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시진핑의 최대 공포는 관료 시스템의 작동 불능

석산(石山·스산)
2023년 01월 22일 오전 9:09 업데이트: 2023년 01월 22일 오전 9:09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1월 9일 열린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전체회의 연설에서 ‘배경이 있는 정치 사기꾼’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누가 ‘정치 사기꾼’이고, 또 누가 그 ‘배경’인가? 시진핑은 이 회의에서 중앙 정부의 지시를 집행함에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不偏向), 변통 부리지 않으며(不變通), 본래 기조를 흐트리지 말 것(不走樣)”을 특별히 강조했다.

중요 정책 방향성을 제시하는 회의에서 이런 표현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중국에는 “장수가 전쟁터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將在外, 君令有所不受)”는 말이 있다. 즉 현장에서 직접 일을 처리하는 자에게는 어느 정도 재량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진핑의 이 말은 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시진핑은 지난 12월 31일 신년사에서는 “중국이 이렇게 큰데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라며 “소통과 협상을 통해 공감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이 유화적인 발언은 며칠 후 중앙기율위 회의에서는 살벌한 어조로 바뀌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또 무엇일까?

사실 정치는 인간의 본성, 특히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작동되는 속성을 지녔다. 욕망과 두려움은 도가(道家)의 관점에서 보면 음·양의 관계로, 두려움은 음이고 욕망은 양이다.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면서 만물이 생겨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위정자의 통치는 어떨까?

중앙기율위의 결정을 보면 시진핑이 정치사기꾼, 배경이 있는 정치사기꾼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아래 관원들이 불복할까 두렵고, 그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까 두려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변통 부리지 않으며, 본래 기조를 흐트리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전 국민을 향한 신년사에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왜 이렇듯 이중적 태도를 보일까? 간단히 말하면 시진핑과 그의 핵심 그룹은 당내 고위 관료층만 경계할 뿐 국민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20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을 살펴보자.

리창(李強)은 1978~1982년 닝보농학원(寧波農學院)에서 농업기계학을 전공했다. 이 학원은 중졸 혹은 고졸 학력을 지닌 사람을 대상으로 2년간 실무를 가르치는 중등 전문학교이다.

딩쉐샹(丁薛祥)은 1978년 16세의 나이로 동북중형기계학원(현 옌산대) 기계제조학과에 입학했고, 리시(李希)는 1982년 서북사범학원 중문과를 졸업했다.

이들 3명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학교육 기능이 정상화된 뒤 학력을 쌓은 셈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차이치(蔡奇)는 1975년 ‘공농병(工農兵) 학생’으로 추천받아 푸젠사범대학 정치교육과에 입학했다. 1978년 졸업 후 학교에 남아 당위원회 간부로 일했다.

시진핑은 칭화대 1975학번 공농병 학생이고, 자오러지(趙樂際)는 베이징대학 1976학번 공농병 학생이다.

왕후닝(王滬寧)은 1972년 공농병 학생으로 상하이사범대학을 다닌 후 1982년 푸단대학에 입학해 국제정치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많은 사람이 공농병 대학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 대학들은 문을 닫았고, 린뱌오(林彪) 사건(1971년) 이후 1972년부터 수업을 재개했다. 입학 정원(定員)은 공산당 말단 조직, 군대, 공장, 그리고 농촌에서 추천한 학생들로 채워졌다. 이렇게 추천받아 입학한 학생이 바로 공농병 대학생이다. 이들은 입학시험을 거치지 않고서 말단 조직에서 ‘정치적으로 믿을 수 있다’고 판정한 것만으로 입학 자격이 주어진 자들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추천된 사람들도 약식(略式) 시험을 봐야 했지만, 1974년 랴오닝성에서 ‘장톄성(張鐵生) 사건’이 발생하면서 1975년부터는 시험을 볼 필요가 없게 됐다.

장톄성은 지식청년으로, 1973년에 대학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답안지를 백지로 낼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그는 답안지 뒷면에 “농촌 생산과 혁명 활동에 바빠 책 볼 시간이 없었다”고 썼다. 결국 중국공산당 문혁파는 그를 ‘백지답안 영웅(白卷英雄)’으로 떠받들었고, 1975년부터는 시험을 전면적으로 면제했다.

새로 선출된 상무위원 7명 중 공농병 대학생이 4명이다. 시진핑, 자오러지, 차이치는 1975년 이후에 입학했기에 약식 시험마저 보지 않았다. 왕후닝은 1972 학번 공농병 대학생이지만 1982년 푸단대 석사과정을 마쳐 학력(學歷)에 금색 덧칠을 한 셈이다.

그 외 상무위원들은 나중에 재직하면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정상적인 학력으로 볼 수 없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학 입시가 부활한 후 수년 동안은 경쟁이 치열했다. 1977년 대학수능시험 합격률은 5%, 1978년 6.5%, 1979년 5.9%였다. 이런 경쟁을 뚫고 입학한 학생들과 기존의 공농병 학생들은 매우 큰 학력(學力) 격차를 보였다.

따라서 ‘공농병대학생’이란 타이틀은 졸업 후 사회 각 방면에서 활동하는 데 핸디캡으로 작용했다.

이들보다 앞선 세대는 어땠을까?

장쩌민 전 공산당 총서기는 상하이교통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일찍이 왕징웨이(汪精衛) 괴뢰정부가 세운 중앙대학에서 공부했다. 항일전쟁 승리 후 이 중앙대학의 일부 이공과가 상하이교통대로 통합되면서 장쩌민은 상하이교통대로 옮겨갔다. 그는 소련에 유학까지 다녀왔다.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와 후진타오(胡錦濤) 전 공산당 총서기는 칭화대를 졸업했다.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는 지질대학을 졸업했는데, 지질대는 베이징대에서 갈라져 나온 대학으로 수준이 높다.

사실 덩샤오핑(鄧小平) 등 공산당 원로들은 1950년대 출생자들에 대해 안심하지 못했다. 이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의 주력이었고, 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당 원로들은 후진타오부터 리커창, 쉬차이허우, 리위안차오, 심지어 보시라이까지 모두 문화대혁명 이후 정규 대학교육을 받은 인물을 뽑아 권력 중심부에 배치했다. 하지만 이러한 후계자 양성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된 것은 아니다.

시진핑은 취임 후 빠르게 권력을 장악하고 문혁파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상무위원 7명 중 딩쉐샹을 제외하면 모두 50년대 출생자로 문화대혁명 당시 청년이었다. 공산당 원로들의 후계자 목록에는 이들이 없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면, 현재의 지도부가 왜 ‘두 개의 확립(兩個確立)’과 ‘두 개의 수호(兩個維護)’를 특별히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확립’은 시진핑 당중앙과 전당의 핵심지위 확립과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사상의 지도적 지위를 확립한다는 것이고, ‘두 개의 수호’는 시진핑 당 중앙 및 전당의 핵심지위를 수호하는 동시에 중공 중앙의 권위와 집중통일 영도를 수호한다는 것이다.

중앙기율위는 연초 회의에서 “당의 정치건설을 강화하고, 정치적 판단력과 정치적 통찰력, 정치적 실행력을 제고해 당 전체가 정치적 입장, 정치적 방향, 정치적 원칙, 정치적 길에서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과 높은 수준의 일치를 유지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정치 기율(紀律)과 정치 규율(規矩)이 엄격해야 한다”고 당 전체에 요구했다. 단숨에 ‘정치’를 10번이나 언급했다. 한마디로 말을 잘 듣고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 강령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변통 부리지 않으며, 본래 기조를 흐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의 결정과 명령은 실행함에 있어서 약간이라도 변함이 있거나 변통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또 다른 문제를 보자.

리창은 곧 리커창을 대신해 국무원 총리를 맡게 되지만, 그의 경력에는 문제가 있다.

리창은 저장성 융캉(永康)시 당서기, 원저우(溫州)시 당서기, 저장성 성장, 장쑤성 당서기, 상하이시 당서기를 역임했다. 이번에 상무위원회에 입성해 오는 3월 열리는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국무총리가 된다.

그의 경력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행정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는 시진핑이 저장성 당서기로 있을 때 3년간 성장을 한 것 외에는 모두 당서기를 지냈다. 중국공산당 체제 내에서 당서기는 지방 1인자이기는 하지만 당무(黨務)를 담당하므로 행정 실무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문제는 리창이 중앙 업무, 특히 국무원 부처·위원회 업무 경력이 없다는 점이다. 역대 총리는 부처 장관에서 부총리로 승진하는 절차를 거쳤다. 국무원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이지만 내외부, 상하부, 각 지방의 다양한 이익집단이 얽혀 있고 이를 보완하고 조율하는 사안이 매우 많고 복잡하다. 국무원 내 각 부처와 위원회는 각종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더욱 복잡하다. 외부에서 방금 들어온 리창으로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짧은 기간 내에 장악하기는 힘들다.

오는 3월 열리는 전인대에서는 중국 공산당 역사상 가장 ‘완전한’ 지도부 교체가 이뤄질 것이다. 리커창 총리가 리창으로 교체되고, 4개 부처의 부부장(차관)도 교체되고, 여러 주요 부처 책임자도 모두 교체될 것이다. 시진핑의 또 다른 측근인 허리펑(何立峰)도 중임을 맡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무원 총리는 리창이지만 허리펑이 중요 결정을 할 것으로 보인다.

허리펑도 50년대 출생자이고 지식청년이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샤먼(廈門)대에 입학해 재정금융학을 전공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2014년부터 국무원 발전개혁위원회 부주임, 주임을 맡아오면서 국무원 실무 경력을 쌓았다는 점이다.

허리펑은 대학 졸업 후 샤먼에서 수년간 시진핑 아래서 일했다. 그는 시진핑 측근 세력인 ‘즈장신쥔(之江新軍)’ 가운데 비중 있는 인물인 셈이다. 향후 국무원에서는 그의 역할이 클 것이고 많은 인사 결정권을 갖게 될 것이다.

시진핑이 10년 동안 추진한 프로젝트는 대부분 부실 프로젝트가 됐다. 특히 최근 3년간 고수한 제로 코로나 정책은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지방정부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문제는 베이징 당국이 추진하는 정책이 근본적으로 모순덩어리라는 점이다.

그중 하나가 ‘제로 코로나’ 정책이다. 코로나가 발생하면 그 지역 관료에게 책임을 묻는 동시에 경제를 안정시키라고 강박한다. 바이러스를 통제하려면 도시를 엄격히 봉쇄해야 하는데, 그러면 경제가 죽고 사회 갈등이 폭발한다. 그러면 베이징 당국은 과도하게 통제한다고 문책한다.

이래도 문제가 되고 저래도 문제가 되는 이런 상황에서 지방 관리들은 구호만 외칠 뿐 실제로는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진핑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관료 시스템이 자주적으로 움직이는 힘을 상실하면서 체제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중국 공산당에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 될 것이다. 당 안팎에 갈등의 씨앗이 수없이 잉태돼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작은 사건 하나에도 크게 폭발할 수 있다.

사람의 타산은 하늘의 계산만 못하느니(人算不如天算), 때(時)를 가늠하든 명(命)을 헤아리든 마찬가지다. 중국 공산당 종말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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