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 “다국적 기업, 리스크 낮추려 중국 탈출”

한동훈
2023년 11월 14일 오후 1:03 업데이트: 2023년 11월 14일 오후 5:54

기업 42%, 가치 공유하는 국가로 생산거점 이전 고려
‘공급망 위협하는 국가’ 묻는 항목엔 65%가 ‘중국’ 지목

다국적 기업들이 ‘차이나 리스크’를 최소화하려 한다는 유럽중앙은행(ECB) 보고서가 나왔다. 생산 거점 이전을 고려하면서 ‘가치관의 공유’를 중요 기준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은 최근 초대형 다국적 기업 65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42%가 생산 거점을 ‘프랜드 쇼어(friend-shore·우호국)’이나 더 환영받는 국가로 이전하려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6일(현지시간) 밝혔다(보고서 링크).

조사에 따르면, 다국적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공급망을 위협할 수 있는 국가를 묻는 질문에 약 65%의 압도적 비율로 중국을 꼽았다.

절반 이상의 기업이 특정 국가 또는 소수의 국가로부터 중요한 자재를 조달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기업이 이러한 공급이 현재 더 높은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또한 기업 49%가 생산 거점 선택 기준으로 ‘니어 쇼어(near-shore·가까운 국가)’를 선택한다고 답했으나, 11%는 지난 5년간 ‘프랜드 쇼어링(friend-shoring)’를 추진해 왔다고 밝혔다.

니어 쇼어링, 프랜드 쇼어링은 기업의 공급망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지금까지 기업들은 ‘원가 절감’을 위해 제조원가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곳을 생산거점으로 선정하는 니어 쇼어링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 공급망에 있어 경제적 요인보다 정치적, 외교적, 지정학적 요인이 중요해지면서 생산 기지 선택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공급망의 안정성을 위해 신뢰할 수 있는 국가,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국가를 우선 고려하는 프랜드 쇼어링의 개념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조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제관계 변화 등으로 공급망이 혼란에 빠진 이후 실제로 기업들이 생산 거점을 이전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시됐다.

유럽중앙은행은 생산 거점이 이전 중이거나 계획 중에 있는지 증거를 찾기 위해,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이탈리아 중앙은행, 독일연방은행 등과 함께 글로벌 기업들의 공급망 리크스 대응을 조사했다.

그 결과, 중국 경제의 불안정성과 공산당 정권의 규제 압력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외국계 기업들에 점점 더 큰 우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 사실로 확인됐다.

유럽중앙은행은 “대부분의 기업이 중국을 자재의 핵심 공급처, 혹은 주요 공급처의 하나로 여기고 있으며, 동시에 거의 모든 기업이 중국을 고위험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12월 중국 공산당이 ‘제로 코로나’ 정책을 종료했을 때, 많은 경제 관측통은 2023년 중국 경제가 강력한 반등세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곳곳에서 위기가 불거지고 있다. 기록적인 청년실업률, 끊임없는 부동산 위기, 경제 침체에 따른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중국 주식 시장의 매도세가 이어졌다.

노동절 연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기념 연휴에도 소비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관영 언론은 ‘소비 회복’을 앞다퉈 보도했고 해외의 일부 언론들도 이에 호응해 ‘중국 경제의 회복’을 선전했으나, 현실은 달랐다.

중국인들은 앞날을 비관적으로 전망하며 소비와 대출을 줄이고 있다. 중국의 최대 온라인 쇼핑 대목인 11월 11일 ‘광군제’는 역대 가장 조용했다는 평가 속에 지나갔다.

그사이 중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주변국으로의 아웃소싱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중국 국가외환관리국이 밝힌 올해 3분기(7~9월) 중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마이너스 118억 달러(약 15조 6066억 원)를 기록했다. 집계를 시작한 1998년 이후 25년 만에 첫 순유출이다.

이는 지난해 FDI가 전년 대비 43% 감소한 1900억 달러(약 251조 2940억 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나온 수치다. ‘세계의 공장’이었던 중국이 저물어 가고 있음이 수치로 입증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싱크탱크인 민주방어재단(FDD)은 8일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지난 7월부터 시행된 반간첩법 등 모호하고 불투명한 규제들이 다국적 기업의 중국 내 경영환경을 크게 악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국적 기업들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리며 베트남, 인도, 태국 등에 새로운 생산 거점을 속속 설립하고 있다. 중국 기업마저 탈중국 행렬에 동참했다. 중국 1위 디스플레이 생산업체 BOE는 베트남에 공장을 세웠고, 중국 최대 텀블러 제조사인 하얼스도 최근 태국에 새 거점을 마련했다.

유럽중앙은행 조사에 따르면, 65개 글로벌 기업 중 거의 절반이 경영의 우선순위를 비용절감이나 효율성 향상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공급망 유연성 문제를 의사 결정에 반영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유럽중앙은행은 기업들이 향후 5년 동안 공급망을 더 가까운 곳으로 옮기거나, 다양화하거나, 우호적인 국가에 배치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또한 유럽(EU) 내부에서 조달하는 비중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근거리화, 다양화 또는 프랜드 쇼어링의 증가는 EU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공급업체를 더 많이 이용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중 미국상공회의소는 2023년 비즈니스 환경 보고서에서 회원사의 24%가 중국에서 생산능력 이전을 고려 중이거나 이미 시작했으며, 이는 전년 대비 10% 증가한 수치라고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