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유학생, 런던 명소 벽화거리에 ‘공산당 정치구호’ 도배 논란

한동훈
2023년 08월 9일 오후 1:55 업데이트: 2023년 08월 9일 오후 1:55

서구 문명 중심인 영국 런던 한복판서 벌어진 친공·반공 대결
현지 중국인들, ‘공정’ 앞에 불(不)자 붙여 ‘불공정’으로 풍자

영국 수도 런던의 유명 벽화거리에 중국 공산당의 선전구호가 등장해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밤, 중국인 유학생들이 런던의 벽화거리 ‘브릭 레인’ 벽면 일부를 하얀 페인트로 덧칠하고 그 위에 ‘부강·민주· 문명·화합·자유·평등·공정·법치·애국·경업(직업정신)·신의·우호’ 등 12개 단어를 한자로 적어 넣었다.

붉은 스프레이로 써놓은 12개의 단어는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 핵심가치’다. 2012년 11월 시진핑 체제 출범을 알린 중국 공산당의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새롭게 지정됐다.

사용된 한자는 정체(正體) 한자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간략화한 간체자였다. 간체자는 편리한 사용을 내세웠지만 중국 전통문화 파괴라는 비판을 받는다. 공산당 ‘문화혁명’의 일환이다.

원래 해당 벽면에는 그래피티 작가들의 작품이 그려져 있었으나, 중국인 유학생들은 기존 작품들을 ‘말소’하고 중국 농촌 마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정치 선전구호를 도배했다.

중국인 유학생들의 새벽 ‘도배’로 논란이 된 영국 런던의 벽화거리. 위쪽은 덮어쓰기 전, 아래는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으로 덮어쓴 후의 모습이다. 위 사진에서 가운데 남성 얼굴 그림이 숨진 그래피티 작가 마티에게 헌정된 작품. | 웨이보 캡처

이들은 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과 중국 소셜미디어 겸 쇼핑몰 ‘샤오홍슈(小紅書)’에 “우리는 런던의 벽을 칠해버렸다”, “사회주의 핵심 가치를 전면적으로 선전했다”고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 공개된 영상에서 포착된 가담자는 모두 9명이었다.

BBC에 따르면, 중국 온라인에서는 즉각 격렬한 반향이 일었다. 일부는 “문화 수출”이라며 자랑스러워했지만 많은 이들이 “중국의 부정적 이미지 강화’, “문화 침략”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행위를 한 인물은 영국에서 유학 중인 중국인 이췌(一鵲)라는 인물로 그는 자신의  SNS에 “문화 식민주의에 대한 항의를 행위 예술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항의의 표시로 사회주의 핵심 가치를 써 놓은 이유에 대해서는 “(이 가치들은)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공동 목표라고 믿는다”고 B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런 발언을 종합하면 서방의 문화 전파에 맞서 중국도 자신의 가치를 수출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하지만, 정작 이런 가치들이 중국 현지에서는 오히려 실종됐다는 점이 집중적으로 거론된다. 민주, 문명, 자유 등이 ‘사회주의 핵심가치’가 맞느냐는 비판도 나온다. 중국은 직접 선거제도가 없어 민의가 정치에 반영되지 않으며,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으로 자국 문화를 말살한 바 있다.

현지 중국인들도 이췌와 중국인 유학생들의 이러한 행위에 항의하고 있다. 영국에 체류하는 중국인들은 해당 벽화를 찾아가 평등 앞에 ‘없을 무(無)’ 자를 붙이거나 공평 앞에는 ‘아니 불(不)’ 자를 붙여 무평등, 불공정 등으로 비꼬기도 했다. 시진핑 풍자 포스터도 붙였다.

중국 산시성 진청(晋城)시 친수이(沁水)현의 한 교외지역 주택 벽에 그려진 ‘사회주의 핵심가치’ 구호. | 웨이신 화면 캡처

논란이 확산되자 이췌는 7일 “정치적 입장이 없다”며 해명했다. 공산주의를 선전하려는 게 아니라 토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이 사이버 괴롭힘과 살해 위협을 받고 있으며 온라인에 자신과 부모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고 밝혔다.

이췌의 행위 예술이 다른 작가들이 공들인 작품을 희생시킨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VOA에 따르면, 이췌와 동료들은 유명한 그래피티 작가인 고(故) 마티에게 헌정한 작품까지 뒤덮어 버렸다. 작품 구상에서 실행까지 적게는 몇 주, 심지어 몇 개월 동안 시간과 에너지를 들인 작품을 이췌가 개인의 명성을 얻으려 영구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번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췌의 한 동료 작가는 “작품 위에 작품을 그리는 것이 거리예술 문화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호주에서 활동하는 중국 정치 풍자 만화가인 바이디우차오는 “모든 작품은 결국 새 작품으로 덮이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오래됐거나 손상된 작품을 선택하며, 최근 작품이거나 의미가 있는 작품은 존중의 의미로 놔두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RFI는 한 네티즌을 인용해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모든 찬란한 문화를 일제히 ‘말소’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국’스러운 예술 작품”이라고 꼬집었다.

VOA는 중국의 과격 국수주의 네티즌인 샤오펀훙들은 런던 한복판에서 공산당 선전구호가 등장한 일에 환호하고 있으나, 반대자들은 중국 공산당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음이 폭로된 것으로 이번 사건을 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