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6·25 전쟁, 맥아더 그리고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

유사 시 한국의 진짜 동맹은 누구인가①
허중리(何眾力), 양웨(仰岳) /중화권 자유기고가
2022년 06월 24일 오후 7:31 업데이트: 2022년 06월 24일 오후 7:31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옛 군가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 이 유명한 말로 기억되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으로 지휘관 경력에 정점을 찍기도 했지만, 동북아 정세에 대한 지정학적 혜안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맥아더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등 세 차례 전쟁을 경험한 장군이자 5명밖에 없는 미 육군 5성장군 중 한 명이다. 그는 실전의 전문가이자 전략가였으며 애국자였다.

70여 년 전, 맥아더는 아시아·태평양 정세를 명확히 파악하고 중국·대만·일본·한국의 전략적 위상을 정확하게 평가했다. 그는 미국 의회에서 “대만을 잃으면 태평양을 잃게 될 것”이라며 전략적 판단을 강조했다.

70년이 흐른 지금, 공산주의 중국(중공)의 군사 도발로 대만해협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은 아태 동맹을 재건해 대응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무산된 대만군 베터랑 부대의 참전

1948년 맥아더는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음을 눈치채고 이를 워싱턴에 보고했다. 하지만 워싱턴 당국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듬해 6월 맥아더는 다시 한번 북한의 남침 위험을 경고하면서 가장 유력한 발발 시점이 1950년 6월이라고 말했지만, 또다시 묵살됐다. 워싱턴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경시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했고 개전 4일 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맥아더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는 뒤늦게 82호 결의안을 채택해 유엔군의 한국 지원을 결정했다. 7월8일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만장일치로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 겸 미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추천했다. 한국군 지휘도 그에게 맡겨졌다.

맥아더 장군은 어려서부터 군인인 아버지를 통해 군사 지식을 배우고 군사적 소양을 함양했다. | 퍼블릭 도메인

맥아더는 한국전 발발 한 달 뒤인 1950년 7월 31일 주요 장성들을 이끌고 대만을 방문했다. 미국의 거절로 무산된 대만군 파병을 재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대만 장제스 총통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6월26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한 논의에 착수했고 이후 병력 3만3천 명을 보내겠다는 서신을 유엔 대사를 통해 유엔사무총장에 전달했다. 이들 중 일부는 공산군과 교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정예부대였다.

트루먼 대통령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국 관리들은 이를 반대했다. 대만의 한국전 개입이 중공군과의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 대만 자체 방위도 중요하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결국 장제스의 제안을 미국은 거부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미군 공군이 중국 북동부를 폭격하고 해군은 중국 해안을 봉쇄하며, 한반도에 대만군을 상륙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만군 투입이 거부된 사이 중공군은 푸젠(福建)에 주둔하고 있던 2개 병단을 북한 지역으로 진입시키며 미군과 유엔군에 대한 압박을 높여갔다. 전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맥아더의 대만 방문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는 극동군과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대만을 방문해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제안했다.

대만 방문에서 그는 트루먼 행정부를 겨냥해 “일부 사람들은 일관되게 유화주의와 실패주의를 고취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대만은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며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이에 격분했다. 그들은 “미국의 기존 정책과 충돌한다”며 맥아더에게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 국가안보참모 애버럴 해리먼은 “우리는 단지 공산주의의 행동을 저지할 뿐, 어떤 반격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공산주의를 향한 유화주의를 확인한 셈이다.

또한 트루먼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에게 맥아더를 압박해 발언을 철회하도록 하라고 요구했지만, 맥아더를 존경하는 존슨 장관은 이를 거부했다. 화를 삭이지 못한 트루먼 대통령은 며칠 후 존슨 장관을 해임했다. 대만의 파병도 끝내 무산됐다.

역사에서 가정은 헛된 일이지만, 중공군을 상대한 경험이 풍부한 대만군 정예 부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1950년 7월 31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장제스 총통이 회담에서 미국-중화민국(대만) 간 군사 협력을 논의하고 있다. 예공차오(葉公超) 외교부장이 장 총통의 인사말을 통역하는 장면. | 퍼블릭 도메인

대만 방문을 둘러싼 진실공방…불복이냐 조작이냐

애치슨 장관은 훗날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미국 정부와 사전에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고 기록했다. 회고록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당시에도 트루먼의 명령에 불복하고 월권했다는 비난이 맥아더에게 쏟아졌다.

맥아더는 이를 부인했다. 그는 대만 방문 열흘 뒤인 1950년 8월10일, 성명을 내고 “대만 방문은 사전에 미·중화민국 양국 정부의 관련 부처가 공식적으로 협의한 것”이라며 “유화정책과 실패주의를 선전해 온 사람들이 이번 방문에 대해 악의적인 왜곡 보도를 했다”고 주장했다.

‘명령 불복종’에 대한 논란은 이후 맥아더에 대한 유엔군 사령관직 해임(1951년 4월11일)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명령 불복종은 사실일까? 그동안은 그랬다. 하지만, 미국 조지워싱턴대의 리처드 쏜턴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맥아더를 해임하기 위한 트루먼의 조작이다.

쏜턴 교수가 2001년 펴낸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권영근·권율 역, 한국국방연구원 2020년 출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트루먼은 당시 유엔군이 취약한 상태에서 참전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해 맥아더를 대만에 보내 장제스가 중국 해안의 중공군을 공격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애치슨 장관은 이렇게 되면 오히려 중공군 참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반대했고, 트루먼은 이에 설득당해 대만군을 이용한 중공군 공격 계획을 취소했다. 그러고는 맥아더가 허락 없이 대만을 방문했다는 내용을 참모를 통해 언론에 흘렸다. 맥아더 주장대로 트루먼이 악의적인 언론 플레이를 했다는 게 쏜턴 교수의 연구 결과다.

대만에서 돌아와 전장에 복귀한 맥아더에게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그 후의 일이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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