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에게 영감을 주다…독일 음악의 아버지 하인리히 쉬츠

앤드루 벤슨 브라운 (Andrew Benson Brown)
2024년 03월 1일 오전 8:58 업데이트: 2024년 03월 1일 오전 8:58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에게 영감을 준 작곡가, 하인리히 쉬츠(1585~1672)는 ‘독일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하인리히는 폭넓은 인문주의적 교양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음악과 바로크 시대 음악 사이의 간극을 메운 작곡가다. 17세기 유럽 궁정 작곡가로 활동한 그는 바흐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스승이자 좋은 동료였다. 그러나 당시 작곡가들은 궁정의 요구에 따라 움직여야 했기에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하인리히의 삶은 이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극한의 노년기까지도 명곡을 작곡했지만, 그의 모든 작품이 자의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귀족과 궁정의 요구에 맞춘 곡을 써야만 했고, 예술적 자유가 제한됨에 싫증을 느껴 은퇴하려 했으나 그 또한 몇 번이고 거부당했다.

열정과 재능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구현했고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그리스 신화 속 음유시인의 이름을 따 ‘독일 음악의 오르페우스’로 불리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고난을 이겨내다

하인리히 쉬츠를 기리는 기념물. 독일 바트 쾨스트리츠 | 크리스틴 터피츠/CC BY.SA 3.0

유럽 전역에서 존경받는 작곡가였던 하인리히의 유년기는 비교적 초라했다. 1585년, 여관을 운영하던 아버지 크리스토프 쉬츠와 그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을 예정이었다. 어느날, 크리스토프의 여관에 방문한 랜드그레이브 모리츠 헤센-카셀 백작은 우연히 하인리히의 노래를 들었다. 하인리히의 음악적 재능에 감명받은 백작은 그의 후견인이 되어 예술가로 성장하도록 돕고자 했다.

16세기 독일은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 비해 문화적으로 낙후된 국가였다. 더불어 음악가라는 직업은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고, 오히려 여관 주인이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직업이었다. 따라서 크리스토프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모리츠 백작은 그런 그를 대신해 하인리히를 위해 3년간 학비를 지원했다.

하인리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위대한 작곡가 조반니 가브리엘리(1557~1612)의 제자가 됐다. 조반니는 하인리히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고 그를 매우 아꼈다. 조반니의 가르침으로 이탈리아 음악의 특징을 체득한 하인리히는 스승이 임종한 후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귀국 후 그는 모리츠 백작을 섬기며 음악가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국가에 헌신하다

모리츠의 총애를 받으며 음악 활동을 이어가던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후원자를 얻게 된다. 작센 선제후국(選帝侯國·로마 제국 카를 4세에 의해 1356년 선제후 지위를 부여받고 성립된 국가)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하인리히를 전속 음악가로 두려 했다. 게오르크의 요청에 모리츠는 아쉬워하며 그를 보내줬고 그렇게 하인리히는 로마 제국에서 강력한 권력자 중 한 명을 섬기게 됐다.

하인리히는 이후 50여 년 동안 게오르크 1세의 궁정 음악가로 근무했다. 화려한 궁정에 입성했지만 실상 그의 음악 활동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궁정에 입성한 지 3년 만에 30년 전쟁(1618~1648년 독일에서 신교와 구교 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궁정은 자금난에 허덕였고, 하인리히의 음악 활동에도 후원이 거의 끊겼다.

하인리히는 예술적 열정을 맘껏 펼칠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악보집 ‘작은 신성한 협주곡’의 서문에서 “찬양할 만한 음악이 쇠퇴했고 사랑하는 조국은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곳이 파괴되었다”라며 한탄했다. 그러나 그는 “신이 주신 고귀한 예술적 재능을 게으르게 방치하지 않겠다”며 작곡을 이어갔다.

기나긴 전쟁에 지친 하인리히는 60세가 되었을 때 게오르크에게 은퇴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악조건 속에서 궁정 음악이 완전히 쇠퇴한 만큼 나도 늙었다”며 “이제부터라도 궁정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게 한 가지 소원”이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10년간 빈번히 이어진 은퇴 요청은 모두 거부됐고, 결국 게오르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에야 하인리히는 72세의 나이로 은퇴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 쉬츠의 묘비. 독일 드레스덴 | 파울래/CC BY.SA 3.0

백조의 노래

은퇴 후에도 하인리히는 끊임없이 새로운 곡을 창작했다. 그는 순수 기악곡은 거의 쓰지 않는 대신 합창곡과 극음악 등을 많이 탄생시켰다. 그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곡은 ‘백조의 노래’다.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쓴 이 곡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와 가족을 잃은 개인사의 비극을 투영했다.

이 작품은 기악 반주에 맞춰 시편 119편을 이중창단이 부르는 4부 구성 형식의 곡이다. 하인리히는 이 곡에서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과 독일 음악의 전통을 혼합해 새로운 음악적 전통을 창조했다. 각 모텟(motets·라틴어로 음송하는 교회 성가)은 루터교 형식의 평이한 가창으로 시작해 이탈리아 음악의 다성(多聲) 합창 형식으로 전환된다.

두 개로 나뉜 합창단이 각각 독립적인 선율을 부르다가 독창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특정 구절을 강조하기 위해 다함께 합창하기도 한다.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합창단은 작곡가의 심정을 대변하듯 노래한다. 하인리히는 “주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 앞에 가까이 오게 하소서. 내 영혼을 살리소서”라는 가사에 노쇠한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투영했다.

이 곡은 176절에 걸쳐 죽음과 두려움에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구원의 확신으로 나아간다. 하인리히는 평생을 바친,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삶을 이 곡에 온전히 녹여냈다. 그의 인생이 담긴 역작은 1760년 궁정 음악 도서관이 화재를 겪은 후 분실됐다가 1900년에야 다시 발견됐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중 또다시 분실됐다가 1970년에 마침내 재발견됐다.

87세에 생을 마감한 하인리히 쉬츠가 이룩한 업적은 아름다운 음악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친 인내와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이다. 하인리히가 이룬 경이로운 업적은 그가 독일 음악의 아버지임을 증명한다.

앤드루 벤슨 브라운은 미국 미주리주에 거주하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입니다. 그는 음유시인 부엉이 출판사의 편집자이자 미국 혁명에 관한 서사시인 ‘자유의 전설’의 저자입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