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론 강가의 영혼들’ : 우리의 영혼이 신성함에 이를 수 있기를

[시리즈 칼럼]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에릭 베스
2020년 9월 25일
업데이트: 2020년 9월 25일

최근 소셜 네트워크에서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가 여러 곳에서 불협화음이 심한 걸 목격했다. 모두들 타인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조화를 되찾고 유지할 방법은 없는 걸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해 사람들의 ‘판단’에 대해 깊이 사색해 보게 됐다.

그때 아돌프 히레미-히르슐의 회화작품 ‘아케론 강가의 영혼들’이 떠올랐다.

히레미-히르슐 ‘아케론 강가의 영혼들’

히레미-히르슐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헝가리 화가다. 그는 고대 로마와 그 신화를 바탕으로 한 우화적인 작품을 주로 그렸다.

당대에 새롭게 일어난 예술 풍조인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점차 인기를 잃었던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를 추구하는 화가들의 부활과 방법론으로 인해 21세기에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작품 다수가 분실됐지만, ‘아케론 강가의 영혼들’은 예술계에서 거듭 논의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히레미-히르슐은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을 선보인다. 구성의 초점은 바로 오른쪽에 우뚝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짙은 청색의 로브를 입었고, 오른손엔 지팡이를 짚었으며, 날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머리 주위에는 부드러운 빛의 후광이 둘러싸고 있다. 이 모든 요소는 그가 올림포스의 신 머큐리임을 확인해 준다.

로마의 신 머큐리가 망자들을 저승으로 인도하고 있다. ‘아케론 강가의 영혼들’ 부분 | Pubic Domain

머큐리는 전령의 신이며, 신계와 인간계 사이의 경계를 넘을 수 있다.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기도 하다. 작품 속 머큐리는 망자들이 저승으로 가는 나룻배를 기다리는 아케론 강가에 서 있다.

어둡고 차가운 잿빛의 망자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먼 곳을 내다보는 머큐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다가오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또 일부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보인다.

구성의 왼쪽에는 머큐리를 등지고 불안정하게 서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보인다. 그들의 머리는 뒤로 젖혀지고, 몸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휘청거린다. 그들의 휘청이는 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그들의 머리는 뒤로 젖혀지고, 몸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휘청거린다. ‘아케론 강가의 영혼들’ 부분 | Pubic Domain

그들은 카론의 나룻배를 타도록 조종되고 있는 걸까?

카론은 망자들이 사후세계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 심판을 받도록 그들을 아케론 강 건너로 실어 나르는 뱃사공이다.

마지막 심판대에서, 의인으로 인정된 자들은 엘리시온이라는 낙원에 살도록 축복을 받고, 악인으로 판명된 자는 타르타로스라고 불리는 지옥에서 고문을 받으며 살도록 선고받는다.

망자를 저승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강을 넘어오는 카론의 나룻배. ‘‘아케론 강가의 영혼들’ 부분 | Pubic Domain

신성에 도달하기엔 너무 늦지 않기를

‘아케론 강가의 영혼들’에서 머큐리는 한 무리의 망자들을 데리고 사후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망자들은 이 여행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마치 이승으로 자신들을 다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머큐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작품을 감상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죽음의 어둠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신은 얼마나 찬란해 보일까?’

필자에게 이 망자들은 단순히 이승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머큐리의 본질, 즉 신성(神性)에 도달하기 위해 손을 뻗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불행히도, 이미 사망한 이들에게 그것은 너무 늦어버린 일이다. 그들은 신성에 도달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낭비했고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건 허무한 헛손질뿐이다.

그들의 미래는 강 건너편에서 생전에 그들이 보여줬던 행위에 의해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극소수만이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을 것이다.

히레미-히르슐의 그림은 우리 자신의 깊은 욕망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신과 같이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신성에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남이 아니라 말이다.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심판할 줄 안다면 신의 은총을 받을 것이고,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다면 결국 신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자기 평가는 그 기원에 신성함이 놓여 있다.

남을 판단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추켜세우는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 모두 심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쉽게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심판받고 비난받는 것은 피하고 싶어 한다.

필자는 지금 우리가 아케론 강가에 있는 것을 상상한다.

무엇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까? 만난 적이 없는 타인을 비난하고, 경험해 본 적 없는 역사나 문화를 평가하면서 우리의 삶을 낭비하진 않았는가? 나를 높이려고 타인을 가벼이 판단하지는 않았는가? 나의 우월성을 절대적으로 믿고, 나와 다른 모든 것을 나의 기준에 맞춰 마음껏 판단하고 비난하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자신의 행동이 신성에 합당 할 수 있도록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문하고 심판하는 데 평생을 바쳤는가? 불협화음을 뿌리는 대신 화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판단해 왔는가?

이 강가에 섰을 때, 우리의 마음은 평화롭고 고요할 수 있을까? 신성에 도달하기에 너무 늦어버린 망자가 돼 있지는 않을까?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은 나와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간의 경험에 대해 무엇을 제안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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