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위해 헌신한 일본인, 중국서 ‘간첩’으로 몰려 6년간 감금

정향매
2023년 09월 4일 오후 5:47 업데이트: 2023년 09월 4일 오후 5:47

‘주거 감시’ 7개월 간 햇빛 본 건 단 15분
“中 인권문제 해결위해 여생 바칠 것” 

“스즈키 씨인가요?” “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덩치 큰 남성 몇 명이 스즈키 에이지(66·鈴木英司)를 밴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스즈키는 7년 전 베이징 공항 제3터미널에서 체포됐던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30년 넘게 중일 우호를 위해 일해 온 그는 자신이 ‘스파이’로 체포돼 중국에서 6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스즈키는 지난 8월 31일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감옥에서 보낸 2279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2016년 7월 15일 무더운 여름 오후, 일본-중국 청년교류협회 회장이던 스즈키는 5일간의 우호 행사를 마치고 베이징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잡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 공교롭게도 호텔 앞에는 승객을 기다리는 택시가 없었지만 길 건너편에는 흰색 택시가 주차돼 있었다. 운전기사는 경적을 울리며 손을 흔든 후 차를 돌려 스즈키 앞에 세웠다. 

“베이징의 택시는 대부분 파란색과 녹색이며 흰색 택시는 드물기에 기사가 먼저 손을 흔들어 주니 좀 이상했다. 하지만 그날 기온이 40도였기 때문에 빨리 차에 타고 싶었다”고 스즈키는 회상했다. 운전기사는 스즈키가 요청한 경로로 가지 않았다. 그가 수차례 주의를 줬지만 기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수시로 휴대전화를 조작했다.

그간 크고 작은 방문단을 200회 이상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으며 수년 동안 중국 대학에서 강의해온 스즈키는 그날 호텔을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수상했다고 했다.

공항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마자 스즈키는 덩치 큰 남성 6명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베이징 국가안전부(MSS)에서 왔다며 리둥(李東) 당시 부장이 서명한 체포 영장을 보여줬다. 체포 사유는 간첩죄였다.

7개월 동안 햇빛 본 건 단 15분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큰 혼란에 빠졌다.” 스즈키는 말했다. 눈이 가려진 채 휴대폰, 지갑 등 소지품을 압수당하고 벨트마저 빼앗긴 그는 달리는 차 안에서 “심사만 받으면 무사히 풀려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약 한 시간 후 차는 멈췄다. 남성들은 스즈키를 제자리에서 몇 바퀴 빙빙 돌게 한 후 건물 안으로 들여보냈다.  

베이징 국가안전부 비밀 게스트하우스 502호실의 내부 개략도. | 스즈키 제공

그곳은 베이징 펑타이 지역에 있는 국가안전부 소유 비밀 게스트하우스였다. 스즈키는 그곳에서 7개월 동안 ‘주거 감시’를 받았다. “구금된 6년 중 이 7개월이 가장 가혹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502호실로 옮겨졌는데 방에는 침대, 테이블, 싱크대, 화장실, 샤워기가 있었고, 방의 네 귀퉁이에는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방 전체가 경비원의 감시에 노출돼 있었다. 간수들은 하루에 두 명씩 4교대로 근무하며 소파에 앉아 스즈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502호실에는 텔레비전도 시계도 없었고 검은 커튼이 항상 쳐져 있어 밖을 볼 수 없었다. 전등은 하루 24시간 켜져 있었고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스즈키는 복도 대각선 맞은편에 있는 504호실에서 심문을 받았다. 심문관은 3명이었고 주 심문관은 스즈키에게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스즈키가 7개월간 갇혀있던 베이징 국가안전부 비밀 게스트하우스 5층의 내부 개략도. | 스즈키 제공

심문 내용은 주로 스즈키 친분 있는 중국 공산당 고위 관리와 일본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심문관은 저명한 중국문제 전문가들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며 “중국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 날 주 심문관이 물을 마시러 나갔을 때 심문관 중 한 명이 스즈키에게 ‘나를 아느냐’고 물었다. 스즈키는 그제야 그가 2010년 일본-중국 나무 심기 행사에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스즈키는 깜짝 놀랐다. “양국 정부가 주최하는 우호 행사조차 국가안전부가 감시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고 그는 회상했다.

7개월 내내 그가 오갈 수 있는 공간은 이 두 방이 전부였다. 심문 외에는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고 하루 종일 햇빛을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스즈키는 참다못해 햇볕을 쬐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받아들여졌다. 그는 창문에서 1m 떨어진 복도 끝으로 끌려갔다. 창문에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경비원이 그를 막았다. “그들은 내가 창문 밖을 보고 이 비밀 게스트하우스의 위치를 알아챌까 봐 두려워했다”고 그는 말했다.

15분 동안 햇볕을 쬐도록 허락받은 스즈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주거 감시를 받는 동안 햇빛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스즈키는 비밀 게스트하우스, 구치소, 감옥 이렇게 세 곳을 거쳤다. 이 가운데 비밀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어난 거주지 감시가 가장 큰 인권침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지금도 당시 일을 회상하면 분노를 참지 못한다.

·中 우호 사업의 새로운 스타

중학교 시절 스즈키는 “언젠가 중국은 세계 강국이 될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중국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중국 포털 사이트 바이두 백과에 소개된 스즈키의 모습. | 인터넷 사진

대학 졸업 후 전국 농림노동조합에 가입해 사회주의 국가와의 교류를 담당했던 그는 1983년 8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인 차오스(乔石)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 고위층을 만나고 당시 중앙노동조합총연맹 부총서기였던 장샹산(张香山)과도 친분을 쌓았다. 이후 장샹산을 통해 국제연합 중앙위원회,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중앙위원회, 문화부 인사 등 중국 공산당 고위 관리들과 관계를 맺었다.

스즈키는 중국 내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일본 내에서도 ‘중국 전문가’로 통했으며 주(駐)중 일본 대사관, 일본 언론사 기자, 정보기관, 국회의원 등이 신뢰하는 중국 문제 자문역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역사 문제,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 야스쿠니 신사 문제 등과 관련해 일본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중국의 일본 친구’로 인정받았다.

진정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스즈키는 티베트를 제외한 모든 중국의 성(省)을 여행했다. 지방정부 수도뿐 아니라 시골까지 여행하며 그 어떤 일본인보다도 중국과 가까이 지내겠다는 신념으로 빈곤 지역의 많은 어린이를 후원했다.

양국 교류 증진을 위해 노력했던 스즈키는 일본과 중국의 정계를 누비며 일중우호협회 최연소 회장으로 선출됐으며 일중 우호 사업의 새로운 스타로 평가받았다. 

사라진 외교관

2013년 12월 어느 날, 스즈키는 베이징에서 주일 중국 대사관 참사관 출신 탕번위안(湯本淵)과 만나 식사를 같이했다. 탕번위안은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식사 도중 스즈키는 탕벙위안에게 김정은이 고모부 장성택을 살해한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고, 상대방은 “모른다”고 답했다. 이 저녁 식사 대화로 인해 몇 년 후 두 사람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2017년 2월 16일, 스즈키는 간첩 혐의로 정식 체포돼 베이징에 있는 국가안전부 구치소에 구금됐다. 수사관들은 그에게 탕번위안을 만났을 때 장성택에 대한 정보를 문의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스즈키는 “당시 일본 언론은 이미 장성택의 피살 소식을 보도했고, 이는 비밀이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수사관은 “신화통신이 보도하지 않은 소식은 모두 기밀”이라고 했다.

법정으로 가는 경찰차 안에서 스즈키는 우연히 탕번위안과 부딪쳤다. 탕번위안은 스즈키보다 먼저 체포된 상태였다. 그는 “중국 공산당에 비밀경찰이 있다”며 “일본에 돌아가면 이 사실을 꼭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했다. 또 “정보기관인 일본 법무성 공안조사청 내에 중국 스파이가 있으며 그는 일반 스파이가 아니라 고위급 스파이다”라고 토로했다. 탕번위안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일본 정보요원들의 행적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스즈키는 심문 과정에서 공안조사청의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았고, 조사청 직원의 신분증 사진을 보고 신원을 확인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스즈키는 에포크타임스에 “이는 탕번위안의 말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일 중국 대사관 참사관 출신 탕번위안(湯本淵)과 거광뱌오(葛廣彪) 전 나고야 주재 중국 공산당 영사관 총영사(오른 쪽). | 인터넷 사진

2017년 5월 스즈키는 기소됐다. 기소장에는 스즈키는 일본 공안조사청 간토 공안조사국으로부터 ‘거광뱌오(葛廣彪) 나고야 주재 중국 공산당 영사관 총영사와 접촉해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게광뱌오는 2014년 1월 중국 공산당 나고야 영사관 총영사로 부임했다가 2016년 8월 퇴임했다.

스즈키는 “내가 중국 공산당의 권력 투쟁에 연루돼 중국 공산당의 표적이 됐다”고 주장했다. 주로 공청단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던 스즈키가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 집권 후 진행된 공청단 숙청에 휘말렸다는 것이다. “나를 간첩으로 만들면 당국은 공청단 파벌이 간첩과 거래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단속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국가안전부의 표적은 공청단이 아니라 외교부라고 믿었다. 탕번위안과 스즈키는 모두 한 사람과 관련된 질문을 받았는데, 그가 중국 공산당 고위 외교관이기 때문이다. 탕번위안은 법정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스즈키에게 “당국은 외교부를 숙청하고 있다. 해당 고위 관리를 포함한 많은 외교부 직원이 숙청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즈키는 일본에 귀국한 후 인터넷에서 탕번위안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그가 기소됐는지, 몇 년형을 선고받았는지, 아직 살아있는지 스즈키는 알 수 없었다. 스즈키에 따르면 그가 수감돼 있는 동안 주아일랜드 중국 대사가 간첩 혐의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교도소에 퍼졌다. 중국 당국은 간첩 사건의 재판이나 결과를 공개하지 않는다. 탕번위안도 사형 선고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스즈키는 “지금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만, 그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스즈키가 경험한 중국 감옥 

구치소에 수감된 동안 스즈키는 부패한 고위 관리, 외교관, 외국인 용의자, 신장 위구르족, 항공 전문가 등 다양한 사람과 함께 지냈다. 이들과 접촉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스즈키에 의하면 수감자 가운데는 중국 공산당 국가안전부 직원도 있었다. 그는 마카오 회사 사장으로 위장해 첩보 활동을 벌였는데,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포섭돼 이중간첩으로 지내다 체포됐다. 그는 스즈키에게 “센카쿠 열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중국 어선 선원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민병대 소속이 아니라 대부분 중국 인민해방군 군인들”이라고 했다. 

중국 감옥에는 이른바 ‘테러리스트’로 지목돼 잡혀온 신장 위구르족 출신도 있었다. 모두 젊은 남성이었고 그중 일부는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보통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알 수 없는 곳으로 이송된다. 스즈키에 따르면 위구르족이 감옥에 있는 동안 경비들은 매우 예민해지며 스즈키 등 다른 재소자들의 소지품도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조사했다.  

스즈키가 가장 충격을 받은 전 대법원 판사였던 왕린칭(王林清)과의 만남이었다. 2018년 말, 왕린칭은 자신이 관여했던 ‘산시성 1000억 위안(18조1800억원) 규모 광업권 사건’ 파일도난당했으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동영상을 녹화했다는 내용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 2019년 2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법무위원회 합동 조사팀은 해당 사건을 왕린칭의 자작극으로 판단해 그를 조사했다. 이후 왕린칭은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다. 

왕린칭(王林清) 전 중국 대법원 판사. | 인터넷 사진

왕린칭은 “체포되기 전에는 중국의 법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른바 ‘법치주의’는 모두 거짓이고 중국에는 법과 인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출소 후 미국에 가서 중국의 인권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 이를 위해 감옥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법정 선고 후 스즈키는 베이징 제2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관들은 외국인 수감자들에게 중국 국가(國歌), 중국 공산당 노래를 배우도록 강요했으며 매일 중국중앙텔레비전 방송국(CCTV) 영어 프로그램을 틀어줬다. 토요일에는 중국 공산당 역사 관련 영상을 틀어주는데 항일전쟁, 이른바 ‘항미원조(6·25전쟁)’ 관련 영화도 자주 상영했다. 

스즈키는 한 달에 한 번씩 가족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고, 90세인 아버지는 항상 스즈키에게 건강을 챙기라고 격려했다. 아버지의 격려가 그에게 큰 위로가 됐다.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살고 싶다.” 이 신념을 지키며 6년간의 감옥 생활을 견뎌낸 스즈키는 2022년 10월 11일 마침내 일본으로 귀국했다. 

중국에서 체포됐던 다른 일본인은 귀국 후 침묵을 지켰지만, 스즈키는 책을 출간하고 언론과 적극적으로 인터뷰하며 자신이 겪은 일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더 이상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일본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는 말했다.  

스즈키가 올해 4월 출판한 자서전 ‘중국에 구속된 2279일 – 간첩으로 몰린 친중파 일본인의 기록’ 표지. | 야이타 아키오(矢板 明夫) 일본 산케이신문 대만 타이베이 지국장 페이스북 화면 캡처.

그는 “중국 공산당 치하의 중국에는 인권이 없다. 나는 중국의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 중국과 중국인을 좋아하는 내 마음은 변한 적이 없지만, 나는 더이상 중국 공산당을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