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中공산당이 일본의 침략에 감사하는 이유

왕요췬(王友群)
2022년 10월 18일 오후 11:29 업데이트: 2022년 10월 19일 오전 9:15

2차 세계대전을 치른 기간은 7년(1939~1945년)이 채 안 되지만, 중국이 일본에 침략당한 기간은 14년(1931~1945년)이나 된다. 중국은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기간 중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국가다.

리중제(李忠傑) 전 중국공산당 중앙당사연구실 부주임에 따르면, 항일전쟁 기간에 중국이 입은 인명 피해는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에 3500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경제적 피해는 1937년 기준으로 6000억 달러(직접적인 재산 피해 1000억 달러, 간접 경제 손실 5000억 달러)가 넘는다.

팡쥔(方軍)·천강(陳所)이 공동 저술한 ‘최후의 존엄(最後的尊嚴)’에 따르면, 중화민국 정부는 항일전쟁 기간에 타이위안회전(太原會戰) 등 10만 명 이상이 투입된 전투를 22차례, 수만~10만 명이 투입된 전투를 1117차례, 1만 명 규모의 전투를 3만8931차례 치렀다.

항일전쟁 기간 국민당군은 341만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장성 206명, 전투기 조종사 4300여 명이 전사하고 전투기 2468대가 격추되고 해군 함정 75%가 격침되거나 파손됐다.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볜슈웨(卞修躍) 박사는 2005년 7월 5일 관영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은 전쟁터에서 중국 장병들에게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혔을 뿐 아니라 무고한 중국 민간인을 수없이 살해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8년(1937~1945년) 동안 전국토의 3분의 2지역에서 무차별 폭격 등 잔혹한 침략 행위를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살해한 민간인은 어림잡아 5000만 명에 이른다. 이 중에는 집단학살도 4000여 건이나 되고 피살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가 상당수 포함됐다. 또 동원한 살인 방법만 해도 250종류나 됐다.”

이처럼 일본군의 침략 전쟁은 중국과 중국 인민에게 참혹한 재앙과 씻을 수 없는 오욕(汚辱)을 안겼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일본군의 침략 행위를 어떻게 대했을까?

◇마오쩌둥, 일본군의 침략에 감사

1949년 중국 본토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일본 인사를 만난 자리에서 ‘일본에 감사한다’는 말을 일곱 번이나 한 적이 있다.

또한 마오쩌둥은 1964년 7월 9일 제2차 아시아경제심포지엄에 참석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대표들과 회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나미고 사부로라는 일본 자본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일본이 당신들을 침략해 대단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니다. 만약 일본 제국주의가 대규모 침략전쟁을 일으켜 중국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면 전 중국 인민이 단결해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일제는 우리에게 좋은 교사가 됐다. 첫째는 장제스를 약화시켰고, 둘째는 우리가 공산당이 이끄는 근거지와 군대를 키울 수 있도록 했다. 항일전쟁 이전에 우리 군대는 30만 명에 이르렀으나, 우리 스스로 잘못을 범해 2만여 명으로 줄었다. 항일전쟁 8년 동안 우리 군대는 120만 명으로 늘었다. 보다시피 일본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지 않았는가?”

마오쩌둥은 1964년 7월 10일, 일본 사회당 사사키 코죠우 위원장을 만났을 때도 같은 태도를 보였다. 당시 사사키 위원장이 “중국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줘서 대단히 죄송하다”고 하자 마오쩌둥은 “미안할 것 없다. 일본 군국주의는 중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고, 중국 인민이 정권을 빼앗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신들 황군이 없었다면 우리가 정권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마오쩌둥이 일본군의 침략에 거듭 감사한 이유는 자명하다. 일본군의 침략 덕분에 중국 공산당이 기사회생하고 나아가 대륙을 차지할 수 있었으니 오죽했겠는가.

1930~1934년, 중국 공산당은 당시 중국의 합법 정부인 중화민국을 뒤엎기 위해 중화민국 국경 내에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을 설립하고 소수민족을 선동해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공산당 토벌 작전을 5차례나 벌였다.

국민당의 토벌 작전에 쫓긴 공산당은 1934년 10일 장시(江西)에서 철수해 ‘장정(長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장정 후 살아 남은 중국공산당 홍군의 병력은, 마오쩌둥이 실토했듯이, 2만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이 1937년 중국을 전면 침략하지 않았다면, 공산당은 중화민국 정부에 섬멸됐을 것이다.

공산당은 항일전쟁 14년 동안 오로지 ‘정권 탈취’에만 몰두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 발발한 후 중국 공산당은 역량을 ‘항일전쟁을 하는 척하는 데 1%, 항일 구호를 높이 외치는 데 12%, 세력을 키우는 데 87%’ 할애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공산당은 세력을 키우기 위해 침략자인 일본군과 결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국민당이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해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정권 탈취’를 위해 일본군과 손을 잡았다.

항일전쟁이 끝나자 중국 공산당은 14년간 피 흘려 침략자와 싸워온 중화민국 장병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마오쩌둥, 일본에 전쟁 배상 요구 안 해

침략당한 기간이 가장 길고 인적·물적 피해 규모도 가장 큰 중국은 승전국으로서 마땅히 패전국 일본에 배상 요구를 해야 했다.

근대에 들어 일본은 중국을 여러 차례 침략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침략해놓고 반항하면 진압한 뒤 전쟁 배상금을 받아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챙긴 배상금은 은화 2억3000만 냥에 달한다.

이는 당시 일본의 7년치 재정수입에 가까운 거액이다.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일본 외상은 “우리 나라 전체 수입이 8000만 엔에 불과하다. 이제 5억1000만 엔이 굴러들어올 것을 생각하니 정부와 일본 국민 모두 더없이 부유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1953~1977년, 일본은 20여 개국과 전쟁 책임에 관한 협정에 서명하고, 배상금으로 약 5000억 엔을 지불했다.

미얀마는 1억4000만 달러, 필리핀은 5억5000만 달러, 인도네시아는 2억2300만 달러, 캄보디아는 15억 엔, 라오스는 10억 엔을 받아냈다. 그리고 베트남(통일 전 남베트남)은 3900만 달러를 받아냈고,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통일한 후에 또 85억엔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나라로 일본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자격이 없었지만 일본군이 싱가포르에서 중국인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끈질기게 배상금을 요구해 2500만 싱가포르 달러를 받아냈다.

말레이시아도 싱가포르 덕분에 2500만 싱가포르 달러를 받았고, 한국은 3억 달러를 받아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11억 엔, 스페인은 20억 엔, 스웨덴은 5억 엔, 덴마크는 7억 엔을 받았다. 또 중국에 속했다가 독립한 몽골도 50억 엔을 받았다.

이 사례로 볼 때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아낼 이유는 충분하다.

1968년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1972년 중·일이 수교협상을 진행할 때 일본은 이미 중국에 막대한 전쟁 배상을 할 능력이 있었고, 일본 정부도 배상할 준비가 돼 있었다.

1972년 9월 28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연회에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총리가 건배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는 다케이리 요시카쓰(竹入義勝) 공명당 위원장을 보내 중국 정부의 의중을 타진했다.

1972년 7월 25일 중국 방문한 다케이리 위원장은 마오쩌둥으로부터 놀라운 답변을 들었다. “전쟁 배상을 한푼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작가 진신(金鑫)은 ‘마오쩌둥이 일본의 배상을 거부하는 18가지 뜬금없는 이유에 세계가 떠들썩(毛拒日賠款的18個莫名其妙轟動世界)’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중대한 국사를 왜 마오쩌둥 혼자 독단적으로 처리하는가”라면서 “중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누가 중국인의 이익을 팔아먹는단 말인가? 매국을 통해 당을 키우는 것은 하늘이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일본 전범 우대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붙잡은 일본 전범이 다수인 데다 정권을 수립한 후 소련으로부터 일본 전범들도 넘겨받았다.

2012년 10월 1일 자 양성만보(羊城晩報)에 ‘일본 전범 특별사면’이란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1955년 말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최고검찰원으로부터 수사보고를 받으면서 지시한 내용이다.

“일본 전범에 대해서는 사형도 무기징역도 선고하지 않고, 유기징역도 극소수만 선고하고… 일반 범죄를 저지른 전범은 기소하지 않는다. 이는 중앙의 결정이다.”

1956년 6~7월, 중국공산당 최고법원 특별군사법정은 선양(瀋陽)과 타이위안(太原)에서 각각 중범죄를 저지른 일본 전범 45명을 재판했다. 이들은 징역 11~20년을 선고받았다. 이 중 1명만 옥중에서 병사하고, 나머지 44명은 1964년 3월 이전에 모두 풀려나 귀국했다.

2014년 7월 3일, 중국공산당 중앙기록관은 일본군 제117사단 중장 스즈키 게이쿠(鈴木啟久)의 자필 자백을 공개했다. 그는 “나의 기억만으로도 5470명의 중국인을 살해했고 1만8229가구를 불태웠다. 실제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라고 했다.

당연히 사형선고를 받아야 할 스즈키 게이쿠는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형기를 2년 앞당겨 1963년 6월 석방돼 귀국했다.

1956년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따라 최고검찰원은 죄질이 가볍거나 죄를 뉘우치는 일본 전범 1017명을 기소하지 않고 세 차례에 걸쳐 석방했다.

1964년 3월 6일, 최고법원은 랴오닝성 푸순(撫順)에 수감된 마지막 일본인 포로 사이토 미오(齊藤美夫), 토미나가 준타로(富永順太郎), 조노 히로시(城野宏)를 조기 석방했다. 이로써 중국에 있던 일본인 포로 1109명이 모두 풀려났다.

중국 공산당이 일본 전범에 특혜를 주고 특별사면까지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민당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정권을 수립한 후 본토에 남아있는 국민당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반혁명 진압 운동’을 벌였다. 국민당군 가운데 국공내전 기간에 공산당에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사람, 퇴역해 고향에 돌아간 사람, 상업에 종사하는 고위 장성은 대부분 총살을 당하거나 구금됐다.

피살되거나 수감된 국민당 고위 장성들은 거의 항일전쟁에 참전했고, 그들 중 항일전쟁 명장이자 민족 영웅들도 적지 않았다. 피살된 국민당 고위 장성 242명 중 상장과 신해혁명 원로가 4명, 중장이 78명, 소장이 159명이다.

맺음말

2000년 10월 14일, 일본을 방문한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는 일본 T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공식 문서상으로 중국 인민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고 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 거듭 감사의 뜻을 표했고, 일본에 전쟁 배상금을 한푼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중국에서 엄중한 범죄를 저지른 일본 전범에 특혜를 주고 수천 명을 특별사면했다. 따라서 역대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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