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韓人음악가 정율성②] 중국인으로 마감한 삶…희미한 독립운동 행적

최창근
2021년 11월 9일
업데이트: 2021년 11월 15일

다수 한국인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 정율성. 그는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 땅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후 해방 후 잠시 ‘북한인’이 됐다, ‘중국인’으로서 삶을 마감한 ‘한인(韓人)’ 음악가이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제2국가(國歌)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하여 녜얼(聶耳)·센싱하이(冼星海)와 더불어 중국 현대 음악계 3대 악성(樂聖), 중국 군가의 아버지로도 꼽힌다. 생애 동안 360여 곡을 남긴 그의 노래를 14억 중국인 중 10억 이상이 알고 있다.

정율성의 삶을 두고서는 항일(抗日) 독립운동가라는 평가와 평생을 북한·중국을 위해 헌신한 공산주의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에포크타임스는 5회에 걸쳐 정율성의 행적과 논란을 다룬다.

정율성(鄭律成)은 1914년 전라남도 광주군(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호적상 이름은 정부은(鄭富恩)이었지만 집안에서는 ‘정구모(鄭龜摸)’로 불렸다. 아버지 정해업(鄭海業)은 한학자 출신으로 미국 남장로회가 설립한 미션 스쿨 광주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어머니 최영온(崔英溫)은 개명한 지역 유지의 후예였다. 정율성은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율성의 친·외가는 기독교(개신교)와 인연이 깊었다. 큰 외삼촌 최흥종(崔興琮)은 1921년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大韓耶蘇敎長老會神學校) 졸업 후, 광주 북문 밖 교회(현 광주중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목회자였다. 광주 기독교청년회(YMCA) 3대·5대·8대·10대 회장을 역임했다. 작은 외삼촌 최영욱(崔泳旭)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후 광주 제중원(濟衆院·현 광주기독병원) 원장을 역임한 의사였다. 최영욱의 아내 김필례(金弼禮)는 한국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창립 회원이자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17년 정해업 일가는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으로 터전을 옮겼다. 1922년 정율성은 능주공립보통학교(현 능주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다시 광주로 이주하여 숭일학교(현 숭일중·고등학교 전신)에 전학하여 1928년 졸업했다. 1929년 3월, 전라북도 전주군(현 전주시) 신흥학교(현 신흥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했다. 숭일·신흥학교는 모두 개신교 계열 사립학교이다.

그 무렵 정율성은 조선에 보급된 라디오·축음기를 통하여 서양음악을 접했다. ‘인터내셔널가’ ‘적기가(赤旗歌)’ ‘마르세유의 노래(프랑스 혁명가)’ 등 혁명·사회주의 관련 노래도 즐겨 불렀다.

작곡자 정율성 | 중국 다큐 화면 캡처

기독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 공산주의 세례

1963년 정율성은 ‘베이징만보(北京晩報)’에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어려서 혁명 선배들로부터 ‘인터내셔널가’ ‘마르세유의 노래’ ‘적기가’를 몰래 배웠다. 이런 노래를 부를 때면 내 눈앞에는 수많은 노동 대중들이 대오를 형성하여 진군하는 모습이 나타날 듯하여 나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졌다. 그러면 노래를 부르던 동지들은 나에게 눈짓을 하며 ‘소리를 낮춰’라고 하였다. 그때 나는 어려서 왜 이처럼 좋은 노래를 목청껏 부를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다. 노래는 오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무기이며 혁명의 무기다. 이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시대에 있어 우리의 노래 소리는 더욱 웅장하고 우렁차야 할 것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정율성의 형제자매는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게 됐다. 첫째 형 정효룡(鄭孝龍, 정남근), 둘째 형 정충룡(鄭忠龍, 정인제)은 1919년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도 뒤를 따랐다. 정호룡은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신문사 직공으로 일했다. 정충룡은 중국국민당이 설립한 윈난육군강무당(雲南陸軍講武堂) 수학 후 국민혁명군 제24군 장교로 활동했다. 누나 정봉은(鄭鳳恩)은 의열단 단원이자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박건웅(朴健雄)과 결혼했다. 중국에서 의열단과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정의은은 1932년 김원봉(金元鳳)이 국민정부 지원으로 난징(南京)에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 제2기생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정의은은 다른 지원자들과 더불어 막냇동생 정율성도 중국으로 데려갔다. 정율성은 누나 정봉은과 함께 1933년 5월 8일, 전라남도 목포항을 출발한 기선(汽船) 헤이안마루(平安丸)호를 타고 부산,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정율성은 국민정부 수도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2기 입교생은 의열단 가입이 선제 조건이었다. 7개월 교육 후 1934년 4월 졸업했다. 이후 정율성은 난징 구러우(鼓樓)전화국에 잠입하여 난징-상하이 간 일본인 전화 도청 업무를 수행했다.

난징에서 활동할 때,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 성악가 크리노바(Krennowa)를 만났다. 크리노바는 정율성의 성악 재능을 칭찬했다. 이탈리아에 유학한다면 “동방의 카루소(Enrico Caruso)가 될 것이다”라고도 했다. 약 1년간 크리노바로부터 사사(師事)한 것은 정율성 평생 처음 받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이었다.

이 무렵 ‘부은’이라는 본명 대신 ‘선율(旋律)로서 성공(成功)하겠다’는 뜻을 담아 ‘율성(律成)’으로 개명한다. 일설에는 의열단을 설립한 김원봉이 지어줬다고 전해진다.

세계청소년 축제 참석 당시 정율성(우)과 중국 가수들 | 바이두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 후 의열단 활동… 뚜렷한 독립운동 행적은 없어

1936년 정율성은 중국 좌파 청년 조직 ‘5월 문예사(文藝社)’에 저우취타오(鄒趣濤)의 시에 곡을 붙여 ‘5월의 노래(五月之歌)’를 발표하며 입회했다. 1937년 7·7사변(중일전쟁) 발발 후 김산(본명 장지락)·박건웅·김성숙(金星淑) 등이 조직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입했다. 1937년 10월, 중국 공산당 근거지 산시(陕西)성 옌안(延安)으로 갔다. 옌안행에는 김성숙의 중국인 아내 두쥔후이(杜君慧)가 도움을 줬다.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메고 옌안에 도착한 정율성은 산베이공학(陝北公學·오늘날 중국인민대학, 베이징이공대학, 시베이정법대학, 옌안대학 전신)에 적을 두고 공부했다. 3개월 과정 이수 후 루쉰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에 입교하여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옌안에서 정율성은 한 사람의 조선인 공산주의 혁명가를 만났다. 님 웨일즈(Nym Wales)의 ‘아리랑(The Song of Ariran)’의 주인공 김산, 장지락이었다.

루쉰예술학원 재학 시절, 정율성은 삶의 전환점이 되는 곡을 썼다. 1938년 작곡한 ‘옌안송(延安頌)’이다. 중국 공산당 혁명 근거지 옌안을 찬양하는 노래로 당시 여성 시인으로 명성이 높아가던 모예(莫耶)의 시에 곡을 붙였다.

옌안송
바오타(寶塔)산 봉우리에 노을은 불타고/ 옌허(延河) 강 물결 위로 달빛 흐르네
봄바람은 평탄한 벌판에 불어 가고/ 많은 산들은 견고한 장벽을 이루었네
아! 아! 옌안! 장엄하고 웅위(熊衛)한 고성(古城)/ 여기저기서 항전 노랫소리 울리네
아! 아! 옌안! 뜨거운 피가/ 너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네
천만 청년의 마음 적들에 대한 원한 품었네
산야와 논밭의 길고 긴 행렬에서/ 견고한 전선을 이루었네
보아라 군중들은 이제 머리를 들었노라
무수한 사람과 무수한 마음/ 적들에 대한 분노와 포효 하고 있네
사병들은 총구를 겨누고/ 적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네
아! 아! 옌안! 장엄하고 웅위한 성벽/ 견고한 항일전선 구축하였고
너의 이름을 만고에 남길 것이며/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리

중국인이 기억하는 정율성은 대표적인 공산당 찬양곡인 옌안송의 작곡가다. | 자료사진

훗날 정율성은 ‘옌안송’을 작곡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옌안은 항일과 혁명의 성지였다. 아쉽게도 그런 옌안을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노래가 없었다. 나는 옌안과 옌안 정신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발표 시 곡명은 ‘옌안의 노래(延安之歌)’였으나 훗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옌안 정신을 잘 표현한 곡’이라는 평가를 내리며 ‘옌안송’으로 바꾸었다. 옌안송의 반응은 뜨거웠다. 학생·청년들이 애창하는 곡이 됐다. 곡은 옌안을 넘어 중국 각지 공산당 근거지로 퍼져 나갔다.

1938년 8월 15일, 정율성은 루쉰예술학원을 졸업했다. 중화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華人民抗日軍事政治大學·항일군정대학) 음악지도원으로 배치됐다. 항일군정대학에서 정율성은 합창단을 조직했다. 작곡에도 매진하여 러시아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10월 혁명 행진곡’을 비롯하여 ‘항전 돌격가’ ‘연수이요(延水謠)’ 등을 작곡했다. 1938년 한 해 동안 17곡을 썼다.

항일군정대학 시절, 정율성은 반려(伴侶)를 만났다.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 간부로 일하던 딩쉐쑹(丁雪松·정설송)이다. 1918년 쓰촨(四川)성 충칭바(重慶巴)현(오늘날 충칭직할시) 태생으로 충칭 원더(文德)여중 졸업 후, 충칭 핑민(平民)은행에 근무하다 193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옌안으로 왔다.

이후 1938년 항일군정대학 제3기로 입학하였고, 1939년 중국여자대학(中國女子大學) 개학 후 고급연구반(대학원 해당)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항일군정대학 재학 중 음악 지도원 정율성을 만날 당시를 딩쉐쑹은 ‘중국 첫 여성대사 딩쉐쑹 회고록(中國第一位女大使丁雪松回憶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38년 봄, 어느 날 저녁 나는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 본부의 몇몇 동료들과 함께 옌안 북문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그와 마주쳤다. 그는 몸은 약간 수척하지만 허리가 곧고 얼굴에는 영준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이 드러났다. 그는 누런 군복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그가 조선에서 온 청년 혁명가 정율성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정율성과 딩쉐쑹 | 중국 다큐 화면

딩쉐쑹이 중국여자대학 고급연구반 재학 시절, 정율성은 적극 구애했다. 이를 딩쉐쑹은 “언제부터인가 내 방에 조금씩 이상한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어지럽게 널려 있던 방이 깨끗하게 정리정돈돼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들꽃이 한 다발 놓여 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 보니 뜻밖에도 내 책상 위에 소설책 ‘안나 카레니나’와 ‘동백꽃 처녀(라 트라 비아타)’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 그(정율성)가 쓴 편지가 놓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1941년 12월, 옌안의 토굴에서 두 사람은 신혼집을 차렸다. 1943년 옌안에서 유일한 딸 정샤오티(鄭小提·정소제)가 태어났다.

공산 혁명 근거지 옌안, 공산군 찬양 작품 작곡하여 찬사

1939년 1월,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 신청했다. 훗날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이 되는 무정(武亭·김무정)과 북한 정치보위상 등 요직을 역임하는 항일군정학교 교관 박일우 등이 신원보증을 했다. 신원조회와 심사를 거쳐 4개월 후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에 공식 입당했다.

중국 공산당원이 된 정율성은 또 다른 곡을 작곡한다. ‘팔로군행진곡(八路軍行進曲)’이다. 그 시절 중국 공산군은 ‘홍군(紅軍)’으로 불렸다. 그러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張學良)이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하고 국·공합작을 요구한 시안사변(西安事變) 발발 후,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했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산하 제8로군으로 개편됐다. 이후 중국 공산군을 통칭하게 됐다.

‘팔로군행진곡’은 중국 공산군과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곡이었다. 당시 옌안에 머무르고 있던 궁무(公木)의 노랫말에 정율성이 곡을 붙였다.

팔로군행진곡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태양을 따라서 간다
조국의 대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싣고서
우리들은 백전백승의 역량/ 우리는 공농(工農)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武裝)/ 두려움 없이 절대 굴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투쟁하여
반동패들을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마오쩌둥(毛澤東)의 기치를 높이 휘날린다
들으라 군대의 함성 소리를/ 들으라 혁명의 쟁쟁한 노랫소리를
동지들은 해방 전투를 향해 질서 있게 달려간다
동지들은 조국의 변방을 향해 질서 있게 달려간다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최후의 승리를 향해/ 전국의 해방을 향해

옌안 루쉰예술학원에서 중공군(당시 팔로군)을 지휘하는 정율성 | 자료사진

‘팔로군군가(八路軍軍歌)’ ‘유쾌한 팔로군(快樂的八路軍)’ ‘심야의 보초병송(子夜崗兵頌)’ ‘기병가(騎兵歌)’ ‘포병가(炮兵歌)’ ‘군민일가(軍民一家)’ ‘팔로군과 신사군(八路軍和新四軍)’과 더불어 ‘팔로군대합창(八路軍大合唱)’의 한 곡으로 작곡된 ‘팔로군행진곡’은 정율성의 명성을 높였다.

1939년 11월, 노먼 베순(Henry Norman Bethune)이 사망했다. 캐나다 출신 의사로 스페인 내전 등에 참전했던 사회주의자로서 수술 중 감염으로 인하여 발병한 패혈증이 사인이었다. 훗날 중국 공산당이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 저자 에드거 스노(Edgar Snow)와 더불어 ‘사회주의 중국 건설 4대 인물’로 꼽은 인물이었다. 중국인들에게는 바이추언(白求恩·백구은, ‘흰머리의 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불렸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정율성에게 베순 추모곡 작곡을 명했다. 정율성은 주쯔치(朱子奇)의 노랫말에 곡을 붙였다.

닥터 노먼 베순
진찰기(晉察冀·산시, 차하르, 허베이 일대) 변구의 바람/ 슬픈 소식 실어 오니
옌허의 강물도 슬픔 속에 잠기었네/ 아! 닥터 노먼 베순
당신이 피운 횃불을 이어받아/ 빛나는 모범으로 따라 배우리
파쇼의 멸망을 위해/ 동지들! 힘차게 전선으로 나아가자

1942년 정율성은 무정과 함께 허베이(河北)성과 산시(山西)성 경계에 자리한 타이항(太行)산으로 갔다. 신설 화베이조선혁명군정학교(華北朝鮮革命軍政學校) 교육장(教育長)으로 임명됐다. 교장은 무정이었다. 이후 1943년 중국 공산당 중앙의 명령에 따라 학교는 옌안으로 옮겼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10년간의 중일전쟁이 끝났다. 조선도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12월, 정율성은 아내 딩쉐쑹 딸 정샤오티와 함께 조선으로 갔다. 소련군이 진주한 38도선 이북에는 김일성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조선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정율성은 조선노동당 황해도위원회 선전(宣傳)부장,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 조선인민군협주단장 등으로 활동했다. 조선인민군협주단장으로서 2년여 동안 북한 전역을 돌며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작곡에도 힘을 쏟아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중조우의(中朝友誼)’ ‘동해 어부’ 등을 작곡했다. 그 중 ‘조선인민군행진곡’은 북한 군가로 공식 채택됐다.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인민회의, 인민위원회, 문예학술총동맹 등으로부터 4차례 상장과 상금을 받았다. 1948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모범노동자’로 선정됐다.

훗날 중국 작곡가·음악평론가 탕허(唐河)는 “지구상에서 두 나라 군대를 대표하는 공식 군가를 만들어낸 작곡가는 전세계 음악사를 통틀어도 정율성이 유이무이하다”고 평했다.

(조선)인민군행진곡 | 자료사진

조선인민군행진곡
우리는 강철같은 조선의 인민군/ 정의와 평화 위해 싸우는 전사
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독립 쟁취하리라
인민의 자유 행복 생명을 삼고/ 규률과 훈련으로 다진 몸이니
온 세계 앞서나갈 조선의 인민군/ 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자

딩쉐쑹은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무원 총리이자 외교부장이던 저우언라이에게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요청했다. 자신의 출신 배경, 북한 내에서의 역할 등을 두고 북한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이 주원인이었다. 당시 딩쉐쑹은 관영 신화사(新華社) 평양분사(지국) 사장으로 실질적인 중국 공산당의 주 북한 정보기관 대표 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북조선화교연합총회 비서장도 겸하면서 북한 거주 화교 문제도 책임졌다. 딩쉐쑹은 저우언라이의 양녀라 불릴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

당시를 딩쉐쑹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만약 내가 신화사 평양분사 사장을 계속하고 중국대사관 외교관으로 평양에 계속 남았다면 정율성이 더욱 곤란했을 것으로 본다. 정율성은 북한 주류사회에 융합되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록 내가 조선사람이 될 것을 결심하고 조선 국적을 가지고 노동당원으로서 모든 일을 새로 시작했더라도 그 뒤에 전개된 상황을 볼 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남편과 각자가 갈라서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 부부 사이는 관계가 너무 깊었다.”

정율성의 중국 귀환 배경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옌볜(연변)에서 활동한 조선족 작가 김학철은 1995년 펴낸 ‘최후의 분대장’의 관련 기술은 다음과 같다.

“정율성은 인민군 협주단 단장일 때 잠시 소프라노 한정금(韓貞今)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김학철이 이를 보다 못해 불같은 성격의 딩쉐쑹에게 들키면 어쩌려 하나 주의를 주기도 했다. 정율성은 조선어를 모르니까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학철을 찾아온 딩쉐쑹은 그런 관계를 알았다면 동지로서 만류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라며 따졌다. 그후 딩쉐쑹은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로부터 얼마 후 정율성 부부는 중국으로 소환됐다.”

딩쉐쑹의 요청을 받은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서신을 보내 정율성 부부 귀환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그동안 중국 공산당이 키워준 우리 조선의 간부가 몇인데 두 사람을 중국에 보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인재들이기는 하지만 아낌없이 보내드리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결과적으로 딩쉐쑹의 결정은 정율성의 목숨을 구했다. 1950년대 소련파와 더불어 북한 내 주류파였던 옌안(연안)파는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1940년대 정율성과 함께 타이항산에서 화베이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을 김일성은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숙청했다.

정율성과 아내 딩쉐쑹(丁雪松·정설송), 딸 정샤오티(鄭小提·정소제) | 자료사진

옌안파 숙청 소식을 들은 정율성은 절망했다. ‘중국의 별이 된 조선의 독립군: 정율성’에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율성에게 이념과 사상은 살아가는 힘이었다. 그것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었고 총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했으며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념과 사상, 그리고 그것을 공유해 온 공산당 조직에 대한 그의 순진한 믿음이 배신당한 일은 있었다. 조국 한반도에서 전해진 소식이었다. 1956년 정율성은 자신이 떠나온 북한에서 김일성이 개인 독재체제를 만들기 위해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일우 등 이른바 ‘연안(옌안)파’라 불리던 전우들을 숙청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절망했다. 그는 김일성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사회주의 동지들을 부당하게 박해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평양 시절 김일성은 특별히 정율성과 딩쉐쑹 부부에게 개인적인 선물을 하기도 하고 출장길의 딩쉐쑹을 집으로 불러 묵어 가게 할 만큼 친절하게 대우해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딩쉐쑹을 따라 일찌감치 중국으로 옮겨 오지 않았다면 그 역시 그런 서글픈 운명을 피할 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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