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고진, 전용기 추락사…사인 둘러싸고 러 vs 서방 입장차

애덤 머로우(Adam Morrow)
2023년 08월 25일 오후 4:59 업데이트: 2023년 08월 25일 오후 8:39

러시아에서 반란을 시도한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반란 사태 후 2개월 만이다.

추락 사고의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가 한창인 가운데, 프리고진의 사망을 두고 온갖 추측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24일(현지 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프리고진의 사망에 대해 첫 입장을 표명하고, “러시아 연방 수사위원회가 이번 사고 관련 수사에 착수했다고 보고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앞으로 수사관들이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겠다”고 덧붙였다.

수사는 진행 중

앞서 전날(23일) 러시아 재난 당국은 이날 오후 6시 20분께 엠브라에르 레가시 제트기가 모스크바 북쪽의 트베리 지역에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고로 승객 7명과 승무원 3명 등 탑승자 10명 전원이 숨졌다. 러시아 항공 당국은 “탑승자 명단에 프리고진과 최소 2명 이상의 바그너그룹 경영진 이름이 포함돼 있다”고 발표했다.

해당 바그너그룹 전용기는 모스크바를 출발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중이었다. 인근 마을 등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은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폭발음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러시아 당국은 사고 현장을 폐쇄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러시아 수사위원회가 교통안전 및 항공운송 운영 규칙 위반에 관한 러시아 형법 제263조에 따라 형사 사건을 개시했다”고 보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Photo by Alexander KAZAKOV/SPUTNIK/AFP/연합뉴스

푸틴 “힘든 운명…유능했지만 실수도 저질러”

사고 발생 후 처음 24시간 동안 크렘린궁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날 푸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리고 있는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흥 경제 5개국) 정상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했으나 프리고진의 사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 사고 다음날인 24일,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언급하며 프리고진의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푸틴은 프리고진에 대해 “그는 힘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며 “유능한 사업가였지만 인생에서 몇 가지 심각한 실수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이어 “내가 아는 한 프리고진은 어제 아프리카에서 돌아왔다”며 “현재 진행 중인 조사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러시아 내부는 물론, 국제사회에서 다양한 해석과 추측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는 항공 전문가들을 인용, 미사일 격추 또는 기내 폭발에 의한 추락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전문가들은 후자 쪽에 무게를 둔다. 비행기 몸체와 꼬리가 분리돼 서로 떨어진 지역에 추락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비행기 날개 등에서 발견된 구멍들은 대공미사일 공격을 받은 것과 유사하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잔해를 살펴 본 조사관들은 아직까지 어떤 부정행위의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지난 6월 24일(현지 시간) 예브기니 프리고진이 러시아에서 자신의 용변단과 함께 철수하고 있다.|Alexander Ermochenko/Reuters/연합뉴스

푸틴을 향한 비난

친러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 발표를 자제하며 조사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반면 서방 국가들은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푸틴 배후설을 염두에 두는 모습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비행기 추락 직후 푸틴이 배후에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할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서도 “러시아에서 푸틴이 배후에 있지 않은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노골적으로 “반란 두 달 만에 프리고진을 공개적으로 제거한 것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이 러시아 엘리트층에게 보내는 신호”라며 “배신은 곧 죽음”이라고 말했다.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고위 작전 책임자이자 모스크바 방송국장을 지낸 대니얼 호프만 역시 프리고진의 사고가 푸틴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난 2010년 9월 예브기니 프리고진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당시 총리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학교 급식 공장을 소개하고 있다.|Photo by ALEXEY DRUZHININ/SPUTNIK/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불안했던 관계

지난 몇 달 푸틴과 프리고진의 관계가 위태로웠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프리고진은 자신이 경영하는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을 동원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장서 대부분 전투를 주도했다. 지난 5월에는 장장 9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동부 요충지 바흐무트를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러시아 군부와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았다.

지난 6월 24일,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 용병 수백 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프리고진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모스크바에서 200㎞ 내 거리까지 진입했다.

이때 러시아 동맹국인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개입해 협상을 중재하면서 프리고진은 반란을 중단했다. 러시아 당국은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가는 대신 프리고진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Pavel Bednyakov/Host photo agency RIA Novosti via Reuters/연합뉴스

러시아 “사실에 초점을 맞춰라”

서방국가의 많은 전문가는 물증은 부족하지만, 심증적으로는 이번 비행기 추락사고를 푸틴의 뒤늦은 보복으로 판단하고 있다.

호프만은 프리고진이 반란 직후 운신이 가능했던 것은 “(푸틴이) 앙갚음을 하기 위해 프리고진이 방심하도록 일종의 거짓 안정감을 심어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라”며 날을 세웠다. 그는 “우리는 신속히 조사에 착수했고, 현재 수사관들이 조사 중에 있다”며 “서방 언론의 주장이 아닌, 사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경고했다.

*황효정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