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다큐 ‘건국전쟁’…“우리가 70년 동안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

김덕영 영화감독

이윤정
2024년 01월 23일 오후 4:58 업데이트: 2024년 02월 13일 오전 10:50

“건국 세대에 죄송함 담았다”
역사적 장면 담은 기록 영상 최초 공개

‘이승만 죽이기’, 그 출발은 북한과 주사파

“사실 제가 이승만에 대해서 안 좋게 보고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까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여러 일을 하시고, 여기 있는 분들이 일상을 사는 것도 다 이승만이란 대통령이 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돼서 기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승만이란 대통령이 주신 저의 일상생활을 가치 있게 보내겠습니다.” 한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어느 중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한 말이다.

30년간 교단에 섰던 전직 여교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역사를 이렇게 외면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지도자 이승만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데 대해 너무나 반성하고 후회하면서 이 영화를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아이들’을 연출한 김덕영 감독이 4년 만에 내놓은 ‘건국전쟁(The Birth of Korea)’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오는 2월 1일 전국 동시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김 감독의 전작 ‘김일성의 아이들’은 6‧25전쟁 이후 북한 고아들의 동유럽 이주 역사를 그린 영화다. 1950년대 북한 김일성 주석이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됐던 전쟁고아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담았다. 김 감독이 장장 16년에 걸친 추적 끝에 완성한 이 영화는 6·25 전쟁 70주년을 맞은 2020년 국내에서 개봉된 후 전 세계 17개국 주요 영화제에 출품했다. 미국 ‘뉴욕국제영화제’와 프랑스 ‘니스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했고, 이탈리아 ‘로마국제무비어워드’ 최우수 다큐멘터리 작품상, 동유럽국제영화제 은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영구보존 작품에 선정돼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1월 22일 대구 시사회 장면 | 김덕영 감독 제공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 중인 건국전쟁 영화 시사회는 부산, 제주, 대구를 거쳐 대전, 춘천, 광주로 이어질 예정이다. 지난 21일 김 감독과 전화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건국전쟁’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김일성의 아이들을 제작했던 16년 동안 자연스럽게 북한을 연구하게 됐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시스템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셈입니다.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건국전쟁’은 ‘김일성의 아이들’에 담긴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었다. 북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이승만’에게로 옮아갔다.

“1995년 북한을 방문했던 한 목사가 평양 거리 한복판에 ‘이승만 괴뢰 도당을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저도 386 세대라 이승만에 대해서 안 좋은 생각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이승만 정권을 어떡해서든지 역사에서 지우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있었다는 것을 김일성의 아이들을 마무리하면서 발견한 거예요. 왜 그들이 그렇게까지 이승만을 타도하려 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김 감독은 이승만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니 ‘이승만’에 따라붙는 관련 수식어가 10개도 넘었다고 했다. 그는 “’독재자’, ‘미국의 앞잡이’, ‘친일파’, 한국전쟁 때 한강 다리를 부수고 먼저 도망쳤다는 의미로 ‘런승만’, ‘양민 학살의 주범’, ‘하와이 망명설’, ‘막대한 비자금 조성설’ 등 대부분 부정적 묘사였다”며 “심지어 ‘플레이보이’, ‘살인자’라는 단어까지 등장한 다큐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권이 종식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이승만에 대해서 왜 그렇게 왜곡되고 무자비한 언어폭력을 가했을까?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과연 그게 사실이었을까? 영화 ‘건국전쟁’을 시작했던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건국 전쟁’의 함의는 무엇인가요?

“그런 관점으로 한국 현대사를 되돌아보니 한국은 1948년에 건국됐지만 공산주의 세력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특히 북한과 더불어 남한 사회에서 북한을 추종하는 주사파 세력들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이중, 삼중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싸움은 1940년대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요. 이는 우리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김 감독이 여러 번 수정 끝에 낙점한 제목 ‘건국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의 활동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 제목인 ‘더 버스 오브 코리아(The Birth of Korea)’에서 코리아는 남과 북을 모두 표현한 단어라고 그는 설명했다.

“문화와 전통을 공유하는 같은 민족이 어떻게 70년 만에 체제,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나라가 됐는지, 이런 것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국민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자는 취지로 제목을 건국전쟁으로 짓게 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영웅의 거리에서 카퍼레이드하는 영상이 최초 공개됐는데요. 이 기록 필름의 발굴 과정이 궁금합니다.

“이 장면은 사진만 봐도 엄청난 사건이었구나 싶었죠. 당시 미국에서 나온 자료만 보더라도 대략 100만 명 정도가 브로드웨이를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사진만 있을 뿐 이승만을 연구하는 전문가 중에도 기록 필름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십 대의 카메라가 돌아간 걸 알 수 있거든요. 현장에서 기록 필름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거기서부터 추적하기 시작한 거죠.”

김덕영 감독은 이승만 대통령의 1954년 방미 기록 사진에서 출발해 미국 교민들의 도움을 받아 기록 영상을 발굴했다. | 김덕영 감독 제공

영화에선 1954년 8월 2일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중이던 이 대통령이 뉴욕 맨해튼 ‘영웅의 거리’에서 자동차 행진을 하는 장면을 담은 45초 분량의 영상이 최초로 공개됐다. 원본이 미국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생각에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김 감독은 6개월의 추적 끝에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해당 영상 자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 교민의 헌신과 도움으로 녹슨 필름 한 통을 찾아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김 감독은 전했다. 역사적 장면은 그렇게 70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공개되는 영상이라 파급 효과도 클 것 같습니다.

“거리 이름이 ‘캐년 오브 히어로즈(Canyon of Heroes)’예요. 빌딩 숲을 미국인들이 재미있게 부른 건데 아이젠하워, 맥아더 같은 전쟁 영웅들을 비롯해 유명한 사람들이 그 거리에서 행진을 많이 했어요. 제가 취재한 바로는 그곳에서 외국 원수가 카퍼레이드를 한 건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입니다.”

“내레이션이 필요 없는 장면입니다. 보이는 그대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 가서 환대받는 모습이고, 좀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아이돌급 스타가 미국인에게 환영받는 느낌이죠. 우리나라가 문화 강국으로서 K-팝 가수, 드라마, 영화 할 것 없이 전 세계적으로 위력을 떨치고 있지만, 이미 1950년대에 그런 인물을 배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4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카 퍼레이드하는 모습 | 김덕영 감독 제공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4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환영 인파 속에 자동차 행진을 하는 모습 | 김덕영 감독 제공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오랜 세월 동안 좌파들의 선동에 의해 부당한 평가를 받아 왔다고 보는 이유는요.

“84학번으로 전형적인 586세대인 저 역시 대학 시절 이승만은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니,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한국사의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게 됐죠.”

김 감독은 이승만 이름이 들어간 책은 거의 다 읽었다고 했다. 객관적 사실관계와 자료 수집을 위해 기록 필름 외에도 수사기록물, 국회 속기록 등 문서와 기록된 자료들을 샅샅이 뒤졌고, 20여 명의 국내외 각계 인사들의 증언을 들었다. 3년 여에 걸쳐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여러 나라들을 돌며 이승만 행적 찾기에 주력했다.

“그 결과 소위 ‘이승만 죽이기’, ‘이승만 지우기’라 불린 이 공작의 출발이 북한에 있었고, 그를 추종하는 친북 주사파 세력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이 한반도에서 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 정치 집단이라는 근거 없는 망상과 거짓 이데올로기를 퍼뜨렸고, 1980년대 소위 ‘386 운동권’ 세력들이 그에 동조했던 것이죠. 이승만의 역사를 지워야만 자신들의 정치 이념을 대중들에게 쉽게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감독은 “거짓말도 계속하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있다”며 “그것이 바로 ‘이승만 죽이기’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된 이유였다”고 했다. “영화 ‘건국전쟁’의 제작 과정은 그런 근거 없는 거짓말과의 싸움이었습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서울의 봄> <길 위에 김대중>과 <건국전쟁>을 좌우 진영 간 맞대응 영화로 보는 평가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솔직히 제가 의도한 바이기도 합니다. 이 두 영화가 나올 것을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기왕에 상황이 그렇게 됐으니까 건강한 대한민국의 가치가 무엇인지 한번 대결해 보자는 취지로요. 원래 3월 1일 개봉하려고 했어요. 광고를 해야 하는데 후원금이 모이지 않아서 3월 정도까지 가야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후원금이 모이겠다 싶었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2월 1일로 앞당긴 이유이기도 합니다.”

“김대중을 폄하하거나 서울의 봄을 깎아내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우리 한번 건강하게 대결 한번 해보자 했던 거죠.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관점은 무엇인지, 역사 인식의 기본 축은 무엇이 돼야 하는지 하는 것들을 한번 얘기해 보자는 겁니다. 그래야만 이승만의 공(功)도 선명하게 보이거든요.”

-이승만의 과(過)를 부각하는 역사해석이 주류라는 관점에서 공(功)을 부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승만이 4·19로 결국 7일 만에 하야했습니다. 정권을 7일 만에 내려놓는 독재자가 어딨어요. 세상에 그런 독재자는 없습니다.”

영화에서 마이클 브린(Michael Breen) 전 주한외신기자클럽 회장은 “한반도의 분단은 역설적으로 대한민국이 오늘날처럼 발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며 “만약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미얀마 같은 나라, 혹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 세계 경제학자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토대로 ‘이승만의 토지개혁’에 주목한다. 지주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이뤄낸 1949년 토지개혁은 오늘날 대기업 성장의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에는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1949년 이승만의 토지개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대한민국은 거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귀퉁이에 있는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도 국가가 이토록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문화 강국이 되고, 국민 개개인이 번영과 행복을 누리고 사는 건 이승만 덕분입니다. 정치 시스템이 인간의 삶을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구나 싶었죠. 누군가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바탕 위에서 번영을 이루는 거니까요. 1948년도에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건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남녀평등 사상이 기반이 된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서구 여성들도 투표권을 획득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 긴 시간을 투쟁하는 지난한 과정을 겪었어요. 선진국 스위스도 1972년에서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줬고요. 하지만 한반도에서 여성의 투표권은 마치 선물처럼 부여된 거죠.”

지난 70년 동안 평화를 지탱해 온 ‘한미상호방위조약’도 이승만의 주요 업적으로 꼽혔다. 영화 속에서 데이비드 P. 필즈(David P. Fields) 위스콘신대학교 동아시아센터 부소장은 “이승만은 미국과 대한민국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며 “아무도 그 당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오직 이승만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영화 마지막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에필로그가 자막으로 흐른다.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가난한 정권이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정권이 교육 부문에 전체 예산의 20%를 투자할 만큼 교육 사업에 역점을 뒀고 그 덕분에 80~90%였던 문맹률이 20%로 떨어지고 대한민국 교육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와 관련해 김 감독은 “1961년 장면 정권이 미국 유엔 총회에 가서 발표한 내용으로, 1963년에 출간된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에서 힌트를 얻어 정리한 것”이라며 “4·19로 이승만을 몰아낸 정권이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의 공을 인정하는 발언”이라고 풀이했다.

하와이에서 ‘건국전쟁’ 제작 중인 김덕영 감독 | 김덕영 감독 제공

-취재 과정에서 어떤 게 가장 힘들었나요?

“제작비 마련이 특히 힘들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이야 늘 있는 거고 스토리텔링이 어려웠어요. 보통 정치적 인물이나 위인을 이야기할 때 연대기 순으로 전개하면 쉽고 편하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합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다시 현재로 시간을 넘나드는 건 다큐 영역에선 생소한 기법이기도 합니다. 대중에게 감동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감성의 선들을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을 시도해 본 건데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영화 제작을 통해 얻은 수확이 있다면요.

“건국 세대들이 ‘음수사원(飮水思源·물을 마시려는 사람은 그 물이 흘러온 근원을 잊지 말아야 한다)’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강물도 근원이 있듯이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그 근원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이 ‘이 영화의 등장은 이승만 사후 최대의 사건’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만큼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 국민들이 우리나라 건국에 대해, 건국 지도자와 건국 1세대들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할 게 있으면 반성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누군가 제게 이 영화가 정치 영화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것은 거창한 정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70년 동안 모르고 있었던 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이승만 대통령의 어두운 면, 잘못된 면만 부각하고, 부정적 이미지로 덧칠하지 않았나”라며 “한평생 대한민국만을 생각했던 ‘이승만’이란 한 노인을 거짓 이데올로기로 죽이는 일은 멈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대학에서 배운 이승만은 부정과 모순의 종합선물 세트 같았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공부를 시작한 뒤 그걸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살아왔던 삶이 부끄러웠습니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건국 세대에 대한 죄송함을 영화에 담았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한다면 저는 이승만으로부터 배울 것들이 대단히 많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