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 부정 선거를 원천 차단하는 방법은? 수개표, 100% 현장투표…

최창근
2024년 01월 17일 오후 8:37 업데이트: 2024년 02월 6일 오전 9:52

집권 민진당의 사상 첫 3연속(12년) 집권, 제1야당 국민당의 입법원 원내 1당 부상, 제3정당 민중당의 약진으로 마무리된 지난 1월 13일 대만 선거에서 선거 결과와 더불어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개표’ 자체였다.

개표 시 투표 관리원은 투표함에서 투표지를 하나하나 꺼내서 머리 위로 들어 보이며 ‘기표자’를 호명한다. 다른 관리원은 다시 한번 호명하며 칠판에 ‘숫자 5’를 의미하는 ‘바를 정(正)’자를 써 가며 집계한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를 방불케 하는 대만의 총통·입법원 동시 선거 개표 방식이다. 전형적인 아날로그 방식이다.

머리 위로 투표용지와 기표를 확인하는 대만 선거 개표원. | CNA.

대만은 1996년 총통 직선제가 회복됐다. 총통 직선제 복원 이후 2024년 현재까지 전자 개표(전자 계수기 사용) 대신 수개표를 고수해 오고 있다.

총통·부총통, 113인의 입법위원(국회의원)을 선출한 지난 1월 13일 동시 선거에서는 대만 인구는 한국의 절반도 되지 않는 2400만 명이나 이날 운영한 투표소는 1만 7795개이다. 2022년 대선 당시 한국이 운영한 투표소 1만 4464개보다 많은 숫자다.

대만에서는 투표 종료 즉시 개별 투표소에서 수개표로 집계가 이뤄진다. 시민들은 투표소 내 관람석에서 개표 장면을 실시간으로 참관할 수도 있다.

개표가 끝나면 개별 투·개표소의 개표 결과가 서면으로 건물 외부 공고란에 게시된다. 이와 더불어 행정원직할시·현·시 등 광역 선거운영센터에는 개별 투·개표소 개표 결과 보고서가 취합된다. 이 과정을 거쳐야 전산을 이용한 중앙선거위원회 집계가 이뤄진다.

전자 개표기를 사용하는 한국은 사전 투표와 부재자 투표가 별도로 존재한다. 투표 종료 후 투표함을 밀봉해 개표소로 옮겨야 한다.

대만은 사전 투표, 부재자 투표, 우편 투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임시 공휴일이 아닌 토요일에 치러지는 선거 때마다 거주지와 주소지가 불일치하는 ‘부재자’들은 원주소지로 돌아가 투표해야 한다. 투표 시에는 신분증을 제시 등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대만의 수개표 방식에 대해서 외국 언론인들은 “대만의 수개표 방식은 다소 고루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공정하고 안전하며 중국 등 외부의 개입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해 준다.”는 평가를 내렸다.

TSMC, UMC 등을 보유한 세계적인 IT강국 대만이 수개표를 고수하는 이유는 부정선거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다. 시초는 지난 국민당 일당 독재 시절 행해진 각종 부정선거다. 1977년 발생한 중리사건(中壢事件)이 대표적이다.

1947년 12월, ‘중화민국 헌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12월 시행됐다. 1949년 12월 국공내전에서 패한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으로 천도했다. 이후 초헌법 조항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과 ‘대만지구 계엄령’하에서 국민당 일당 독재가 지속됐다.

국민대회, 입법원, 감찰원 등 ‘국회’는 바뀌지 않는 영원한 국회라는 뜻의 ‘만년국회(萬年國會)’로 불렸다. 만년국회 의원(국민대회 대표, 입법위원, 감찰위원) 임기는 무한히 연기되어 사실상 종신직이었다. 총통·부총통은 역시 구성원이 바뀌지 않는 국민대회에서 6년마다 간접선거로 선출했다.

기표된 투표용지를 상호 대조하는 선거 관리원들. | CNA.

당시 만년국회 구성원 사망으로 인한 유고시 재보궐선거를 실시했고,  ‘지방자치단체’에 한정해서 제한된 선거를 허용했다. 지방 선거 허용은 대만 국민에 대한 일종의 유화책이었다.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대외 선전용이기도 했다. 다만 선거는 공정하지 못했다. 국민당 관련 인사 혹은 허락받은 소수 무소속 후보만 출마할 수 있었다.

1977년 지방 선거에서 쉬신량(許信良)이 타오위안현 현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원래 국민당적이었으나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했다. 훗날 민진당 주석을 지낸 쉬신량은 국민당이 양성한 엘리트였다. 국립정치대 정치학과 졸업 후 중산장학금으로 영국 애딘버러대에 유학했다. 유학 시절 그는 전향했고 국민당 일당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 무소속 출마한 쉬신량은 선거 과정에서 의회민주주의, 대만 독립, 인권 증진 등을 내세우며 국민당 체제에 날을 세웠다.

1977년 11월 19일, 투표 당일 타오위안현 중리초등학교에서 진행된 투표 결과, 국민당 정부가 자행한 부정선거 결과가 대량 발견됐다. 투표함 바꾸기, 쉬신량에 기표한 투표지 무효표 만들기 등이었다. 투표장 밖에서는 군인, 경찰을 동원한 노골적인 투표 방해 행위도 이뤄졌다.

부정선거 사실을 인지한 쉬신량과 그를 지원하는 지역 유권자를 중심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유권자들은 경찰서 등을 습격하기도 했다. 사건은 1947년 2·28사건 후 최대 민중 봉기로 기록됐다.

이후 1990년대 들어 만년국회는 해산됐고 국민대회 대표, 입법위원 등은 정기적인 선거로 선출하게 됐다. 1996년에는 총통 직선제가 복원됐다.

절차적 민주화 완성 이후에도 대만은 ‘수개표’를 고수하며 부정선거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날 권위주의 통치 시절 국민당의 선거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하고 고수하고 있는 제도는 오늘날 중국공산당 등 외부 세력의 선거 개입을 막는 효과적인 장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