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용기로 이끈 유대인의 승리…부림절과 에스더 왕비

미셸 플라스트릭(Michelle Plastrik)
2024년 03월 19일 오전 8:20 업데이트: 2024년 03월 19일 오전 8:22

부림절(Purim)은 유대교의 축제로, 유대력 아다르(Adar)월 14일 또는 15일이다. 이날은 구약성서의 역사서 중 하나인 에스더서(書)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스더라는 여인에 의해 유대 민족이 큰 위기를 모면한 것을 기리는 기쁨의 축일이다.

에스더서의 주인공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1세(구약성서 속 아하수에로)의 아내다. 왕의 총신(寵臣) 하만이 왕국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에스더는 그의 사촌오빠 모르드개와 함께 기지를 발휘해 왕을 설득하고 유대인들을 구한다. 부림절은 유대인의 승리와 에스더의 용기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에스더 왕비

‘에스더 왕비’(1878), 에드윈 롱.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에스더 왕비의 참된 용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예술작품의 소재로 쓰였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화가 에드윈 롱의 1878년 작품 ‘에스더 왕비’는 왕을 설득하기 위해 마지막 치장을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왕과의 면담을 요청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촌 모르드개와 함께 전략을 세운 후,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고 왕을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그림 속 에스더는 우울한 표정이지만 눈빛만은 또렷이 살아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그녀는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결연한 의지를 전한다.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들이 아름답게 반짝이지만, 그녀의 깊은 눈빛이 가장 돋보인다. 그녀 뒤편 벽은 설형(쐐기)문자 석판으로 장식돼 있다. 작품을 그린 에드윈은 에스더서 첫 번째 장 6절에서 착안해 당시의 배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왕의 용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1638).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에스더서에서 영감을 받아 그려진 작품 중 하나인 ‘아하수에로 앞의 에스더’는 여류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4)의 작품이다. 젠틸레스키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신화와 성경 속 인물을 주로 그려 성공을 거뒀다. 그녀는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를 호령했던 메디치 가문과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후원을 받으며 풍요로운 미술 활동을 펼쳤다.

‘아하수에로 앞의 에스더’(1620년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젠틸레스키의 작품에는 특히 여성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1620년대에 그려진 이 작품에선 에스더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당시 여성들에게 이상적 존재로 각인됐다.

그림 속 왕은 과장된 복장을 한 희극적 인물로 묘사됐다. 비단 스타킹과 보석이 달린 모피 부츠를 신은 왕은 위엄보다는 소박한 인물처럼 보인다. 젠틸레스키는 왕을 희화화해 에스더의 위엄과 우아함을 강조하려 했다.

에스더는 두 명의 시녀를 대동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격식을 갖춰 왕을 알현했다. 그녀는 왕에게 유대인의 사면을 간청하다 쓰러진다. 왕은 에스더의 진심에 감복해 그녀를 안고 사면을 허락하며 은총을 베푼다. 이에 그녀는 다음 날 왕과 총신 하만과 함께하는 연회를 열게 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하만

에스더서 중 하만과의 연회 장면은 특히 예술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대목이다. 17세기 네덜란드 예술가들은 당시 개신교와 스페인 가톨릭 간의 투쟁에서 에스더를 유대인 영웅이자 자유의 상징으로 그린 다양한 버전의 작품을 창작했다.

‘아하수에로와 하만과 에스더’(1660), 렘브란트.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1606~1669)은 ‘아하수에로, 하만, 에스더’을 통해 극적인 순간을 분위기 있게 묘사했다. 이 작품은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하만의 계략을 에스더가 왕에게 고하려는 순간을 표현한 것으로 작품 속 인물들은 각기 절제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큰일이 발발하기 직전의 긴장감이 그들 주위를 맴돌고 있다. 에스더는 아름다운 마음만큼이나 반짝이는 보석으로 치장해 찬란한 빛을 발한다. 그녀 맞은편 어둠 속에 앉은 하만은 어둠 속으로 곧 사라질 듯 보인다. 그들 사이의 왕은 천천히 고개를 하만 쪽으로 돌리며 홀(笏)을 꼭 쥔다.

‘에스더의 연회’

‘에스더의 연회’(1625), 얀 리벤스.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또 다른 네덜란드 화가 얀 리벤스(1607~1764)의 작품 ‘에스더의 연회’는 렘브란트와는 다른 화풍으로 같은 장면을 묘사했다. 리벤스는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화가이다. 그는 높은 열정으로 예술 활동을 펼쳤지만, 생전에는 렘브란트의 명성에 가려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렘브란트와 교류하며 서로의 발전에 힘을 쏟았다.

리벤스는 초상화, 종교화, 장르화 등 여러 주제를 다양한 형식으로 그렸다. 대담한 색채, 명암의 강한 대비, 인물을 평면적인 구도로 배치하는 그의 스타일은 ‘에스더의 연회’에 완벽히 구현돼 있다.

그림 속 에스더는 손을 들어 하만을 가리키고, 왕은 주먹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하만은 놀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듯한 손짓을 한다.

그림 속 배경인 연회는 부림절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부림절이 되면 푸짐한 만찬으로 축배를 들고 악인 하만의 이름을 딴 전통 과자 하만타센을 먹으며 자유와 생명을 지킨 것을 축하한다.

에스더의 믿음과 강인함

에스더서는 왕비 에스더를 강인하며 진실과 올바름을 수호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녀의 신앙과 충성심, 희생정신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며 아름다운 작품의 탄생에 기여하고 있다.

미셸 플라스트릭은 뉴욕에 거주하며 미술사, 미술 시장, 박물관, 미술 박람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