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식 서명법’이 뭔데? 미 항소법원 “유지하라” 판결

한동훈
2023년 12월 30일 오후 6:29 업데이트: 2023년 12월 30일 오후 8:21

종이에 펜으로 쓴 자필 서명…주정부 “선거 보안에 필수”

미국 연방 항소법원이 하급 법원 판결을 뒤집고, 유권자 등록 신청서에 ‘원본 서명'(종이에 펜으로 적은 서명)을 요구하는 텍사스 주법을 유지하도록 했다.

제5연방항소법원은 2대 1의 표결로 텍사스주의 ‘습식 서명법’을 유지하라고 판결했다. 습식 서명은 잉크를 이용한 펜으로 작성한 서명이란 뜻이다. 원본 서명으로도 불린다.

습식 서명법은 유권자가 온라인 혹은 팩스로 유권자 등록을 하더라도, 종이로 출력한 신청서에 반드시 자필 서명을 기입하도록 한 텍사스 주법의 선거 규정이다.

이 규정은 지난 2021년 텍사스 주의회의 ‘선거 청렴법 강화 법안’의 하나로 마련됐다. 2020년 미국 대선 때 광범위한 사전투표·우편투표에 따른 부작용을 경험한 주의회 의원들이 부정선거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 도입했다.

미국 선거의 유권자 등록이란?

한국은 선거 연령에 해당하는 유권자라면 누구나 자동으로 선거인단에 등록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자동 등록제가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유권자라 하더라도 투표를 하려면 미리 주 선거위원회에 유권자 등록을 해야 한다. 등록하지 않으면 선거인단에 이름이 빠져 투표가 불가능하다. 이는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해 19세기 말 만들어진 절차다.

일부 시민단체와 유권자들은 유권자 등록이 번거로움을 초래해 투표권을 제한한다며 폐지를 요구해 왔다.

이번 항소법원 판결 역시 그런 단체 중 하나인 비영리 조직 ‘보트(Vote.org)’가 텍사스 지방법원에 ‘습식 서명법’을 폐지하라고 소송을 낸 것이 출발점이 됐다.

이 단체는 유권자 등록 앱을 제작해 배포하는 등 유권자 등록을 쉽게 하고 투표율을 높이는 활동을 벌여왔다. 특히 2021년 민주당이 추진한 ‘선거개혁법(For the People Act)’을 공개 지지한 이후 공화당이 마련한 선거 청렴법 반대에도 힘을 기울여왔다.

‘선거개혁법’은 모든 유권자에게 우편 투표용지를 발송하고 선거 당일 현장 등록 후 투표를 가능하게 하는 등 부재자(우편)투표를 대거 확대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민주당이 다수당인 하원을 통과했으나 공화당이 우세한 상원에서 표결에 밀려 폐기됐다.

항소법원 “원본 서명, 보안성과 신뢰성”

1심 재판부는 “원본 서명을 요구하는 일이 투표권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것을 금지하는 수정헌법 1조와 14조를 위반한다”, “서명 오류나 누락을 이유로 유권자의 자격을 박탈할 수 없다”는 보트 측 주장을 받아들여 텍사스주의 습식 서명법 효력을 정지시켰다.

이에 텍사스주 법무장관 켄 팩스턴은 항소했고 올해 3월 구두변론에 나선 끝에 1심을 뒤엎고 습식 서명법을 유지하라는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항소법원은 판결문에서 “주정부는 불쾌한 차별을 일으키지 않는 한 선거 규정을 정할 권한이 있다”고 밝혔으며 “등록 신청자가 본인인지 확인하는 것을 포함해 투표 자격의 진실성과 관련해 텍사스 주정부가 상당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항소법원은 “원본 서명 요구 조항은 선거 과정의 무결성을 보호하는 것에 있어 외부 업체 앱이나 디지털 수단으로는 제공할 수 없는 보안과 신뢰성을 제공한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항소법원은 일부 기재 사항 오류나 누락으로 선관위가 우편투표지 개봉을 거부할 경우, 유권자가 민권법상 ‘중요성 조항’에 근거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했다.

팩스턴 장관은 이번 판결을 환영하면서 “습식 서명법은 전혀 과도한 부담이 아니다”라며 “만약 사소한 부담을 준다고 하더라도 부정 선거를 막아내기 위한 안전 장치로서의 이익이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보트’가 개발한 유권자 등록 지원 앱은 습식 서명법을 준수할 방법을 제공하지 않기에 텍사스의 선거법과 전혀 호환되지 않는다”며 유권자들의 주의를 당부했다.

한편, ‘보트’는 플로리다에 대해서도 습식 서명 규정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이 소송은 관할 제11연방항소법원에 계류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