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진단] 우주는 어둠의 숲일까? ‘삼체’에 담긴 위험한 세계관

강우찬
2024년 04월 15일 오후 2:12 업데이트: 2024년 04월 15일 오후 5:29

외계문명 침공 맞서는 지구인 생존기 그린 작품
“곳곳에 음모 넘쳐, 중국식 궁중암투·무협극 구조”
“정글의 법칙 지배하는 우주…中공산당식 세계관”

넷플릭스 오리지널 TV 드라마 ‘삼체’가 한때 세계 시청 순위 1위에 오르며 2주간 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인상적 성적을 거뒀다.

작가 류츠신이 쓴 동명의 중국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문화대혁명(1966~1976) 당시 폭력과 잔혹성을 실감 나게 묘사해 중국 네티즌의 격렬한 비난을 받고 있다.

중국 공산당(중공)의 정치 선전에 장기간 노출된 네티즌은 중공의 역사적 과오를 들춰내는 장면을 중국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을 국가와 혼동하는 것은 오늘날 중공의 여론 공작에 물든 중국인들의 공통된 모습이다.

에포크타임스의 중국 문제 전문가들은 ‘삼체’의 문화대혁명 장면도 눈길을 끌지만 그것보다 더 주목할 점은 드라마에 담긴 철학이라며 넷플릭스 드라마가 나오기 전 중공이 이 소설을 특별히 제지하지 않은 것은 그 철학이 중공의 정치적 입장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문판 편집장 궈쥔은 “‘삼체’는 스토리 구성이 복잡해 보이지만, 이는 특별할 것이 없는 현대 중국 작품들의 기본적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궈쥔은 “이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단체는 모두가 음모를 가지고 있는데, 겉으로 드러난 음모가 있는 가하면 뒤로 감춘 음모, 음모 속의 음모, 상대방의 음모를 역이용하는 음모 같은 것들이다”라며 “이는 최근 중국의 궁중 암투 드라마, 특수효과로 가득 찬 무협 드라마의 기본 얼개”라고 말했다.

이어 “큰 차이점이라면 과학 용어와 개념을 대거 사용하고 배경을 인류사회에서 우주로 옮긴 것”이라며 “걸핏하면 수백 광년이라는 것도 전형적인 중국식 과장”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대규모 사건을 다루면서 줄거리가 복잡하고 등장인물이 대량으로 나오다 보니,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크게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몇몇 주인공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점에서 미국식 히어로물에 가깝지만 주요 캐릭터들마저 개연성이 약하다”고 했다.

궈쥔이 본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가치는 초반 부분의 문화대혁명 묘사다. 그녀는 “이 드라마는 문화대혁명 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드라마적인 과장도 동원하지 않았다”고 높게 평가했다.

삼체의 초반 줄거리는 문화대혁명 당시 천재 물리학자였던 예원제의 젊은 시절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녀의 부모님은 모두 명문 칭화대 교수로 중국 최고의 물리학자였지만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게 끌려가 인민재판대 위에서 맞아 죽는다.

아버지는 “제국주의 미국에 망명해 원자폭탄을 만드는 이론을 제공한 반동의 괴수”인 아인슈타인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살해된다.

이를 본 어머니는 살기 위해 “(그는) 반혁명적인 빅뱅이론을 가르쳤다”며 남편을 비난하지만 한 여성운동가의 질문에 답하던 중 “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언급했다가 남편과 마찬가지로 구타당해 숨진다. 공산당이 신봉하는 ‘무신론’에 도전한 죄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의 문화대혁명 장면 | 제공=넷플릭스

딸인 예원제는 농촌 건설 인력으로 투입되고 그곳에서도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으며 세상에 대한 실망감이 극에 달한다. 다만 천문학자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아 외계인과 접촉하는 국가 과학 프로젝트로 발탁돼 한숨 돌릴 시간을 얻는다.

이때 해당 프로젝트에서 우연히 접한 외계인의 ‘경고’ 신호를 해독하지만, 이미 인간사회에 철저하게 실망한 그녀는 외계인의 침공으로 인류가 멸망당하도록 지구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를 발신하며 인류 배반자의 길에 들어선다.

예원제의 신호를 받은 ‘삼체’ 행성의 외계인들은 대규모 침공 선단을 출발시키며 지구 침공을 시작한다. 그러나 광속에 못 미치는 속도로 인해 지구 도착까지 400년이 걸리는데, 드라마 ‘삼체’는 이 기간 외계인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지구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드라마와 소설의 이름인 ‘삼체’는 이 외계 문명의 이름이다. 3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행성에 자리 잡은 이 문명은 수시로 멸망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삼체 외계인들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장소를 갈망하며 지구를 자신들의 새 보금자리로 삼으려 한다.

소설·드라마 관통하는 핵심 철학 ‘어둠의 숲’

삼체는 소설 3부작 중 2부 ‘어둠의 숲'(한글판 제목은 ‘암흑의 숲’)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철학이다.

‘어둠의 숲’ 가설은 우주를 일종의 어두운 숲, 즉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모두가 생존 경쟁을 벌이는 곳이라고 가정한다. 더 강한 자가 다른 존재들을 파괴하고,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서로 죽이는 싸움이 벌어지는 삭막한 곳이다.

역사학자 리위안화는 ‘어둠의 숲 가설은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글의 법칙이다. 우주는 어두운 숲과 같고, 각 문명은 총을 든 사냥꾼이며, 어두운 숲에서 몰래 숨어 다른 사냥꾼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리위안화는 “어둠의 숲 가설에서 다른 사냥꾼에게 발견되거나 그를 발견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에게 총을 쏘는 것”이라며 “자기네 종족을 제외하면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세계관”이라고 설명했다.

소설 ‘삼체’는 중국 SF잡지에 2007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해 단행본 출간 후 300만 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리위안화에 따르면, 중국의 샤오펀훙(중공의 정치선전에 세뇌된 과격 집단)이나 늑대전사 외교관들은 삼체의 세계관을 확장해 자신들의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중국 소셜미디어에 유행했던 ‘진실은 둥펑 미사일 사거리에 있다’, ‘상대방을 꺾을 힘이 있는 한 옳은 것은 당신’ 같은 표현들이다.

그는 “이런 주장은 투쟁이나 대결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저자 류츠신도 그런 점을 염려했으나 결국 그가 소설에서 내린 결론은 도덕이나 윤리를 따르는 것은 과학에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리위안화는 “소설 ‘삼체’에서 류츠신은 ‘생존은 문명의 첫 번째 필요조건’이라며 ‘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하지만 물질의 총량은 불변한다’고 말한다”며 “우주를 일종의 제로섬 게임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의 한 장면 | 제공=넷플릭스

궈쥔은 삼체가 문화대혁명의 피해자를 주요 인물로 내세웠지만, 작품 속 세계관 자체가 이미 문화대혁명으로 모든 기존 질서가 전복된 후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세계관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예원제의 부모는 드라마 초반 장면에서 ‘과학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 말에 격분한 홍위병은 그들을 때려 죽였는데 이 장면은 중공 집권 후 중국인들의 신앙심이 말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궈쥔은 “어떤 각도에서 ‘삼체’는 이 우주에 신 혹은 높은 도덕성을 갖춘 초월적 존재가 없을 때 인류든 외계문명이든 모두 따뜻한 세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적 심리가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에포크타임스 중문판 주필 스산은 “기본적으로 ‘삼체’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다윈주의 소설”이라고 규정했다.

스산은 “다윈주의는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무자비한 생존 경쟁을 합리화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며 “우리의 생존을 위해 누군가 멸망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르면, 인류 문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이런 논리를 부인해왔다.

스산은 “중국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지극히 선한 경지에 다다라 움직이지 않음)이라며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서구에서도 합리적인 사회는 신을 믿는 사회이며 신을 믿지 않는 사회는 비합리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삼체’ 속 외계문명은 과학에 기초한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매우 이기적이고 잔혹한 문명이다. 삼체는 신이 없다고 했을 때 우주의 비참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