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日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봉환, 어디까지 왔나?

2021년 05월 28일 오후 3:49 업데이트: 2021년 05월 28일 오후 6:06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군인, 군속 유해봉환 현황17%에 불과
··연대, 일본 오사카 통국사(統國寺) 유골 74위 국내로 봉환
, 자국민 유해봉환에 적극적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승소 판결로 촉발된 한·일 간 갈등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법원은 ‘일본 정부가 개입된 비인도적 불법행위’에 관해 청구권 협정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반면 일본 정부의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청구권 문제가 종결되었다는 입장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는 아직도 한일 양국 간 논란의 불씨로 남아있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조선인 피해현황.ㅣ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 캡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위원회)’ 활동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 피해자는 군인 동원 20만 9279명, 군무원 동원 6만 668명, 노무자 동원 753만 4429명 등 총 780만 4376명에 이른다. 이는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인 인구의 약 30%에 해당하는 인원이 강제동원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유해봉환 관련 최초의 기록 ‘美 연합국총사령부의 명령서’
1948년 두 차례 군 관련 유골 7천 973위 봉환…실제 유골 1024위, 6949위는 위패만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로 동원되어 희생된 군인, 군속(군무원), 노무자 유해봉환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맥아더 연합국총사령부(SCAP/GHQ)가 일본 정부에 보낸 명령서이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1947년 12월 19일 ‘조선인 유골 등 송환에 관한 명령 건’을 일본에 보내 조선인 군 관련 희생자 유골 봉환 지시를 했다. 1948년 2월 3일 유골 5031위가 부산으로 봉환됐으며, 같은 해 5월 31일 총사령부의 2차 명령에 의해 2942위가 봉환됐다. 하지만 대일항쟁기위원회의 활동보고서에는 당시 봉환된 유골 중 실제 유골은 1024위였을 뿐 나머지 6949위는 위패만 온 것으로 조사됐다.

대일항쟁기위원회의 활동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부터 2010년까지 군 관련 희생자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숫자는 총 9597위이다. 이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봉환된 숫자는 7973위로 전체의 83%를 차지했다. 정부 수립 후 봉환된 숫자는 1616위이다. 대략 30만 명의 인원이 일본의 군인과 군속으로 끌려갔으며, 일본 측 자료에도 2만 1919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한국으로 돌아온 유해봉환 숫자는 9597위에 불과한 것이다.

 

‘한일유골협의체’, 4차례에 걸쳐 423위의 국내 봉환
‘조선인 유골송환취진위원회’, 남북일 연대…유골 74위 국내 봉환

2004년 12월 17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전쟁 당시 한반도 출신 민간 징용자의 유골 문제에 대해 소재 확인 및 유골봉환을 희망한다”고 요청하자 이에 대해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무엇이 가능한지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이 회담은 강제동원 징용 피해자 유골을 언급한 최초의 정상 간 협의였다. 이를 계기로 양국은 ‘한일유골협의체’를 추진했다.

정부는 ‘유골봉환실시요령’을 마련해 군인·군속 유골을 봉환하기에 앞서 일본 정부의 관여와 책임, 사죄를 분명히 한일 정부 간에 봉환절차를 명문화했다. 이 문건의 주요 내용은 봉환사업의 목적, 원칙, 주체, 방일단 구성 방법, 비용, 추도식, 봉환절차, 사후 조치, 언론보도 방침으로 구성됐다.

2012년 김포공항을 통해 봉환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3차 36위. ㅣ(사)아태평화교류협회 제공

한·일 양국의 협의로 2008~2010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일본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된 423위의 유골이 국내로 봉환되어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 안치하는 성과를 냈다.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고통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강제동원의 실상이 부분적으로 밝혀졌지만 아직 그 피해의 규모가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풀리면 남북이 공동으로 강제동원 피해 실태 조사를 하는 것도 검토할 것입니다”고 말했다. 유해봉환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위해선 남·북·일 간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2018년 7월 남북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분단 이후 최초로 결성한 ‘조선인 유골송환추진위원회’는 새로운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고자 설립했다.

조선인 유골송환추진위원회는 일본의 시민단체를 참석시키고 일본 내 총련까지 함께 함으로써 2019년 2월 28일 최초로 ‘남·북·일’이 연대하여 진행한 유해 공동사업의 일환으로 오사카 통국사(統國寺) 유골 74위를 봉환해 제주시 애월읍 선운정사에 안치시켰다.

2018년 ‘4.27 판문점선언’이 이러한 성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판문점 선언 4항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의 접촉을 활성화’하며 5항의 ‘남과 북은 민족 분단으로 발생한 인도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합의정신에 따라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가 국내로 봉환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후 남북 관계도 악화되어 봉환 사업은 더 이상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을 비추어볼 때 남북 간 교류가 봉환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유해봉환 일러스트.ㅣ(사)아태평화교류협회 홈페이지

,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6.25전쟁 미군 유해 송환에 강한 의지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북미 정상회담’의 합의문 4조에는 “미국과 북한은 신원이 이미 확인된 전쟁 포로(POW) 및 전쟁 실종자(MIA)들의 유해를 즉각 미국으로 송환하는 것을 포함해 유해 수습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미국 정부가 자국민 보호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보여줌과 동시에 6.25전쟁 참전 용사들을 ’영웅‘으로 칭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들이 공동성명에 ‘6·25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미군 유해 송환’이 포함된 ‘판문점 선언’과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에 명시한 것도 미국이 유해봉환에 강한 의지를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패전국이 된 일본 정부는 자국민 출신 유골봉환을 1950년대부터 시작했으며 2016년 ‘전몰자 유해수집 추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국가 차원의 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취재본부 이진백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