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재일교포 염원으로 둔갑한 북송…각본 있는 드라마였다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실체 ④
이윤정
2022년 11월 19일 오후 6:30 업데이트: 2022년 11월 19일 오후 7:43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른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사업이 시작된 이후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 9만3340명 중 재일교포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고, 일본인 아내 등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2022년 발간한 ‘지상낙원으로 간 그들은 어디에? : 기만적 북송사업과 강제실종’은 그 실체를 규명한 보고서다. 에포크타임스코리아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을 얻어 보고서를 바탕으로 재일교포 북송사업 실체를 분석한 특집 기획을 마련했다.

북한은 1958년부터 대규모 북송사업을 계획했다. 1958년 7월 14일, 김일성은 소련 대리대사 펠리셴코와의 회담에서 재일교포 문제에 대한 북한의 새로운 방식을 공식적으로 소련에 표명하며 대규모 북송사업 추진에 대한 결심을 밝혔다.

북한이 대규모 북송사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북송이 자발적인 재일교포 사회의 염원처럼 보여야 했다. 그래야 국제사회에 북한이 재일교포의 바람을 수용하는 관용적이고도 인도적인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 대규모의 인구이동이 이뤄져야 했다. 그래야 북한의 인도적인 모습이 더 극적으로 비칠 것이고, 자국 내 노동력을 충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총련을 조직적으로 활용했으며, 조총련 역시 굉장히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북송은 재일교포 염원? 북한·조총련 합작품 ‘나카도메 결의’

1958년경, 재일교포 사회에서 실제로 북송을 희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욱이 재일교포 대다수는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북한과는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년 안에 갑자기 어떤 특별한 사건 없이 북송 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조총련도 1958년 전에는 일본에서의 재일교포 생활 안정에 주력하고 있었고, 조총련의 운동방침에도 북송사업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1958년 8월 11일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나카도메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들이 집회를 열어 북한으로 갈 것을 결의하고, 그 심정을 담은 편지를 김일성에게 보낸 ‘나카도메 결의’가 일어났다.

다음 날인 8월 12일, 조총련은 ‘8・15 조선해방 13주년 기념 중앙대회’에서 김일성이 재일교포의 이 같은 절실한 염원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베풀어주기를 앙망하는 ‘집단귀국에 관한 요청서’를 결의했다.

이에 북한은 바로 김일성이 건국10주년기념경축대회에서 재일교포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재일교포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의 답변을 들은 조총련은 9월 9일, ‘공화국 건국 10주년 기념중앙경축대회’를 개최하고, ‘재일조선인의 귀국 문제에 관한 요청서’를 결의했다. 9월 17일에는 북한 외무성이 북송사업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후 10월 8~10일, 북송문제를 주제로 제15중앙위원회가 개최돼 북송문제를 방침으로 정했다.

북한 김일 제1부수상은 “공화국 정부는 재일교포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비 부담과 배편, 귀국 후 생활할 일체에 대한 준비를 갖췄다”며 일본 정부에 재일교포의 즉시 북송 실현을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10월 17일, 북송 실현을 요구하는 오사카 재일교포 대회가 개최되고 11월 17일에 재일조선인귀국 협력회가 결성됐다.

나카도메 결의를 시작으로 촉발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결의 이후 갑자기 재일교포사회에 ‘귀국’ 희망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의 답변과 조총련의 행동이 신속히 이뤄졌다.

그동안 별다른 언급이 없었던 북송이 나카도메 결의를 계기로 갑자기 재일교포 사회의 염원이 된 것이다. 재일교포들이 북한으로 가기를 희망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최초의 집회로 알려진 나카도메 결의는 사실 북한의 철저한 기획하에 진행된 각본 있는 드라마였다.

나카도메 결의 하루 뒤인 1958년 8월 12일, 김일성은 소련의 펠리셴코 대사에게 “재일조선인들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귀국 문제는 재일조선인들 자신이 직접 제기할 것”이라며 “그런 다음 재일조선인총연합회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일본 정부에 해당 요청을 제기할 것이고 그 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성명이 뒤따를 것”이라고 북한의 계획을 알렸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즉, 나카도메 결의는 북한에 의해 기획되고 조총련에 의해 실행된 합작품으로, 조총련 이진규 수석부의장(당시 교육부장)의 치밀한 계획 아래 벌어진 일이었다. 조총련은 북한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며 북송 재일교포 모집에 열성을 다했다.

재일교포 모집을 위한 선전 활동

북한은 조총련을 이용해 북송 희망을 재일교포 사회의 열망으로 둔갑시킨 후, 실제로 북송선에 오를 재일교포 모집에 착수했다. 북송 대상자 모집은 북한과 조총련에 의해 체계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북한의 지시를 받은 조총련은 직접적으로 재일교포 개개인을 대상으로 회유 및 선전 사업을 진행했다. 재일교포 개인을 대상으로 한 직접적인 선전 활동은 각 분회의 선전원들이 수행했다. 선전원들은 총천연색 사진이 실린 북한 잡지인 천리마, 노동신문 등의 인쇄물을 갖고 일일이 재일교포 집을 방문해 북한을 ‘지상낙원’이라 칭했다.

당시 천리마 운동이 한창이던 북한은 여느 공산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지상낙원 건설의 핵심은 ‘노동’이었다. 따라서 선전 사진은 열정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농민, 발전하는 도시와 열심히 돌아가는 공장 모습 등이 주를 이뤘다.

증언자 A에 의하면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하는 그의 누나에게 조총련은 “우리 공화국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무상교육이 가능하다”고 선전하며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대학 졸업장을 들고 웃고 있는 사진을 보여줬다.

북송사업이 시작된 1959년 12월 이후부터는 북송선을 성대하게 맞이하는 북한 군중들의 모습, 북한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는 재일교포들의 삶을 보여주며 선전 사업을 이어갔다.

조총련 선전원들은 인쇄물 등의 자료 외에도 환등기를 사용해 재일교포를 회유하기도 했다. 환등기는 물체나 그림, 사진 등에 강한 불빛을 대어 그 반사 빛을 렌즈에 의해 확대·영사하는 장치다. 슬라이드 영사기가 나오기 전까지 첨단 기기로 꼽혔다. 아직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었으므로 영상에 의한 선전은 효과 만점이었다.

환등기로 직접 선전 활동을 한 장명수 씨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환등기에서는 평양의 근대적 건물이나 풍요한 농작물에 둘러싸인 농촌풍경, 민속무용에 흥을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고, 동포들은 이 광경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당시 동포들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그런 자료를 액면 그대로 믿었고, 자신들의 장래가 북한에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재일교포 전체를 대상으로 벌였던 광범위한 선전 활동은 북송사업 시작 1년 후,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에 필요한 기술자, 사업가, 지식인 등의 엘리트 계층을 공략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당시 북한에서는 ‘7개년 경제 건설’을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특히 고급 인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북송된 재일교포 후손인 증언자 B는 기술자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자신의 조부 역시 조총련 선전 활동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조부는 조총련 소속이었던 외삼촌 할아버지의 지속적 회유로 목재공장 한 개를 세울 수 있는 설비 일체를 가지고 북한으로 갔다. 그의 기여 덕분에 평양에는 평양제1가구목재가공공장(현재 평양목재가구공장)이 세워졌지만, 조부는 지배인이 아닌 기사장으로 배치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공장 관리에 체계가 잡히자 북한은 조부를 2년 만에 함흥의 빵 공장 보일러공으로 보내버렸다.”

증언자 C의 오빠 역시 이 시기 조총련의 회유로 북한으로 간 사람이다.

“그는 일본의 도호쿠 대학원 생물학과에 재학 중인 유망한 지식인이었다. 조총련은 북송 후 모스크바로 유학 갈 수 있다며 그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학구열이 높았지만 재일교포 신분으로 유학이 불가능했던 그는 결국 북한행을 선택했지만, 유학길에 오르지 못하고 북한에서 함흥 의과대학의 강사로 배치됐다. 그는 강사로 근무하는 동안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수많은 전공 서적과 관련 자료, 현미경 등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자주 보냈고, 가족들은 많은 물자를 북한으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 간 지 5년 만에 가족들과 연락이 끊기고 강제 실종당했다.”

조총련이 선전한 내용은 대부분 거짓이었지만, 재일교포 사회의 일반 대중, 지식인 모두 이러한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조총련이 열성적으로 선전사업에 몰두한 결과 첫 번째 북송선이 성공적으로 출발한 1959년 12월 14일부터 1960년까지 1년 만에 전체 북송자의 절반가량인 5만1978명이 북한으로 갔다.

이후 1961년 중반부터 북송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했다. 그 이유는 북한이 기술자나 기업가, 지식인 등과 같은 엘리트 재일교포를 모집하는 것으로 전략 방향을 변경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북한에 간 북송자들이 전해 온 북한의 실상이 일본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급격히 줄어드는 북송자 수를 만회하기 위해 한덕수 의장까지 북송 대상자 모집활동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어 지방의 작은 마을까지 찾아 다니기도 했다. 조총련 관계자 가족도 북한으로 보내는가 하면 북송자 목표 수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도록 특정 조선인에게 북송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