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기관지, 관료 조직 ‘손가락 끝 형식주의’ 정면 비판…배경은?

강우찬
2023년 12월 28일 오후 3:57 업데이트: 2023년 12월 28일 오후 4:06

“실제 액션 없이 책상 앞에서 손끝만 까딱”
인민일보, 3일 연속 사설 싣고 관료 조직 질타
소식통 “관료들, 따르는 시늉만…레임덕 상황”

중국에서 최근 ‘손가락 끝 형식주의'(指尖形式主義)란 말이 화두다. 겉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지난 18일 중국 공산당(중공) 중앙위원회 네트워크보안및정보화위원회(網絡安全和信息化委員會)는 “형식주의와 관료주의를 피해야 한다”며 시진핑 중공 총서기의 정신을 관철할 것을 강조했다.

시진핑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 위원회는 ‘손가락 끝 형식주의 방지 및 통제에 관한 의견’이라는 통지문을 통해 “강국 건설과 민족 부흥을 위해 더 많은 간부들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통지문 등을 종합하면, 손가락 끝 형식주의는 과거 공산주의 체제의 고질병이었던 형식주의가 전자정부시스템과 만나 온라인으로 옮겨간 것이다. 관료들이 책상 앞에 앉아 손가락만 두드릴 뿐 문제 해결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공 기관지 인민일보 역시 지난 22~24일 사흘 연속 ‘손가락 끝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하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사설은 메시지 확인이나 형식적인 보고서 작성에 업무시간을 허비하고, 같은 보고서를 이곳저곳에 업로드하면서 바쁜 척하거나 별 의미 없는 이미지나 영상 자료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관료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익명의 소식통에 따르면, ‘손가락 끝 형식주의 비판’에는 단순한 업무 태만에 대한 경계를 넘어선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중공은 당초 관료들의 업무 태만을 감시하고 예방할 목적으로 전자정부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오히려 관료들이 이를 악용해 사익을 추구하고 이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네트워크보안및정보화위는 지난 18일 발표한 통지문에서 전자정부시스템 보완계획도 밝혔다. 향후 1~2년 내에 통합 관리와 심사, 평가 피드백 등을 확립하고, 3~5년 내에 감시 조치 완성 및 업무 프로세스 강화를 통해 손가락 끝 형식주의를 몰아내겠다고 했다.

중국 문제 전문가 왕허(王赫)는 “전자정부시스템은 업무 프로세스 최적화와 관리 효율을 높인다는 도입 취지와 달리 불필요한 절차에 행정 자원을 낭비하는 골칫거리가 됐다는 게 공산당 지도부의 불만”이라고 설명했다.

왕허는 “허위 보고서로 실적을 부풀리거나 없었던 실적도 만들어내는 형식주의에 전자정부시스템 특유의 복잡한 프로세스가 더해지면서 비효율성이 극대화되고 있다. 당 지도부 역시 말단 조직 통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형식주의 풍토가 곳곳에 고착화돼 청산하는 데에만 최소 5년은 걸린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전했다.

중국의 한 주요 미디어 관계자 진모씨는 형식주의 이면에는 당 지도부에 대한 관료 사회의 누적된 불만도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진씨는 에포크타임스에 “최근 만나 본 관료들 다수가 지난 10년에 걸친 당 수뇌부의 퇴행적 정책으로 경제가 침체에 빠진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관료 조직이 전반적으로, 나서서 일하는 이들은 거의 없고 상부의 지시가 떨어져야 움직이는 분위기”라며 “위에서 정책이 내려오지만 하부조직에서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실제로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서 허위로 보고하는 상황”이라며 “네트워크보안및정보화위에서는 주민 감시망을 강화하려 하지만 자금이 중간에서 줄줄 세고 있다”고 말했다.

네트워크 설계와 구축에는 프로젝트마다 외주용역도 필요하고 운영과 유지에도 자금이 들어가지만, 단계마다 여러 이익집단이 형성돼 자금 나눠먹기를 하며 자기 이익만 챙긴다는 것이다.

진씨는 “공산당 관료들은 예산 타낼 궁리만 하면서 상층부를 괴롭히고 있다”며 “일종의 레임덕 상태”라고 주장했다.

미국 메릴랜드주에 위치한 정보전략연구소 리헝칭 소장은 시진핑의 국정운영 방식도 관료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리 소장은 “시진핑은 큰 틀의 계획을 제시하고 생각한 것을 바로 실행에 옮기면서, 자기 뜻에 따르지 않으면 즉시 해임하거나 체포하는 강압적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중국 관료사회는 부패가 만연해 누구든 털기만 하면 꼬투리가 잡히기 때문에 반부패 숙청은 실제로는 시진핑의 눈 밖에 났다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리 소장은 “부하들은 겁에 질린 채 시진핑이 시키는 대로 하지만, 일이 틀어지면 책임을 뒤집어쓴다. 시진핑은 ‘내 계획은 좋았는데 너희들이 망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종종 서로 남 탓하며 내분이 일어나는데, 지금 중공이 그런 상황”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