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발명 초기 접종과 관련된 사망 및 부상 사례들

'전염병 정복했다'는 천연두 백신 신화에 가려진 이야기들

둥위훙(董宇紅)
2024년 01월 29일 오전 11:47 업데이트: 2024년 01월 29일 오전 11:47
이 글은 “역사적 백신의 재조명(1부, 2부)” 시리즈의 3부입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백신의 역사를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역사적 데이터를 통해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에 대한 사실관계를 모색합니다.

백신과 관련된 사망 및 부상 사례는 코로나19 백신 대량 접종 이후에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인류 백신 역사상 최초의 백신이 개발된 이래로 심각한 백신 접종 부작용에 대한 기록은 꾸준히 존재해 왔다.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최초로 시행된 천연두 백신 접종은 수많은 부작용 및 합병증과 관련된 기록들로 얼룩져 있다. 흔한 것은 아니지만 진행성 백시니아(백신 바이러스 자체에 감염돼 버리는 현상), 종두성 습진, 뇌염과 같은 심각한 부작용이 이미 당시에도 보고된 바 있다.

영국의 J.T. 빅스가 저술한 서적 ‘레스터市의 사례로 살펴본 공중위생 개선과 백신접종의 효과 비교(Leicester: Sanitation versus Vaccination)’에 기록된 1859년부터 1921년 사이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천연두 백신이 직접적 원인이 돼 사망한 사람만 약 1530명이란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06년부터 1922년 사이 천연두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사망률은 천연두 백신 접종으로 인한 사망률과 놀라울 만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 표는 빅스의 책에 기록된 영국 호적본서(Registrar-General) 연례보고서 자료로, 천연두 백신 접종으로 인한 영구적이거나 심각한 부상 기록은 제외돼 있어 당시 천연두 백신에 대한 종합적인 피해 기록이라기보다 이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 알려져 있다.

위 표에 따르면 영국 레스터시에서 백신 접종이 시행된 이후 1989년부터 1910년까지 나타난 백신 부작용이 ‘우두’로 일괄 통합돼 기록돼 있다. 이 ‘우두’로 기록된 사망 사례가 천연두 백신 부작용으로 인한 것이란 인과관계는 1897년 당시 36명의 사망자가 천연두 백신 접종이 직접적 원인이 돼 사망했다는 내용의 한 보고서가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이 보고서에는 36명의 사망 원인이 진단서 및 검시 결과를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돼 있다.

백신 접종 후 사망 및 중증 부상 사례들

1902년 6월, 영국 런던 윌스덴(Willesden) 구의 스튜어트 박사는 ‘고어 팜 로어 병원(Gore Farm Lower Hospital)’에서 천연두 백신을 접종받은 남성 587명 중 28% 이상이 백신 접종 이후 병가를 냈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공개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중요한 발견이다. 이 남성들은 유급 병가를 인정받았고, 이들의 고용주들도 백신 접종으로 인한 영업 손실에 대해 보상받기도 했다.

‘건강한 아기의 백신 접종 사례(1891년 3월 13일)’에는 “아기의 백신 접종 부위 주변에 새로운 수포가 생기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수포는 얼굴, 머리, 몸, 구강에도 생겼고 이로 인해 젖을 먹지 못하게 됐으며 이후 아기는 백신 접종 후 45일째 탈진해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아기는 백신 접종 뒤 해당 질병에 감염되는 ‘진행성 백시니아’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신의 잠재적인 심각한 부작용 중 ‘단독증(erysipelas)’이 특정 사례에서 더 강조됐는데, 이는 장기간 고통스러운 심각한 피부 감염증으로 인한 사망을 초래한다. 생후 13주 된 영아와 4개월 된 영아가 백신 접종 후 단독증으로 인해 사망한 사례도 존재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라 천연두 백신 중증 부작용의 넓은 패턴 중 일부였으며, 백신에 포함된 수많은 병원체가 이러한 단독증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천연두 백신과 관련된 또 다른 심각한 부작용인 종두성 습진은 천연두 백신이 위험했다는 추가적인 증거로 제시된다. 한 부작용 사례에서는 15개월 된 남아가 종두성 습진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는 소위 ‘순수 림프’ 등 천연두 백신에 포함된 염증성 사이토카인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백신 접종 후 뇌염은 흔하지는 않지만 영유아의 경우 발생 시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백신 접종 후 뇌염이 발생한 사람들의 사망률은 9~40%에 달한다. 또한 살아남은 이들 중 10~25%는 영구적인 뇌 손상을 입었다.

지난 2003년 발간된 통계 분석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1963년부터 1968년까지 이뤄진 천연두 백신 접종으로 인한 뇌염 및 백신 괴사증은 각각 100만 명당 최소 3건, 100만 명당 최소 1건의 빈도로 발생했다. 뇌염의 경우 사망률은 29%, 백신 괴사증의 경우 사망률은 15%였다.

천연두 백신의 실패 사례와 마찬가지로 현재 코로나19 백신 역시 혈전 생성, 뇌출혈, 심근염, 심낭염. 암, 자가면역질환 등과 같은 백신 성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작용을 수반한다.

“부조리의 극치”

1900년경, 의사인 하먼 박사는 의학 잡지인 ‘메디컬 브리프’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건강한 사람의 혈류에 우두라는 독을 주입하는 것은 논리적 결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건강한 사람에게 약을 투여해 감염되지 않은 질병을 예방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조리의 극치’라고 표현했다.

조지 윌리엄 윈터번 박사는 ‘예방 접종의 가치: 그 역사와 결과에 대한 초당파적 검토’라는 저서에서 1882년 3월 4일 자 미 워싱턴 주 국립보건위원회 공보에 실린 보고서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했다.

“우리 마을 당국은 의사를 고용해 백신 접종을 위해 방문한 모든 사람들에게 백신을 접종했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백신 접종을 받은 거의 모든 사람이 어깨에서 손목까지 팔이 부어오르는 홍반이나 홍반성 발진, (백신을 맞은 부위에) 궤양이 나타나 구멍이 뚫리고 고름이 나오는 증상을 겪었다. 다수의 환자들이 고열로 5일에서 10일간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으며, 팔에 외상용 습포를 계속 붙이고 통증 완화를 위해 모르핀을 사용해야 했다.”

“백신을 접종해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라리 천연두에 걸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역할

천연두 백신의 효과와 안전성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천연두 백신은 건강한 사람들에게 강제됐다. 첫 번째로 이뤄진 전 세계적인 천연두 백신 접종 캠페인은 1803년부터 1813년까지 진행됐다.

천연두는 사람들의 실명 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생존하더라도 피부에 심한 흉터를 남겼다. 당시 사회는 여성의 외모를 특히 중요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후유증은 여성에게 특히 치명적이었다. 천연두로 인한 흉터는 젊은 여성의 결혼 가능성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수 있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여성들에게 결혼이 사회적·경제적 안정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단 점을 감안하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호주 태즈메이니아대학의 마이클 베넷 교수는 자신의 논문 ‘제너의 숙녀들: 19세기 초 영국의 여성과 천연두 예방접종’을 통해 19세기 초에 천연두 예방접종이 유행하고 널리 수용되는 데 있어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당시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단체를 조직해 백신 접종을 후원하고 장려했으며, 각자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새로운 질병 예방법으로서의 백신 접종을 홍보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영국 맨체스터 인근에 살던 호프 홀의 베일리 부인(Mrs. Bayley of Hope Hall)이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백신을 지원하고, 백신 접종을 하고도 천연두에 걸린 사람에게는 금전적 지원을 하며 백신 보급에 주목할 만한 공헌을 했다. 또 다른 사례는 렛섬 박사가 강조한,  ‘남작 부인들의 모임(ladies of rank)’이 1805년 말까지 3만 명의 어린이에게 백신을 제공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의학사에서 그동안 광범위하게 연구된 적이 없다.

레스터 시에서의 반대

백신 부작용은 드물게 발생한다고 주장됐지만,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한 합병증들은 백신의 광법위한 수용 및 접종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작용했다.

영국 정부는 19세기 중반, 특히 1840년과 1853년에 천연두 백신 접종 의무를 정책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높은 백신 접종률에도 불구하고 1870년대 초 당시 소규모 제조업 도시였던 레스터시를 비롯한 영국 내 여러 지역에서 심각한 천연두 유행이 발생해 레스터시에서만 3000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358명이 사망했다. 당시 레스터시 지역 신문인 ‘레스터 머큐리 신문’에 기고된 한 편지에서 알 수 있듯, 이로 인해 대중들 사이에서는 백신의 효과에 대한 회의론이 대두됐다.

그러나 반대로 영국 정부는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기소하기 위해 경찰력을 증강해 백신 접종 의무화 정책을 더 강하게 시행했다. 그러나 백신 접종 이후 심각한 합병증을 겪거나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자 백신 접종 거부의 움직임은 더 거세졌다. 심지어 두 자녀 중 한 명이 백신을 맞고 부작용으로 사망하자 남은 자녀에게는 백신을 맞히지 않은 영국인 아서 워드는 백신 접종 거부 혐의로 법적 처벌에 직면하기도 했다.

심각한 건강상 위협에도 불구하고 백신 접종 의무화를 위한 영국 정부의 변함없는 정책은 영국 내에서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수천 명이 레스터시에서 시위를 벌였고, 영국 내 여러 직군의 사람들이 이 시위에 참여했다. 자유를 옹호하고 백신 접종을 비판하는 메시지가 담긴 음악, 현수막, 깃발과 함께 시위는 성대하게 진행됐다. 2마일(약 3.2km)에 이르는 시위 행렬은 지역 사회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8만 명에서 10만 명 규모로 추산되는 당시 시위대는 강제적 백신 접종 정책에 반대하는 대중들의 분노를 그대로 드러냈다. 이 시위는 당시 레스터시의 버처 시의원이 주도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부모의 권리를 옹호하는 연설과 결의안이 발표됐다. 60여 개 도시에서 온 대표들이 참석한 저녁 회의는 시위의 성공을 더욱 공고히 했다.

시위에 참여한 스펜서 홀 박사는 백신 접종에 대한 시민 저항에 깊은 기쁨을 표현했다. 이 역사적 사건은 공중보건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이때 수천 명의 사람이 의료적 신념과 정부의 엄격한 규제에 용기 있게 반대하며 건강 결정에 있어 자기 결정권을 주장했다.

70년간의 연구 결과 조작

현재 높은 평가를 받는 천연두 백신의 안전성과 효능은 현대 의학의 백신 품질 기준에 의하면 의문이 제기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천연두 백신의 정확한 작용 성분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천연두 백신은 3세대에 걸쳐 개발됐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개발된 1세대 및 2세대 천연두 백신은 동물의 피부 표피나 세포에서 배양한 생바이러스를 직접 사용했다. 이러한 백신은 백신 접종 100만 건당 1~2건의 사망, 3~9건의 뇌염, 1~7건의 진행성 백시니아, 2~35건의 백신성 습진 등 중대하고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천연두 백신에는 말 그대로 생바이러스가 있었기 때문에 실험동물과 세포 배양 과정에서 바이러스가 살아있는 채로 유지돼야 했다. 기존 백신보다 안전한 약독화(弱毒化)된 천연두 백신을 만들기 위해 토끼, 생쥐, 염소, 소 등 다양한 실험동물들을 70여 년 동안 복잡한 과정을 걸쳐 실험해야 했는데 대중들은 이러한 사실은 잘 모른다. 이는 인류 역사상 백신 접종을 위해 사용되는 바이러스를 실험실에서 조작한 사상 최초의 사례일 수도 있다.

가장 널리 사용된 천연두 백신인 ‘드라이백스’ 백신은 미국 뉴욕시 보건국에서 관리한 균주용 송아지 림프에서 추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허가받은 드라이백스는 바이러스를 동결건조한 생바이러스 제제로 천연두 박멸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세대 백신은 약독화된 바이러스를 사용하는데, 천연두 퇴치 이전에는 제한적으로만 사용됐다. 이러한 백신은 바이러스가 약독화 과정을 거쳐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경미하기 때문에 드라이백스를 대체할 수 있다.

복잡한 바이러스 ‘잡탕’

1990년대 후반, 한 연구진은 첨단 유전자 염기서열 분석 도구를 이용해 백신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연구하던 중 드라이백스가 처음에 연구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연구는 드라이백스가 다양한 바이러스들로 구성돼 있음을 시사했다. 염기서열 분석 결과 일부 유전자는 고도로 파편화돼 있고 다른 유전자는 특정 균주에서 파괴되는 등 진화하는 돌연변이 염기서열 패턴이 확인됐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드라이백스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인간의 실험적 개입이 두창 바이러스(천연두, 우두 등의 두창 바이러스 질환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총체)군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현대의 천연두 백신도 자연 상태 그대로의 우두나 천연두 바이러스가 아니라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자연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이 만들어낸 혼합물이다. 이는 야생 바이러스를 연구하며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의 원인이 된 SARS-CoV-2 바이러스가 생성된 기원과도 일맥상통한다.

차이점이라면 천연두 백신은 상대적으로 더 간단한 바이러스 배양 방법을 사용한 반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더 진보된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SARS-CoV-2 바이러스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프랑스 리옹에 있는 생물안전 4등급 실험실. 2008.2.27 | JEAN-Philippe KSIAZEK/AFP/Getty Images/연합

잘못된 백신 신화의 전파

천연두 백신은 마법과 같은 의학의 산물로 묘사돼 왔다. 그러나 역사를 좀 더 가까이 살펴보면 천연두의 유병률과 사망률, 그리고 이에 대한 백신의 영향력에 관해 미묘한 이야기가 드러난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는 수백 년에 걸쳐 고안돼 왔다. 천연두 백신 접종 후 사망과 부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제한적일 때 그런 이야기를 전파하는 것은 더 쉽다. 이로 인해 자연적인 천연두 유행과 백신 접종 사이 어떤 인과관계가 있었는지 조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은 또한 이를 공식적인 역사로 만든 공중 보건당국을 신뢰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 미디어로 더 쉽게 잘 전파되는 코로나19 백신과 관련된 사례도 이와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아래 서술된 천연두 백신의 타임라인은 지금의 천연두 백신 이야기의 진화를 반영한다.

•1796년: 에드워드 제너 박사가 8세 소년 제임스 핍스에게 우두 병변의 물질을 사용해 최초의 백신 접종 실험을 실시. 이 실험은 천연두 백신 이야기의 토대가 됨.

•1798년: 제너 박사, 우두와 천연두 예방 가능성에 대한 연구 결과를 자세히 설명하는 ‘수두 백신의 원인과 효과에 대한 탐구’ 발표.

•1800년대 초반: 천연두 백신 접종이 유럽과 미국 전역으로 확산. 수용과 반대 정도는 다양했음. 영향력 있는 인물과 의료진이 백신 접종을 홍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

•1801년: 영국에서 약 10만 명이 백신 접종, 이는 제너 박사의 천연두 백신의 초기 성공과 수용을 반영하는 결과.

•1810년대에서 1820년대: 백신의 실패와 부작용 합병증에 대한 보고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백신의 안전성과 효능에 대한 논쟁이 시작됨.

•1853년: 영국 정부가 예방접종법을 통과시켜 모든 어린이에게 천연두 예방접종 의무화.

•1870년대에서 1890년대: 높은 백신 접종률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로이센, 일본, 미국 등 여러 지역에서 심각한 천연두 유행이 발생, 백신 효능에 대한 의구심 제기.

•1900년대 초반: 여러 국가에서 천연두 사례가 감소하는 것은 분명해졌지만, 다른 공중보건 조치와 비교했을 때 백신의 효능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음.

•1958년: 그런데도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 천연두 퇴치 프로그램을 시작, 백신 접종을 통해 천연두를 퇴치하겠다는 의지 표명.

•1967년: WHO는 감시-봉쇄 전략을 사용하는 강화된 천연두 퇴치 프로그램 시작.

•1977년: 소말리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마지막 천연두 사례가 보고됨.

•1980년: WHO가 천연두 박멸을 공식적으로 선언, 천연두는 인류의 노력으로 박멸한 최초의 질병이 됨.

역사적 기록은 백신 접종의 효과와 다른 원인으로 인한 천연두 발생의 자연 감소를 충분히 구분하지 못한다(이 시리즈의 2부의 주요 내용). 백신의 효능에 대한 의문은 사람들의 선천적 면역력, 위생 및 위생 개선과 같은 다른 요인이 천연두 발병률 감소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