 19건이다. 대만군은 공군사관학교 교관과 실습생이 주를 이루는 반면 인민해방군은 전투기 조종사가 다수이다.

1949~1989년 대만군 중국 귀순 19건

국민정부 대만 천도 이듬해인 1950년 1월 3일 대만 공군사관학교(空軍軍官學校)에서 비행 훈련 중이던 사관생도 리춘(李純)이 사관학교가 있는 가오슝(高雄) 강산(岡山)공항에서 AT-6 훈련기를 타고 중국 푸젠(福建)성 장푸(漳浦) 인근 해변에 비상 착륙했다. 이는 양안 분단 후 대만 조종사의 첫 중국 귀순 사례로 기록됐다.

같은 달 9일 공군사관학교 비행 훈련생 황융화(黃永華)도 AT-6 훈련기로 타이난(臺南)공항을 이륙하여 광둥(廣東)성 차오안(潮安)에 도착하여 망명했다.

1951년 3월 27일 대만 공군 제10대대 특수기팀 소속 다이쩌진(戴自謹) 소교(소령)가 B-25 폭격기로 타이베이 상공을 비행 중 동승했던 정비사 스뎬원(史殿文)에게 피랍되어 상하이(上海) 장완(江灣)공항에 강제 착륙했다.

같은 해 9월 12일 공군사관학교 조종사 류시창(劉希昌)은 AT-6 훈련기로 가오슝 강산공항을 이륙하여 푸젠성 장저우(漳州)공항에 착륙했다.

1953년 6월 26일 공군 1대대 조종사 예강(葉剛) 소교, 4대대 조종사 쑨즈창(孫志強)이 AT-6 훈련기로 비행 실습 중 진먼(金門)현에서 중국 저장(浙江)성으로 가서 귀순했다.

그해 10월 18일 공군사관학교 타오카이푸(陶開府) 생도, 공군 감찰단 소속 친바오준(秦保尊)은 AT-6 훈련기로 가오슝 강산공항을 이륙하여 비행 중 항로를 푸젠성 장저우공항으로 틀었다. 이들은 중국에 착륙하여 귀순하였다.

이듬해인 1954년에도 두 건의 조종사 귀순 사건이 발생했다. 2월 19일, 공군 1대대 참모 황톄쥔(黃鐵駿) 상위, 병기사 류밍싼(劉銘三)은 B-25 폭격기에 탑승하여 신주(新竹)공항을 이륙하여 저장성 싼먼(三門)에 비상 착륙했다.

10월 26일 공군사관학교 생도 후훙이(胡弘一)는 AT-6 훈련기로 가오슝 강산공항을 이륙하여 푸젠성 퉁안(同安)에 도착했다.

해가 바뀐 1955년에도 3건의 대만 조종사 중국 귀순 사건이 발생했다. 1월 12일, 공군 연락관 하오룽녠(郝隆年) 소교, 20대대 참모 왕중타(王鍾達) 소교, 20대대 정비사 탕징(唐鏡) 등 3인은 타이중(臺中)공항에서 C-46수송기에 탑승하여 중국 푸젠성 푸저우(福州)공항에 착륙하였다.

2월 23일에는 공군사관학교 생도 류루룽(劉若龍), 주바오룽(朱寶榮) 등 2인은 PT-17훈련기로 윈린(雲林) 후니(虎尾)공항을 이륙하여 푸젠성 핑장(平漳) 해변에 비상 착륙했다. 중국 정부는 두 사람에게 1000위안의 포상금을 제공했다.

5월 18일, 대만 공군 3대대 참모 허웨이친(何偉欽) 중위가 대만 남부 핑둥(屏東)공항에서 P-47 전투기에 탑승하여 광둥성 하이펑(海豐)에 비상 착륙했다. 전투기 조종사 최초 중국 귀순 사건으로 기록됐다.

1956년에도 연초부터 조종사 귀순 사건이 발생했다. 1월 7일 공군 조종사 웨이다웨이(韋大衛)는 타이베이 쑹산(松山)공항 근무 중 타이베이시 경찰국 직원 디샤오우(翟笑梧), 육군본부 장교 량펑(梁楓)과 공모하여 장제스의 양아들 장웨이궈(蔣緯國) 장군의 개인 여객기를 납치하여 푸젠성 난안(南安)에 도착했다. 중국 정부는 8000위안의 포상금을 지급했다. 푸젠성 인민해방군 사령관 예페이(葉飛)가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중국 공산당 지도부도 이들을 격려했다.

그해 8월 15일 공군사관학교 비행교관 황강준(黃綱存) 소교가 AT-6 훈련기 탑승 후 가오슝 강산공항을 이륙하여 푸젠성 셴유(仙遊)에 착륙했다. 중국 정부는 8000위안의 포상금을 지급했다.

1963년 6월 1일 공군 11대대 42중대 소속 조종사 쉬팅쩌(徐廷澤) 상위가 F-86 제트전투기를 타고 신주 공항을 이륙하여 푸젠성 룽톈(龍田) 공항에 착륙하여 중국에 귀순했다. 중국 정부는 그를 소교로 1계급 특진시키고 포상으로 황금 25000냥을 지급했다. 인민해방군 공군은 미국 최신 제트 전투기인 F-86과 소련제 제트 전투기 MiG-17의 성능 비교를 실시할 수 있었다. 쉬팅쩌는 양안 분단 후 최초로 제트기를 조종하여 중국으로 귀순한 사례로 기록됐다.

1969년 5월 26일 공군사관학교 교관 황톈밍(黃天明) 상위는 비행 실습 생도 주징(朱京)과 더불어 T-33 훈련기에 탑승하여 가오슝 강산공항 이륙 후 광둥성 후이양(惠陽)에 착륙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대만 공군의 중국 귀순 사례가 없었다. 그러다 1981년 8월 8일 공군 제5연대 비행 평가 장교 황지청(黃植誠) 소교가 F-5F 전투기에 탑승하여 푸젠성 푸저우공항에 착륙했다. 65만 신대만달러 상당의 포상금을 받았고 1988년 인민해방군 상교 계급장을 받았다. 해당 사건에 책임지고 대만 행정원 국방부장이 사임했다. 황지청은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낸 후 소장으로 진급하여 베이징군구 공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F-5 전투기는 미국 정부가 우방국에 저가에 판매하거나 공여한 신형 제트전투기이다.

1983년 4월 22일 육군 항공대 리다웨이(李大維) 소교가 화롄(花蓮)에서 U-6A 정찰기 탑승 후 이륙했다. 리다웨이는 푸젠성에 비상 착륙 후 망명했다. 중국 정부는 15만 위안의 포상금을 지급했다. 사건 발생 후 대만 군에서는 대규모 문책 인사가 따랐다.

1989년 2월 11일 공군 제737연대 린셴순(林賢順) 중교가 F-5E 전투기에 탑승하여 중국으로 기수를 돌렸다. 비행 중 연료가 떨어지자 린셴순은 낙하산으로 비상 탈출을 시도하여 광둥성 펑순(豐順) 상공에서 낙하했다. 린셴순은 중교를 거쳐 상교로 진급했다. 그는 중국 본토로 귀순한 마지막 대만 공군 장교로 기록됐다.

대만으로 간 중국 인민해방군 고액 보상 받고 반공열사 대접

같은 시기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만 귀순도 이어졌다. 첫 사례는 1958년 8‧23 포격전 2년 후인 1960년 발생했다. 그해 1월 12일 인민해방군 해군 항공병 제2사단 5연대 2대대의 편대 합동 훈련 중 조종사 양더차이(楊德才)는 미그-15 전투기를 조종하여 저장성 루차오(路橋)공항을 이륙하여 대만으로 향했다. 전투기는 대만 동부 이란(宜蘭)에 불시착 중 폭발하였고 잔존 기체는 타이베이에 전시됐다. 비록 미수에 거쳤지만 인민해방군의 최초 대만 탈주 사례이다.

이듬해인 1961년 9월 15일 중국 민항기 조종사 사오시옌(邵希彥), 가오즈쉐(高知學) 등 2인은 안(安)-2 경수송기를 조종하여 산둥(山東)성 자오(膠)현을 이륙했고 한국 제주공항에 착륙했자. 2인은 같은 해 10월 7일 대만으로 송환됐다. 대만 정부는 이들에게 황금 500냥을 포상으로 지급했다. 사오시옌은 아시아민족반공연맹에서 반공 선전 업무를 수행했다. 가오즈쉐는 대만에서 ‘가오유쭝(高佑宗)’으로 개명 후 공군 장교로 특별 임관했고 심리전 업무를 담당하다 상교로 예편했다.

1962년 3월 3일, 인민해방군 해군 항공병 제6사단 제16연대 3대대 소속 조종사 류청쓰(劉承司)가 미그-15 전투기에 탑승하여 저장성 루차오공항을 이륙했다. 이후 대만 타오위안(桃園)공항에 착륙하여 귀순했다. 류청쓰는 황금 1000냥을 포상으로 받았고 공군에 입대하여 상교로 전역했다.

1965년 인민해방군 공군 제8사단 22대대 소속 리셴빈(李顯斌)이 소련제 일류신-28 폭격기를 조종하여 항저우(杭州) 친차오(筧橋)공항을 이륙하여 대만 타오위안공항에 착륙했다. 대만 정부는 리셴빈에게 280만 신대만달러의 포상금을 지급했다.

1977년 7월 7일 인민해방군 공군 제2정찰기연대 1대대 중대장 판위안옌(范園焱)은 미그-19 전투기를 타고 푸젠성 진장(晉江)을 이륙하여 대만 남부 타이난공항에 착륙했다. 판위안옌은 황금 4000냥의 포상을 받고 대만 공군에 입대하여 중교 계급을 받았다. 이후 미스대만 출신 펑치위(彭啟鈺)와 결혼했다.

1982년 10월 16일 인민해방군 공군 제1정찰기연대 1대대 조종사 우룽건(吳榮根)이 젠(殲)-6 전투기로 산둥성 원덩(文登)공항을 이륙했다. 항로 이탈 후 한국 성남공항에 착륙했고 10월 31일 대만으로 송환됐다. 대만 정부는 포상으로  황금 5000냥을 지급했고 우룽건은 공군에 특별 입대하여 소교 계급을 받았다. 우룽건은 망명 동기로 “라디오 전파를 통해 대만 출신 유명 가수 덩리쥔의 노래를 들었으며 덩리쥔을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이듬해인 1983년 8월 7일 인민해방군 공군 시험비행연구센터 2대대 부대대장 쑨톈진(孫天勤)이 미그-21 전투기 시험 비행 명분으로 랴오닝(遼寧)성 싼스리바오(三十里堡)공항을 이륙하여 한국 성남공항에 착륙했다. 한국 정부는 송환 협상에서 당시 인민해방군 최신예 전투기이던 미그-21 기체는 중국으로 반환하고 조종사 쑨톈진은 8월 24일 대만으로 송환했다. 대만 정부는 황금 7000냥을 지급했고 공군 상교 계급을 수여했다. 인민해방군 중교였던 쑨톈진의 탈주는 최고 계급 장교가 최신예 전투기를 조종하여 탈주한 기록으로 남았다.

그해 11월 14일 인민해방군 해군 항공병 제6사단 제18연대 2대대 중대장 왕쉐청(王學成)이 젠-5 전투기에 탑승하여 저장성 다이산(岱山)공항을 이륙했다. 대만 타오위안공항에 착륙하여 귀순한 왕쉐청에게 대만 정부는 황금 3000냥을 포상으로 지급했다. 왕쉐청은 대만 공군에 입대하여 조종사로 복무했다.

1985년 8월 25일 인민해방군 해군 제3항공사단 제7연대 부대대장 샤오톈룬(蕭天潤)이 산둥성 자오현에서 훙(轟)-5 폭격기에 탑승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에 불시착 중 사고가 발생하여 항법사 쑨마오춘(孫茂春), 한국 농민 1인이 사망했다. 9월 20일 샤오톈룬은 대만으로 송환됐고 동승했던 통신사 류슈이(劉書義)는 본인 의사에 따라 중국으로 귀환했다. 대만 정부는 황금 3000냥을 포상으로 지급했다.

해가 바뀐 1986년에도 2건의 귀순이 있었다. 2월 21일 인민해방군 공군 제4정찰기연대 3대대 조종사 천바오중(陳寶忠)은 젠-6 전투기로 랴오닝성 선양(寧瀋)공항을 이륙하여 비행 중 편대를 이탈하여 한국 수원공항에 착륙했다. 4월 30일 대만으로 송환됐고 황금 5000냥을 포상으로 받았다. 이후 천바오중은 대만 공군에서 복무했다.

10월 24일 인민해방군 해군 제5 항공병사단 제15연대 조종사 정차이톈(鄭菜田)도 산둥성 옌타이(煙臺)공항에서 젠-6 전투기에 탑승하여 한국 청주공항에 착륙했다. 대만으로 송환됐고 황금 5000냥의 포상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87년 11월 19일 인민해방군 공군 제49사단 제145연대 3대대 중대장 류즈위안(劉志遠)은 젠-6 전투기로 푸젠성 룽시(龍溪)를 출발하여 초저공 비행 끝에 대만 타이중(臺中) 칭취안강(清泉崗)공군기지에 도착했다. 대만 정부는 류즈위안에게 소령 계급과 더불어 황금 5000냥을 수여했다.

1989년 9월 16일 마지막 인민해방군의 대만 귀순 사건이 발생했다. 공군 항공병 제49사단 제145연대 조종사 장원하오(蔣文浩) 중위가 젠-6 전투기에 탑승하여 푸젠성 룽시공항을 출발했다. 진먼공항에 도착하여 귀순 의사를 밝혔고 추후 황금 2000냥의 포상과 중위 계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