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청명절 맞아 리커창 전 총리 추모열기 차단

강우찬
2024년 04월 5일 오후 2:05 업데이트: 2024년 04월 5일 오후 2:05

지난 4일 청명절, 리커창 전 중국 총리를 추모하려는 시민들의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당국이 리커창의 옛 거주지 주변에 이른바 ‘안정 유지’ 인력을 대거 배치해 접근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달 초 중국 소셜미디어에 게재된 영상을 보면 리커창이 학창 시절을 보낸 안후이성 허페이시의 ‘훙싱루 80호’ 주변에는 약 10m 사이를 두고 경찰관 한 명씩 배치됐다.

청명절을 맞아 리커창의 옛집을 찾으려는 추모객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청명절과 한식을 구분하지만, 중국은 둘을 같은 명절로 여긴다. 대개 한식은 청명절과 같거나 다음 날이며, 한국에서는 이날 조상의 묘에 참배하고 제사를 지낸다. 반면, 중국에서는 청명절에 성묘하는 풍습이 있다.

4일 허페이시의 한 화훼업체 직원은 “훙싱루 80호 주변에 경계가 이뤄지고, 주변 지역으로의 꽃배달이 금지됐다”며 “위반하면 벌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직접 훙싱루 80호에 가지 못하는 시민들이 대신 조화라도 배달해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일도 차단당했다는 것이다.

훙싱루 80호는 지난해 10월 27일 리커창 당시 국무원 총리가 심장마비로 숨진 이후 그를 추모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시민이 이곳에 찾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놓아둔 꽃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쌓였다.

베이징 변호사 출신으로 현재 캐나다에서 중국 민주화 운동가 겸 중국 평론가로 활동하는 라이젠핑은 “시진핑과 공산당 집권층은 시민들이 리커창 총리를 추모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있다”며 “이는 공산당 정권이 시민들과 반대편에 서 있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라이젠핑은 “중공은 자신들의 집권에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청명절 추모 열기가 정권에 대한 항의나 저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커창이 초중고 시절을 보낸 훙싱루 80호. 다가구 주택인 이곳은 ‘문사관(文史館)숙소’라고 적힌 주소 표지판이 붙어 있었으나, 지난 2월 정부 홍보 포스터로 해당 표지판이 가려진 사실이 알려졌다. | 웨이보

중공 2인자…퇴임 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리커창은 시진핑의 당내 경쟁자였지만, 시진핑이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한 총리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경제·사회 분야의 책임자로서 쓴소리를 늘어놓으며 시진핑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20년 5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그는 “6억 명 월수입이 겨우 1000위안( 약 18만원)밖에 안 돼,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며 중국 경제의 열악한 현실을 전 세계에 공개했다.

마침 시진핑이 샤오캉(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 건설을 달성했다며 중국 인민을 상대로 선전 공작을 펼치던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 터진 리커창의 폭로는 일종의 항명으로까지 읽혔다.

리커창은 시진핑의 ‘제로 코로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2022년 5월 성·시급 지방정부 책임자 등 10만 명 공직자가 모인 화상 회의에서 “2020년 코로나19 사태 때보다 어려움이 더 크다”며 방역 지상주의로 교통·물류가 경색된 상황을 강하게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3월 양회에서 정부 업무보고를 끝으로 퇴임했으며, 같은 해 10월 26일 상하이에서 휴식을 취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다음 날 새벽 0시 10분 사망했다고 전해졌다.

중공은 전·현직 지도자들에게 철저한 건강 관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리 총리는 은퇴 7개월 만에 6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하루 만에 사망했다는 점에서, 중국 내부에서 ‘수상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지난 3월 13일(현지 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리커창 전 중국 총리가 함께 있다.|Noel Celis/POOL/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특히 리커창이 시진핑의 사실상 마지막 경쟁자라는 점에서도 이 같은 의혹이 증폭됐다.

그는 지난해 3월 퇴임 직전 국무원 직원들에게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으며 하늘에도 눈이 있다(人在做, 天在看, 蒼天有眼啊)”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면 언젠가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격려의 말로 풀이될 수 있지만, 제동 없이 권력을 휘두르는 중공 지도부에 ‘하늘 무서운 줄 알라’고 경고한 메시지로도 해석됐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중국 평론가 차이션쿤은 지난 3일 자신의 소셜미디어 엑스(X·구 트위터)를 통해 훙싱로 80호 주변에 추모객들이 놓아둔 많은 꽃과 “훙싱루에 가는 추모객은 무료로 태워주겠다”고 한 현지 택시기사들의 사연을 전했다.

그러면서 “당국은 추모 분위기가 온라인에 퍼지는 것을 최대한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