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문한답] 성공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은 왜 실패했나?

에포크미디어코리아&한반도선진화재단 프리미엄 리포트
최창근
2022년 10월 12일 오후 1:21 업데이트: 2022년 10월 12일 오후 1:21

성공한 대한민국에서 역대 대통령은 왜 실패했나요? 대안은 무엇인가요?

답변_이홍규 한국과학기술원(KAIST) 명예교수, 전 대통령 정책비서관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후 미국 오리건주립대에서 MBA를, 한국외국어대에서 경영학 박사를 취득했다. 제18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 근무하며 주요 보직을 거쳤고 주프랑스대사관 상무관을 역임했다. 대통령 정책비서관으로 근무했으며 1999년 통상산업부 관리관(1급)으로 명예 퇴직했다.  이후 ㈜메디슨 부사장을 거쳐 2001년부터 한국과학기술원 기술경영학부 교수로서 강의했다.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는 국가 중대사입니다. 대통령의 실패는 곧 국가의 실패이고 나아가 국민의 실패라 하겠습니다.

돌이켜본 지난 70년 대한민국 역사는 ‘대통령 잔혹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성공을 향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공보다 ‘실패의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윤보선·최규하 전 대통령을 제외한 9명의 대통령 중 망명, 암살, 자살, 구속 등의 불행의 길을 가지 않은 대통령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2명뿐입니다. 이들 대통령도 자식들이 감옥에 가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왜?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은 이러한 불행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과연 새로운 대통령은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드리워진 위험 요소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는 대통령이 처한 정치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 자신의 국정 운영 능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환경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인물’이고 그 성공과 실패는 정치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실패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 환경이 성공에 녹록지 않은 환경이란 의미입니다.

취약한 정치 시스템

선거 캠프와 정부에 의존하는 정당 문제
한국 정당은 미국식 ‘선거 정당’과 유럽식 ‘정책 정당’ 성격이 혼합된 성격을 가집니다. 그러나 한국 정당은 아직 그 어느 역량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집권 여당이라 할지라도 선거에 있어서는 별도의 선거캠프에 그 역할을 내주고 정책 분야에서는 행정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시대가 남긴 이른바 ‘가신(家臣)정치’의 유산은 이후, 친노(친 노무현), 친이(친 이명박), 친박(친 박근혜), 친문(친 문재인) 등 대통령 ‘친위그룹’들에 의해 정당이 장악되는 행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 정당들은 ‘공당(公黨)’이 아닌 ‘사당(私黨)’으로서의 성격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당 시스템이 취약하기 때문에 선거철만 되면 대선 후보는 별도의 선거캠프를 차릴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그러나 이런 캠프 선거는 선거 후 캠프 참여 인사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부담을 주고 국정 운영 난맥상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제왕적 대통령제 문화
민주주의의 양대 기둥은 ‘법치(法治)’ 존중과 ‘언론(言論)’ 자유입니다.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가 위협을 받아도 민주주의는 무너지기 쉽습니다. 달리 말하여 이 두 가지 요소가 살아 있어야 ‘살아 있는 권력’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대통령들은 이러한 ‘권력 제약’을 가능한 피하고 싶어 한다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 입니다. 특히 대통령 권력이 강력하여 ‘제왕적 대통령’으로 표현되어 온 한국 정치문화에서 대통령이 가진 권력에 대한 통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전문 행정관료의 독립성은 보장되기 어렵습니다. 언론은 재정 지원, 인사, 심의 등으로 인하여 정부의 직·간접적인 영향 아래 놓이기 쉽습니다. 또한 공직 진출이나 정부의 재정 지원을 기대하는 시민단체 대표들은 권력을 비판하기보다는 침묵하고 타협하기 일쑤였습니다. 더하여 여대야소 정국에서 여당이 국회까지 지배하게 되면 대통령의 권력은 무소불위(無所不爲)로 행사되기 쉽습니다.

권력에 대한 제어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권력은 언제나 오·남용되기 쉬운 속성을 지녔습니다.

‘대통령의 권력이 커질수록 대통령으로서 성공이 그만큼 어려워 진다.’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 오늘날 한국 정치는 놓여있습니다.

포퓰리즘과 책임 부재
오늘날 전 세계 정치는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대중이 포퓰리즘의 유혹에 취약한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정치인들은 선심성 공약·정책으로 대중의 표를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심성 공약에는 비용이 발생하고 그 비용은 누군가는 부담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해 포퓰리즘은 ‘미래 세대가 가질 몫의 수탈’을 의미합니다.

한국 정치도 오늘날 포퓰리즘에 물들고 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 정치 풍토에서는 선심성 정책이 문제를 초래해도 그 책임을 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면죄부’를 받고 있지만 국민은 그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포퓰리즘이 수반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결국 국민입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급증한 부채 경제 속에서도 앞서 정해 놓은 국가채무비율 기준조차 낮추려 했던 것은 미래 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집단사고와 진영 논리의 정치 심성

디지털 환경과 집단사고의 확산
민주주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요구합니다. 집단지성은 다양하고 독립적인 의견들을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수용하는 가운데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정치는 집단지성이 아닌 ‘집단사고(group think)’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집단사고는 획일적·폐쇄적·배타적 생각입니다. 그중 지역 편애의 집단사고는 지난 50년간 한국 정치를 결정해온 주요 변수였습니다.

오늘날은 지역과 더불어 좌·우의 ‘이념적 집단사고’가 한국 정치의 주요 변수로 등장하였습니다. 이런 ‘끼리끼리’식 집단사고를 한층 강화하는 것은 디지털 환경입니다. 인지심리학자들은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집단사고를 강화한다고 지적합니다.

디지털 시대는 객관보다 주관이, 지식보다 의견이, 사실보다 느낌이 찬양받는 시대입니다. 가짜 정보가 넘쳐나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강해지며 사회에서 진실에 대한 공감 능력이 퇴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람들을 쉽게 ‘무리화(herding)’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환경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인지적 편견이 집단으로 뭉치고 있습니다. SNS를 통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편식하는 ‘메아리방 효과(echo chamber effect)’가 커지며 ‘우리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식의 사고에 중독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병리(病理)현상이 커지면 사회는 결국 하나의 ‘오징어 게임’ 같은 사회가 되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생사를 건 투쟁을 해야 하는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 ‘기훈’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편 가르기’의 진영 정치
디지털 미디어 시대가 수반하는 정보·지식의 편식, 진실과 가치에 대한 공감 능력 파괴, 상대 진영에 대한 미움과 혐오가 현실 정치와 만나면서 ‘진영 정치’가 만들어집니다.

진영 정치는 진영 내 편견을 강화하고 정치를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막다른 환경으로 몰고 갑니다. 진영은 전투적 성격을 가집니다. 선거 승리는 승리한 진영에 점령군으로서의 우월의식을 부여합니다. 진영은 이념을 앞에 내세우지만 ‘이익적 결속’이라는 의미도 지닙니다.

공직(公職)이 일종의 선거 전리품으로 여겨지며 수많은 공직이 승리한 진영 인사들에게 집중적으로 배분되는 승자독식 상황이 전개되어 오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여 이념적 편 가르기를 하고, ‘전리품’ 이익을 이용해 자신들의 지지를 만드는 솜씨를 보여 주었습니다.

팬덤 정치, 선동의 지배
진영적 편견이 심해지면 일종의 ‘집단적 환각’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자기도취적 논리가 정의인 것으로 인식되고 상대 진영은 악마로 인식되며 귀에 들리는 것이 가짜 정보이고 궤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믿게 됩니다.

한편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이른바 ‘문자 폭탄’ ‘사회적 왕따’라는 제재가 가해지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이 속에서 진영 밖에서는 죄(罪)가 될지라도 같은 진영 안에서는 희생이나 순교가 됩니다.

요즈음 이러한 진영을 이끄는 열성 지지층을 ‘팬덤(fandom)’이라 부르고 이들에 의해 좌우되는 정치를 팬덤 정치라고 합니다.

‘정치의 팬덤화’는 팬덤을 이끄는 소수의 선동가(demagogue)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선동가들의 대결은 한편의 무협 드라마 처럼 전개됩니다. 언어 폭력, 궤변에 능한 선동가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SNS를 통해 발신하면 진영에 속한 군중(群衆)은 이에 열광하고 미디어는 이를 중계하기에 바쁩니다.

선동가들이 만드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식 리얼리티 쇼에 빠져든 군중은 미움을 키우고 분노의 소리를 높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 속에서 국가와 사회는 붕괴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외부 진영과의 싸움은 늘어나지만 내부 토론은 사라지기에 그 사회는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대통령이 이런 진영 정치에 발을 담그게 되면 서슬 퍼런 권력도 선동가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맙니다.

대통령의 국정운영 능력

외부 환경 영향이 아무리 커도 대통령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주된 요인은 결국 대통령 자신입니다. 대통령의 국정 리더십을 몇 가지 요소로 구분하면서 그것에 있어 한국 정치가 처해왔던 현실을 진단하고자 합니다.

국가 비전 창출 능력

장밋빛 비전, 허황된 공약
대통령이 국민을 이끌려면 ‘비전(vision)’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비전은 미래를 향한 꿈입니다. 비전은 실현 가능한 목표, 명확한 우선순위를 가진 정책으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대통령의 비전은 담대하면서도 겸허해야 합니다. 포퓰리즘에 기반한 선심성 공약으로 분장한 장밋빛 비전은 결국 국가와 국민을 위태롭게 할 뿐입니다. 선거라는 환경이 만든 강박 의식 속에 만들어지는 비전과 공약이 겸허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허황된 공약과 비전을 고집한다면 대통령의 실패는 예견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선 이념, 실패하는 정책
민주주의는 이념적 다양성을 먹고 자라는 존재입니다. 다양한 것을 어떻게 한 줄로 꿰느냐는 정치 역량에 달렸습니다. 대통령의 실패는 이러한 역량의 실패라 할 수 있습니다.

이념이 앞선 정부는 ① 현실을 도외시한 정책목표, ② 부작용을 해결할 전략과 지혜의 부재로 실패하기 쉽습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도 노동정책, 부동산정책 등에서 그런 문제를 보였습니다. 다음으로 이념이 앞서면 현실과 멀어지고 국민과의 갈등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수 국민이 대통령의 그런 이념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과의 갈등이 큰 대통령이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대증요법, 표류하는 혁신
대통령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국가가 당면한 난제(難題)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구조적 난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대외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부채 폭증, 성장잠재력 추락, 고령화, 양극화 등 실로 해결이 어려운 ‘회색 코뿔소’ 같은 난제가 즐비합니다.

이 문제들은 하나같이 국가의 ‘와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혁신은 장기적 안목을 갖고 구조적으로 일관성 있게 접근해야 실현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난제일수록 원인은 구조적이고 갈등 형태는 집단화되는 법입니다. 혁신을 하려면 심층적 분석과 전략적 지혜가 있어야 하고 선택과 집중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단기적이고 대증요법(對症療法)적 접근만을 하여 왔습니다. 대증요법은 결국 혁신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만듭니다.

지난 문재인 대통령도 임기 초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판은 임기 초를 지나며 실종 상태가 됐고 대신 사람을 줄여야 할 공공기관 인력만 잔뜩 늘리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대증요법적 처방과 접근은 결국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을 실증합니다.

정책 프로세스 관리 능력

정부에 대한 대통령의 착각
비전은 정책, 목표, 행동계획으로 구체화됩니다. 정책 추진은 정부가 하는 것이기에 대통령에게는 ‘유능한 정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유능함은 대통령에 특별한 리더십이 있어야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자원과 인력의 역량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메커니즘입니다. 즉 정책(policy)은 사회과학 용어를 빌리자면 ‘경로 의존성(path-dependency)’을 가지고 있고 각 정부 기관에는 ‘제도적 기억(institutional memory)’도 존재합니다. 행정 관료들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업무 처리 프로세스가 존재하고 이미 굳어진 행동 양식과 문화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정부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대통령실 참모들도 대통령의 착각을 조장합니다. 대통령과 참모들의 책상 위에 올라오는 정보는 그야말로 잘 다듬어진 정보이고 정부는 잘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서 하나하나 따져보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 모든 책임은 대통령에 결국 돌아오게 됩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집무실 책상 위에 ‘모든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는 글을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책임을 느끼는 대통령이라면 실로 밤잠조차 자기 어려운 것이 바로 대통령이란 자리라 하겠습니다.

대리인 문제와 경영능력 부재
조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경영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정부는 국가의 가장 큰 조직이고 따라서 이러한 조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조직의 생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직에는 항상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가 존재합니다. 주권자(principal)인 국민의 대리인(agent)인 공직자(public servant)가 주권자가 아닌 자신의 개인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대리인 문제입니다.

대통령의 임무는 공직자가 진정으로 주권자인 국민을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공직자들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국민이 아닌 대통령과 집권 진영에 충성하고,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책임을 회피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공직 사회에는 권력에 대한 아첨과 직권 남용, 책임 회피가 범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직자가 집권층에 충성할수록 이 ‘행정의 정치화’는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충성이 과하게 되면 행정에 문제가 발생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갑니다. 때로는 정부 행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른바 ‘낙하산 장관’이 옳은 소리를 하는 부하 직원을 윽박지르는 상황 속에서는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오기도 어렵고 성과를 내기도 어렵습니다. 관료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습니다.

정부를 무력화하는 청와대
대통령의 성공에는 효과적인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중심제하에서는 청와대(대통령실)로 대변되는 막강한 참모 조직이 운영됩니다.

참모조직을 운영할 방식은 대통령마다 다릅니다. 대통령실(청와대)와 정부 관계는 시대에 따라 변해 왔습니다. 민주화 시대 이후 양자 관계를 고찰하면 대통령 비서진으로의 권력 집중이 오히려 강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처 장관과 대통령 비서관 관계
정부는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고 그 주체는 비서(대통령 참모진)가 아닌 장관(국무위원)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대통령이라는 권력과 가까운 비서가 아무리 실세라 할지라도 정부 업무는 각 부처 장관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장관은 뒤로 숨고 비서가 전면에 나서고 있습니다. 장관이 국정 운영의 중심이 되려면 대통령부터 장관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비서가 장관을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이는 지난 정부에서 벌어진 ‘월성 1호기 가동중단’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의 육군참모총장 호출’ 등의 사례에서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어공(정치인)’과 ‘늘공(관료)’ 관계
지난날 청와대는 ‘늘공’ 인력이 중심이었으나 오늘날 청와대는 ‘어공’이 중심에 있는 경향을 보이고 습니다. 어공과 늘공의 개인적 성향과 업무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공이 이념적·정치적·임시적이며 ‘정권’ 충성적이라면 늘공은 현실적·전문적·지속적이며 ‘정부’ 충성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은 성장 배경과 신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실이 국익보다 정권 이익에 더 민감하다면, 어공에 좀 더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사권을 장악한 어공이 주인이 되면서 늘공은 하인이 되고 그 속에서 국정은 정치화되고 합리적인 목소리는 뒤로 숨게 됩니다.

공직 사회를 ‘친구’로 가져갈 것이냐, ‘적’으로 돌릴 것이냐 하는 것은 대통령실이 해야 할 중요한 선택입니다. 대통령실 비서관이 지나치게 앞으로 나서면 장관은 부처 국·과장 역할을 하기 쉽습니다. 더하여 대통령실 비서관들이 자신의 리더십은 돌아보지 않고 정책 실패가 나타나면 ‘관료 탓’ ‘홍보 탓’ 하기 바쁘고 자신들끼리 ‘요즘의 공직사회는 정권 4년 차 같다.’는 식의 불평이나 하려 한다면 과연 그 어느 정부 관료가 제대로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인재 선택·활용 능력

‘인사가 만사(萬事) 아닌 망사(亡事)’
지도자에게는 인재를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넘쳐나지만 인재는 찾기 어려운 법입니다. 스스로 나서는 사람은 인재가 아니고 나서지 않는 사람이 인재이기 쉬운 이치입니다. 한국에서는 진보 진영의 집권 기간이 짧았기에 진보 진영에는 국가경영 경험을 가진 인재 풀(pool)이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 진영 대통령일수록 자신의 경계를 넘어 인재를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한때 자신의 정적의 1급 참모이었던 위징(魏徵)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참모로 발탁했습니다. 이로써 ‘정관의 치(貞觀之治)’라는 중국 역사에 가장 찬란한 치세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목숨을 내걸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위징 같은 인물들을 주변에 두지 않는다면 그 대통령은 실패의 길로 가기 쉽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도 결국은 인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영 전리품으로 전락한 공직
진영 정치와 캠프 선거는 ‘코드 인사’를 강화해 왔습니다. 이른바 친박 감별, 친문 감별 논란까지 일었던 이면에는 진영 위주의 코드 인사가 존재합니다.

오늘날 지난날보다 코드 인사가 강화되고 있는 원인에는 정치인들이 공직을 선거 전리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커진 것에 더하여 인사에 있어 대통령실의 장악력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사를 뒷받침한 것이 기재획재정부 ‘공공 기관 운영 관리법’과 지난날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실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별도의 위원회를 통한다고 하지만 대통령이 인사수석비서관실과 기획재정부를 통하여 공공기관 인사를 장악하게 되면서 과거에는 각 부처 장관이 행했던 인사까지도 대통령 비서실이 사실상 결정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즉 코드 인사가 너무 쉽게 일어나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코드 인사가 성행하면 쓴소리를 하는 인재는 멀리 가고 아첨하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자리를 탐하는 사람만 들끓게 됩니다. 이런 인사가 초래하는 문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재도 소모품이 되는 용인술
인재는 찾기도 어렵지만, 제대로 쓰기도 어렵습니다. 지도자가 인재를 기용하려면 소모품으로 쓸 것인가, 보배처럼 아낄 것인가 하는 것부터 정해야 합니다. 인재라도 쓰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인재가 되기도 하고 범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을 쓰면 믿고 자리에 합당한 역할을 주어야 합니다. 장관에 임명해놓고 대통령실 비서관에 더 힘을 실어 주면 그 장관이 제 역할을 하겠습니까? 주변의 음해로부터도 인재를 보호해야 합니다. 바른길로 가려고 할수록 적이 많은 법입니다. 세상은 소인(小人)배의 세상이고 소인배는 늘 인재를 음해하려고 합니다. 이런 음해를 불식하는 것도 결국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몫이라 하겠습니다.

대통령의 정치적 자세

국민의 대통령인가? 진영의 대통령인가?
대통령으로 진정 자신에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이것이라 하겠습니다. 전자는 어렵지만 성공의 길이고 후자는 쉽지만 실패의 길입니다.

대통령은 취임하며 모두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 중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킨 사람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진영을 결속시키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에 역행할 뿐 아니라 대통령 자신의 책무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헬렌 란데모어(Hélène Landemore)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는 “민주주의에는 민주적 이성이 필요하며 그 핵심이 ‘인지적 다양성의 포용’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과 다른 의견을 최대한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민주주의고 자신에 비판적인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국민의 대통령’이라 하겠습니다.

비판은 정치의 기본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확증 편향’이 걸러질 수 있습니다. 반대하는 야당 지도자를 설득하고 언론의 비판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확증 편향은 치유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대통령들이 야당과 언론을 만나는 횟수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민주적 이성’은 오히려 퇴행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균형 감각 상실, 법치와 상식 실종
대통령이 진영에 기울면 국정에 있어 균형 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회는 첨예한 이해 대립의 장(場)이고 대통령은 공정한 중재자로서 균형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어느 한 진영에 마음을 두면 그의 균형 감각은 무너지기 마련이고 그 자리를 ‘편 가르기’의 진영 논리가 차지하며 ‘내로남불’식의 판단이 국정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정의가 강자의 이익에 복무’하게 되면 결국 사회가 지켜야 할 공정한 법치와 도덕적 상식이 실종되기 마련입니다. 죄를 지은 자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법치가 작동되느냐’의 여부는 한마디로 ‘살아 있는 권력’에 엄정한 법치의 잣대가 적용되느냐에 달려 있고 ‘상식이 작동하느냐’ 여부는 한마디로 정직이 거짓을 배척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법치와 상식이 무너지면 국민의 울분이 나라를 뒤덮을 것이고 그 대가는 결국 대통령 자신이 지불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신감 증폭, 위험 신호 간과
한 미국 학자는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국정 운영의 경험 부족, 성과에 대한 조급함, 자신에 대한 과신’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기 쉽다고 했습니다. 이 중 특히 ‘과신’ 문제는 대통령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은 최고 권력자로서 최고로 정제된 정보의 정점에 서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에 과신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로 인하여 참모의 조언을 잘 듣던 사람도 조언을 듣지 않게 되고, ‘내가 더 잘 알아’ 하는 마음이 생기며, 자신이 큰 업적을 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면 만기친람(萬機親覽)식 지시가 많아지고 야당과 언론의 비판은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잔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물론 대통령은 국가가 직면한 난제 앞에서 결기와 자신감을 보여 주어야 하지만 그것은 진정 겸허한 마음 위에 있어야 합니다. 겸허함이 없다면 다가오는 위험을 인식하기 어렵고 부하들의 충언과 아첨을 구별하기 어렵게 됩니다.

한국식 권력 문화에서 대통령이 겸허한 마음을 갖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문제는 작은 곳에서 시작되고 위험은 그런 마음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임기 초 발생한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을 진정 자신에 닥칠 위험의 신호로 읽었다면 아마 그 이후의 국정 운영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실패를 부르는 잠재적 위협
지금까지 많은 대통령들이 도덕적 문제에 봉착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력 남용뿐만 아니라 각종 부정부패 문제 등으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친인척과 측근이 그러하였습니다.

권력을 갖게 되면 보통 자신이 철저하지 않는 한 주위 사람들이 그대로 두지 않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대통령 주변에는 항상 심각한 잠재적 위협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친인척뿐 아니라 이른바 ‘문고리 권력’ 문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위험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대통령 직속 ‘특별감찰관’입니다. 그러나 지난 문재인 정부는 임기가 끝나기까지 이를 임명치 않았습니다. 특별감찰관 제도는 결국 대통령 자신을 보호하는 제도입니다. 그것을 마다하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라 하겠습니다.

전임 정부 노하우 부정
정부에는 ‘제도적 기억’이 존재하고 그 성과를 내려면 지식과 지혜를 계속 축적·발전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는 대통령만 바뀌면 지난 정부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 하고 싶어 합니다. 이른바 ‘단절의 논리’입니다.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과거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단죄하겠단 입장을 견지했던 지난 문재인 정부는 특히 그 어느 정부보다 과거와의 단절을 바랐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사회에는 항상 지켜야 할 것과 고칠 것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지킬 것을 지키고 고칠 것을 고치는 것, 즉 온고지신(溫故知新)이 기본입니다. 이 둘을 제대로 구분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선입견과 편견을 버린 지혜롭고 열려 있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정적(政敵)이었던 후임 총리 숄츠를 G20 정상회의에서 각국 지도자들에 인사시키는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품격은 그래서 우리 국민에게 자괴감을 안겨다 줍니다. 새로운 정부가 지난 정부의 ‘제도적 기억과 지혜’를 폄하하고 부정하려 든다면 바보가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고 전임 정부가 후임 정부에 자신이 가진 정보와 지혜를 물려주려 하지 않거나 감추려 한다면 국민에 죄를 짓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공하는 대통령을 고대하며

현대 사회는 이익을 좇는 경쟁 사회입니다. 그러나 경쟁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원리는 이성(理性)입니다. 혹자는 진영 정치의 시대에 이성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사치이고 철모르는 소리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인간은 그저 광기 어린 동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반(反)문명의 정글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것은 바로 미움입니다. 진영 정치의 기저에도 이러한 미움이 자리합니다. 미움이 정치를 지배하게 되면 정치는 정치가 아니고 모략과 암수가 난무하는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전쟁이 됩니다. 전쟁은 상대를 파괴할 뿐 아니라 결국 자신도 파괴하는 법입니다.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미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인사(人事)’는 자신의 정적을 자신의 각료로 만드는 통치술이었고 그에게 있어 연설은 국민의 마음에서 미움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화합과 관용을 심는 기회였습니다.

최근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에 주어진 소명 또한 좌와 우로 나누어진 대한민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정치에 드리워진 미움을 걷어내고 다시 모두 하나가 되는 길로 인도할 사람은 대통령뿐입니다. 대통령이 진영 정치의 구도를 벗어나는 선택을 하려면 취임 순간에 하여야 합니다.

그 선택에는 최소 다음 3가지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① 자신의 지지층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의지 ② 공직에 이념과 친소관계를 뛰어넘어 진정 능력 있는 인사만 찾아 쓰겠다는 의지 ③ 야당과 언론의 비판을 진심으로 경청하겠단 의지입니다. 야당과 언론은 국민이 자신에 붙여주는 ‘레드팀’이고 당 태종에게 있어 위징 같은 존재라는 것을 대통령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도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잘못은 혹독히 비판해도 상대 진영에 대한 미움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움은 결국 자신을 진영 논리의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진영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비(非)자유, 반(反)법치, 비도덕의 반(反)문명적 언동에 대한 미움이어야 합니다.

이성은 사회적 상식이고 상식은 말과 행동의 품격으로 표현됩니다. 미움에 쉽게 휩쓸리는 국민은 선동과 모략에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동가의 궤변에 놀아나는 국민은 문명사회의 정치를 갖기 어렵습니다. 국민이 블랙코미디식 정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노예의 길’ ‘제10장’에서 “국민의 의식이 깨어 있지 않으면 사악한 자들이 쉽게 권력을 잡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진정 국민이 깨어날 ‘진실의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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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선진화재단 한선브리프 제2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