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북한 정부가 대규모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추진한 까닭은?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실체 ②
이윤정
2022년 11월 2일 오전 11:32 업데이트: 2022년 11월 3일 오후 12:07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른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사업이 시작된 이후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 9만3340명 중 재일 교포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고, 일본인 아내 등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2022년 발간한 ‘지상낙원으로 간 그들은 어디에? : 기만적 북송사업과 강제실종’은 그 실체를 규명한 보고서다. 에포크타임스코리아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을 얻어 보고서를 바탕으로 재일교포 북송사업 실체를 분석한 특집 기획을 마련했다.

북한 정부가 1959년 대규모의 북송사업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외교, 경제, 정치적 요인이 있다.

외교적 동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성립한 동서 냉전체제는 한반도 내 좌우 대립과 분열, 1950년 6·25전쟁 발발에 영향을 미쳤으며, 1953년 휴전협정 조인 이후 지속된 남북 정부 간 체제 경쟁 역시 이러한 대외적 환경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남북 정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간 경쟁의 연장선상에서 각각 서구권과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민주주의’ 진영에서 ‘공산주의’로의 대규모 이주가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었던 외교적 기회였다.

북한 정부에게는 일본에서 무국적 상태로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던 재일교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국의 인도적 측면을 부각할 기회이기도 했다.

북송사업 실행을 통해 일본과 외교관계 확장을 시도하려는 동기도 있었다. 북한의 북송 및 복지를 위한 요구들은 북한 적십자 대표단의 일본 파견을 일본 정부가 승인하도록 하기 위한 좋은 구실로, 이러한 교류를 통해 일본 정부와의 비공식적 교섭의 창구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북한 정부는 한반도 식민 지배 이후 3차에 걸친 한일 회담을 실시하며 개선되고 있던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방해하려는 외교적 동기도 있었다.

북한 정부는 일본 정부가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해 재일교포들을 자국에서 내보내고 싶어 한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었다.

일본 내각과 입법부(국회)는 높은 범죄율, 정치적 선동, 노동시장에 대한 압박, 복지비용 지출에 따른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재일교포의 출국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재외교포를 수용할 재정과 준비가 부족했지만, 재일교포들이 한국이 아닌 북한으로 대규모 이주하는 경우, 한반도에 정통성을 가진 국가로서 북한 정권이 부상하는 것을 우려해 북송사업을 강력히 반대했다.

한국과 국교 정상화를 논의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전면에 나서 북송사업을 지원하는 경우 예상되는 한일관계 경색을 피하고자 북송사업의 중개자로서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청했고, 일본 적십자사를 이용해 북한의 조선 적십자사와 협력했다. 이를 통해 북송사업이 일본 정부와 관계없는 독립된 인도적 ‘귀국’ 운동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북한 정부는 북송사업을 일본 정부와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상의 기반으로 삼고,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북송사업 실행 교섭에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참여를 돌연 반대했던 북한의 행동은 당시 급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던 한일관계에 최대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 계산된 전략이었다.

한국전쟁 후 북한에 남아 있던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1958년 5월 철수했지만, 주한 미군은 여전히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안보 측면에서 북한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 이를 고려할 때, 북송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북한 정부의 국제적 입지를 확보하고 외교 관계를 확대하며, 한일관계 정상화를 교란하는 전략적 이점이 있었다.

경제적 동기

북한 정부가 대규모의 북송사업을 추진한 경제적 동기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북한 내 인구 감소와 유출로 인한 북한 총인구 급감과 노동력 부족 문제가 있다.

1961년 ‘조선중앙연감’에 따르면 북한의 총인구는 1949년 말 962만2000명에서 1953년 12월 849만1000명으로 113만1000명(8.8%) 감소했다. 북조선중앙통계국자료에 의하면 이 수치보다 더 많은 179만8000명이 감소했다.

전후 노동력 부족 문제를 돕던 30만 명의 중공군이 1958년 북한에서 철수하자, 북한 내 전후 복구 및 사업개발계획 실시를 위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 김일성은 중국 동북부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귀환’하도록 독려해줄 것을 중국에 요청해 1958년 말까지 약 4만 명의 조선족을 귀환시키겠다는 중국의 약속을 확보하기도 했다.

북한의 노동력은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북한 정부는 노동력 문제 해결과 더불어 기업·기술자·기능자 우선 북송 정책을 실시했다.

북한에서는 전쟁과 이후 재건 시기 동안 고등교육이 불가능했던 데 비해 많은 북송자는 일본에 있을 때 향유했던 기회를 통해 고등교육을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북한 정부는 재일조선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북한에 지식인과 기술의 유입을 기대하며, 김일성은 재소련 북한 외교관과의 대화에서 재일조선인을 통해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이뿐 아니라 북한 정부와 조총련은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이주하며 일본에 남겨둔 자산을 흡수해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많은 북송자가 일본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알려졌지만, 북한의 경제목표가 ‘흰쌀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부유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니가타일본적십자센터의 조총련 경리과 주임으로 약 10만 명의 북송을 도왔던 장명수 씨의 수기에 따르면 북송자들이 공식적으로 북한에 반입할 수 있던 금액은 1인당 4만5000엔(약 50만 원) 정도였다.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조총련은 현금을 직접 들고 가는 것은 금지하고 대신 보관증을 작성해 주었다. 하지만 어떤 북송자도 북한에서 보관증을 현금으로 환산해 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지상낙원’인 북한에선 모든 것이 자유롭고 풍요롭다고 들었기 때문에 따로 돈을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장명수 씨에 따르면 많은 북송 재일교포 사업가들은 일본을 떠나기 전에 처분된 재산과 자산을 조총련에 위탁하거나 기부했다. 그는 북송자가 손목시계 등 현금성 자산과 물품을 북한에 대량으로 들여왔으며 북송자의 가족들이 일본에서 보내오는 물자원조 역시 북한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고 증언했다.

정치적 동기

북한 정부가 북송사업을 감행한 배경에는 김일성 정권의 정통성을 국내외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제시된 북송사업은 당시 흉흉하고 무거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신망을 모으기 위해 인도주의적이고 민족적인 행사가 필요해 기획됐을 가능성이 있다. ‘8월 종파사건’은 1956년 8월 30일, 만주파(빨치산파) 김일성을 정점으로 초기 북한 정권을 떠받치던 소련파와 연안(延安)파가 김일성 절대권력에 도전했다가 대부분 숙청당한 사건이다.

또한 북송사업을 통해 김일성은 전 세계 동포를 돌보는 ‘진정한 애국자’로서의 대외적 이미지를 공고히 하고, 조총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테사 모리스-스즈키(Tessa Morris-Suzuki) 호주국립대(ANU) 일본 역사 전공 명예교수는 북송 사업에 대해 “재일교포 사회에서 조총련의 영향력을 엄청나게 확대하고 일본 사회 전체에서 조총련의 인상을 널리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조총련을 북한의 첩보기관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재일교포 신분을 이용해 한국, 일본, 북한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하며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북송사업을 통한 대일 접근은 ‘대남통일 전략의 회로’를 획득하는 측면에서도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었다. 북한은 북송사업을 통해 재일교포 사회에 직접적으로 접근해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는 한편, 대남 공작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다.

북송사업과 소련의 연계성

북송사업은 냉전체제하에서 범(凡)사회주의 국가들의 협력, 특히 소련의 지원 아래 전개될 수 있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북송사업이 체제 우월성 선전에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며 북송사업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고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에 동조했다. 중국과 몽골은 지원금을 전달했고 특히 소련은 실무적, 재정적, 외교적 등 다방면으로 북송사업을 지원했다.

북한과 소련 사이에 북송 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것은 1956년 10월, 소련 주재 북한 대사관 2등 서기관 허도진이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귀국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 서한을 소련에 전달하면서부터다.

이후 북송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북한과 소련은 실무적 사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북한은 1958년 9월 17일 ‘재일교포의 귀국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외무성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도쿄 주재 소련대사관 직원을 통해 9월 18일 일본 외무성에 전달됐다. 북한과 소련은 성명서를 언론에 공개할 시점을 논의 중이었으나 9월 22일 일본이 성명서를 반환하면서 계획이 무산됐다. 한국이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물질적으로도 선박 제공, 해군 호위, 북한 적십자 협상단의 제네바 체재 비용 등을 부담하며 북송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북한에는 대규모 인원이 승선할 만한 선박이 없었고, 여타 다른 국가들은 한국의 강한 반대로 인해 자국의 선박을 지원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1959년 12월 14일 첫 번째 출항부터 1971년 만경봉호가 건조되기 전까지 북송사업은 소련 선박인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를 통해 이뤄졌다.

북한은 소련이 선박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해 여러 번 감사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