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잡힌 행동으로 아름다움을 지키다

[시리즈 칼럼]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에릭 베스
2020년 6월 20일
업데이트: 2020년 6월 20일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는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였다. 상징주의자들은 18세기 예술이 너무 과학적이라고 여겼고, 주제와 제작과정에서 그들이 영성을 버렸다고 믿었다.

이들은 또한 예술가들이 새로 발명된 카메라와 경쟁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상징주의자들은 카메라처럼 현실만을 재현하거나 영적인 것을 무시하는 대신, 자신의 영적 이야기를 자연 세계의 표현과 합성하면서 놀라운 이미지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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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프 모로 국립 박물관은 “모로는 그의 영혼이 모든 것이 상상력으로 가득하고 신성한 미지의 신비한 땅으로 날아오르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고취되고, 고무되고, 도덕적이고, 은덕이 있는, 꿈과 부드러움과 사랑과 열정과 더 높은 세계를 향한 종교적 성숙에 대한 모든 열망을 찾을 수 있는 곳에서 자신의 작업의 본체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고 그를 설명한다.

모로는 이런 종류의 그림을 “신의 언어”라고 믿었다. “언젠가 이 침묵하는 예술이 유창한 화술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인정될 것이다. 나는 그 성품과 본성 그리고 영적인 힘이 결코 만족스럽게 정의된 적이 없는 이 화술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로의 회화 정신에 대한 평가는 당시 화가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르네상스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들 명장에 대한 연구는 모로가 그림 속에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고 작품이 새로운 힘을 갖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au), 1867-1869년,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개인 소장. |Public Domain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1867년경 모로는 아름다움, 사랑, 용기에 관한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를 그리기 시작했다.

안드로메다는 에티오피아의 왕 케페우스의 아름다운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 안드로메다가 네레이드 바다 님프들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해 신들의 미움을 샀다. 포세이돈은 그녀의 발언을 신성모독이라 보고 안드로메다를 산채로 바다 괴물에 제물로 바치게 했다.

페르세우스는 괴물 메두사를 죽인 후 돌아가던 길에 바다 괴물이 안드로메다를 공격하는 것을 봤다. 그는 안드로메다의 아름다움에 첫눈에 반해버려 그녀를 구출하고 싶었다. 그는 자기의 말 페가수스를 타고 바다 괴물에게로 날아가 메두사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바다 괴물은 메두사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돌로 변해 버렸다.

이리하여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를 괴물로부터 구하고, 그들은 결혼하게 된다. 아테나 여신은 안드로메다에게 별자리를 약속했고 그녀는 죽어 별자리(星座)가 됐다.

아름다움의 균형

모로는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하기 위해 페가수스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을 그렸다. 안드로메다의 왼발은 바위에 묶여 있고, 바다 괴물은 아래에서 그녀를 위협한다. 페르세우스는 바다 괴물을 향해 메두사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바다 괴물이 돌로 바뀌기 직전의 순간이다.

모로는 그림 좌측에 높은 색채대비와 에너지를 표현하고 오른쪽을 거의 비워 둠으로 그림을 입체화했다. 오른쪽 아래에 있는 두 바위가 만나는 곳은 화살표의 방향처럼 바다괴물의 꼬리를 가리키며 주의를 환기시킨다.

바다 괴물의 머리는 작품 구성의 중심인 안드로메다를 향해있다. 그녀의 몸은 우아한 곡선을 가지고 있고 두 손은 겸손하게 몸을 가리고 있다.

우리의 시선은 안드로메다로부터 페가수스의 머리까지 인도되는데, 페가수스의 머리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진 메두사의 머리와 에너지가 일치한다. 메두사의 눈과 페가수스의 머리 그리고 페르세우스의 붉은 겉옷은 우리의 시선을 바다 괴물에게로 이끈 다음 다시 위쪽으로 여행하게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왜 그림의 왼쪽엔 생기가 넘치고 오른쪽은 사실상 텅 비었을까? 모로는 왜 안드로메다를 작품의 구심으로 삼았을까? 페가수스는 왜 곤경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나에게 작품의 좌우 차이는 균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징주의자들은 18세기의 예술이 균형을 잃고 너무 과학적으로 돼 버렸다고 주장했다. 예술은 정신과 감정도 필요하다. 또한 아름다움 그 자체는 균형을 통해 발생할 수 있다.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을 때,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정신과 감정의 균형에 달린 것이 아닐까? 아마도 내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과 균형의 상징으로 보이는 안드로메다가 작품의 중심이자 분주한 왼쪽과 텅 빈 오른쪽의 한가운데에 있는 이유일 것이다. 작품에서 아름다움은 주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우아하며 심지어 침착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환경에 따라 굴곡지고 흐른다.

대조적으로, 바다 괴물은 추악함과 고통의 상징으로 보인다. 균형을 잃을 때, 인간은 추악함이 나타나지 않는가? 불만족스러운 욕망에 기반한 감정이 극에 달할 때, 추악함이 아름다움을 압도할 위험은 언제나 높다.

페르세우스는 추악함을 돌로 바꾸어 아름다움을 보호한다. 추악함이 극도의 감정과 불만족스러운 욕망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것들을 돌로 바꿔 그 작용을 멈추게 하자.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찾아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행위는 추악함을 돌로 바꿀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노력인 걸까? 그것을 인정하고 결의를 굳힘으로써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협하는 추악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페르세우스처럼 아름다움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또 우리는 영적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반복해서 노력해야 한다.

나는 페가수스가 이 반복적인 노력과 어려움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움을 지키고 유지하려면 균형을 위한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함을 얘기해 주는 모로의 재치인지도 모른다. 자 이제, 우리 중 누가 도전해 볼 것인가?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은 나와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간의 경험에 대해 무엇을 제안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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