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빛과 세상을 담다…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스티븐 올스(Stephen Oles)
2024년 02월 14일 오후 8:52 업데이트: 2024년 02월 14일 오후 8:52

오스트리아 제국(현 체코) 보헤미아 태생의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후기 낭만주의 사조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다. 그는 생전엔 전설적인 오페라 지휘자로 이름을 알렸고, 사후엔 혁신적인 교향곡 작곡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교향곡의 역사

교향곡(交響曲·symphony)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악곡 형식으로, 일반적으로 4개의 대조되는 악장으로 구성된다.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18세기 후반에 교향곡을 정립했다. 그들은 각각 106곡, 41곡을 남기며 교향곡 형식을 완성했다. 이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그들에게 작곡 기법을 사사하며 그 명맥을 이었고, 기존 틀을 깨는 시도로 교향곡의 범위를 확장했다. 베토벤은 교향곡에 쓰이지 않았던 악기인 피콜로, 트롬본 등을 도입해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또한 한 시간가량의 방대한 분량과 합창단의 도입, 새롭고 독특한 화음 사용으로 당시 청중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베토벤 이후 요하네스 브람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등이 교향곡을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이어 구스타프 말러가 음악계에 등장했을 때는 이미 교향곡이 많이 소비돼 새로운 시도 없이는 대중의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아테제 호수에 위치한 구스타프 말러의 작곡 오두막 | Thomas Ledl / CC BY-SA 3.0 AT

당시 지휘자로서 최고의 명성과 인기를 구가했던 말러는 바쁜 일정 속 짧은 여름휴가를 교향곡 작곡에 몰두할 만큼 교향곡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1893년부터는 오스트리아의 시골에서 교향곡을 쓰기 시작했다. 자연의 풍광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에 몰두했고, 나머지 기간에는 오스트리아 빈 궁정 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을 역임하며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활동했다.

교향곡의 부흥을 도모하다

19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말러는 ‘광대함’과 ‘강렬함’이라는 두 가지 음악적 요소를 도입해 교향곡의 부흥을 도모했다.

구스타프 말러의 내각 사진, 1893년. 레온하르트 벌린-비버 | 공개 도메인

말러가 교향곡을 쓰기 이전의 연주단(관현악단) 규모는 크지 않았다. 모차르트 때는 50명이었고, 바그너 때 늘어나 90~120명 정도였다. 이후 말러는 8번 교향곡 초연에 170명의 관현악단과 독창자, 세 팀의 대규모 합창단 등 총 1030명의 연주자를 무대에 올렸다. 이에 따라 말러의 교향곡은 ‘천 명의 교향곡’이라 불리며 획기적인 형태로 광대함을 형성했다.

말러는 만돌린, 실로폰, 카우벨, 나무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 등 특이한 악기를 교향곡에 도입했다. 그는 오케스트라에서 각 악기와 연주자들이 내는 소리를 훌륭하게 살렸다. 연주자를 무대 밖에 배치해 먼 곳에서 음악이 들리는 상황을 구성하는 등 특수 효과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의 획기적인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이전 교향곡은 대부분 20분에서 40분가량 연주됐으나, 그는 60~90분이 넘는 교향곡을 만들었다. 그의 교향곡 제3번은 100분이 넘는 길이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돼 있다. 그는 긴 곡 속에 감정의 변화까지 극적으로 묘사했다. 마치 심장을 소매에 달아놓고 격동을 체감하듯 환희에 찬 기쁨부터 깊은 절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했다. 증폭되는 감정 속 모든 음영을 조명해 음악으로 구현했다.

1916년 레오폴드 스토콥스키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의 ‘말러 교향곡 8번’ 미국 초연 | 공개 도메인

이러한 강렬함 때문에 당시 일부 사람들은 그의 교향곡을 싫어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말러의 교향곡 속 감정표현은 너무 길며 시끄럽고 분노와 변화가 가득한 음악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을 포용하다

말러의 개인사에는 비극이 많았다. 그는 13명의 형제자매를 뒀으나 8명이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그의 아내 알마 말러는 외도로 그의 마음을 찢어놓았고, 딸 마리아는 성홍열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 비극을 음악 속에 투영하지 않았다. 관객들을 어둠과 비극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말러는 삶의 혼돈과 비참함 속에서 희망과 의미, 구원을 찾아 밝은 길로 청자를 인도한다. 개인사의 고난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말러는 10개의 교향곡 중 한 곡만 비극적 결말로 끝냈고, 그 외의 곡들은 고무적인 장조로 마무리했다.

알마 말러와 딸 마리아(왼쪽), 안나(오른쪽)의 사진(1905년경) | 공개 도메인

1907년 말러는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와 만나 교향곡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시벨리우스는 좋은 교향곡은 형식의 엄격함을 따르고 심오한 논리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말러는 “교향곡은 세상과 같아야 한다.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며 교향곡에 대한 열정을 내비쳤다.

2000년대 영국의 작가 조나단 카는 말러의 일대기에서 “그는 작곡을 어린 시절 블록 놀이와 비슷하다고 말했다”고 기술했다. 이처럼 말러에게 교향곡을 쓰는 것은 여러 요소를 모아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만드는 즐거운 행위였다.

말러는 체코 모라비아 지역의 이글라우(이흘라바) 마을에서 자랐다. 선술집을 운영했던 아버지 덕에 그는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렌틀러(왈츠의 원형인 느린 템포의 춤) 음악과 체코 민요를 늘 들었고 4세 때부터 아코디언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지역엔 항상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주 들려오는 행진곡과 트럼펫, 팡파르 소리 역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쳐 그의 교향곡에는 이런 소리가 포함되기도 했다. 특히 말러 교향곡 3번에는 19세기 미국 해병 군악대장을 지낸 ‘행진곡의 왕’ 존 필립 수자(1854~1932)의 곡으로 추정되는 구절이 들어 있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등 많은 거장의 음악적 영향과 유년기 환경의 작용으로 말러의 교향곡에는 서양 음악의 전체 역사가 거대한 강물처럼 흐른다.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의 청동 흉상(1909년), 오귀스트 로댕. 워싱턴 국립 미술관 | 공개 도메인

말러의 교향곡 대부분은 처음엔 호평받지 못했다. 당시 한 비평가는 “대중은 언제나 그가 연단에 서는 것을 환영한다. 단, 그 자신이 쓴 곡을 지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대중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말러는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1911년 말러가 사망했을 때 한 비평가는 “그의 음악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지 알 수 없다”고 선언했고, 그 후 반세기 동안 그의 음악은 빛을 보지 못했다. 학계와 비평가들은 그의 교향곡을 고리타분하고 과장된 것으로 평가했다.

말러의 부흥은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에게서 촉발됐다. 번스타인은 1960년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고, 이에 따라 말러의 매혹적인 음악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게 됐다.

말러의 음악이 20세기에 이르러 부활한 것처럼, 그의 교향곡 2번 ‘부활’에는 그가 교향곡에 표현하고자 했던 모든 것이 펼쳐진다. 이 곡은 어둡고 불안한 장례 행진곡으로 시작해 영생을 축하하는 즐거운 축제로 바뀐다. 피날레에서는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합창단의 조화로운 목소리는 다시 일어나라는 가사로 청중의 마음을 고양한다.

2010년, 영국의 언론 가디언은 “한 세대 전만 해도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만이 번갈아 연주됐다. 하지만 이제 오케스트라가 가장 연주하고 싶어 하고, 지휘자가 가장 지휘하고 싶어 하고, 청중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곡은 말러의 곡이다”라고 단언했다.

나의 시대가 올 것이라 예언했던 그의 말은 오늘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됐다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은 여전히 살아 있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리며 큰 영감을 주고 있다.

스티븐 올스는 교사, 배우, 가수 및 극작가로 일했다. 그의 연극은 런던, 시애틀, 로스엔젤레스 등에서 공연됐다. 현재 그는 시애틀에 거주하며 소설을 집필 중이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