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공산주의 중국이 벌인 ‘참새와의 전쟁’

케이 루바섹(Kay Rubacek)
2023년 11월 8일 오후 5:25 업데이트: 2023년 11월 9일 오전 9:57

몸길이 10~15cm, 몸무게 25g에 불과한 동아시아의 텃새, 참새. 참새는 잡식성으로, 벌레와 곡식 낟알을 주로 먹는다.

1955년 농촌을 찾은 마오쩌둥은 지나가던 참새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

그 한 마디로 참새는 전멸됐다. 그러나 그 참새의 먹이였던 벌레가 급증해 중국 대륙은 전무후무한 기근에 허덕이고 만다.

과거 자신이 중국 공산당 정권의 충성스러운 학생이었다고 고백한 A씨는 “내가 어렸을 때, 중국 사회는 ‘해충’ 또는 ‘악’을 제거했다. 참새가 이에 해당했다. 중국은 자국 내 모든 참새를 없애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청년 시절 중국공산당 학생들의 모범으로 거론됐던 A씨는 중국에 남아 교수가 될 수 있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현재는 자유를 찾아 중국 본토 바깥에서 활동하고 있다.

A씨는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 사람들이 삶에서 지속적으로 ‘투쟁’을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참새를 제거하라’고 지시했다”고 지적했다.

A씨의 기억 속에는 죽은 참새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트럭의 행렬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시 모두가 참새를 죽이는 데 동의했을까.

A씨는 “그때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에 세뇌돼 당이 말하는 모든 것을 믿었다”고 설명했다.

참새가 곡물을 쪼아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지저분하고 전염성이 강하며 사악하다’고 선전하며 “다 같이 참새를 때려잡자”고 선동하는 포스터들, 참새 모형을 세워놓고 남녀노소 참새 박멸을 외치는 행진 영상 등 실제 남아있는 당시 자료들이 그 증거다.

A씨에 따르면, 남성들은 권총과 새총을 이용해 참새를 조준하고 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로 참새들에게 소리를 질러대며 긴 막대기로 참새를 때렸다. 괴롭힘을 당한 참새가 숨을 쉬기 위해 아무 데나 앉아서 쉬려고 하면 사람들은 고함을 치고 채찍을 휘두르며 참새가 흙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괴롭혔다. 그렇게 참새들은 한 마리 한 마리 죽어갔다. ‘투쟁’에 성공했다는 기쁨에 들뜬 사람들은 죽은 참새들을 묶어 길게 땋았고 이를 공산당 상부에 전달, 보고했다. 이 같은 일은 중국 전역에서 반복됐다. 수억 마리에 달하는 참새가 잡혔다.

1958년 말 기준 중국 본토에는 참새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됐다.

이듬해인 1959년, 곤충 포식자인 참새가 없어지면서 막대한 규모의 충해로 인해 흉년이 들었다. 참새가 절멸된 지역의 경우 수확할 곡식이 단 한 알도 없었다. 사람들은 굶주렸으며 여기에 곤충 매개 감염병까지 확산했다.

이후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이 닥쳤고 약 4500만 명의 중국인이 굶어 죽었다. 재앙은 사회주의 시스템으로 인해 더욱 악화했다. 중국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농업 정책을 들여왔다. 중국 전역의 모든 농민은 오랜 세월 동안 입증된 전통적인 농업 방식을 포기하고 의무적으로 신식 농업 기술을 따르도록 지시받았다.

이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고 참새 절멸로 인해 발생한 문제 상황을 더욱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물론 중국공산당 간부들은 굶지 않았다. 중국 시민들만이 굶주림으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수백, 수천만 명의 시민은 흙과 톱밥, 가죽 등 닥치는 대로 먹었다. 심지어는 무덤에 묻힌 죽은 가족의 시신까지 먹었다.

독재자의 즉흥적인 말 몇 마디로 실행된 유례없는 참새 박멸 운동.

물론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 같은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중국은 수천만 명의 집단 아사를 “자연재해”라고 부른다.

*황효정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

이 글은 작가 겸 영화 제작자인 케이 루바섹의 저서 ‘중국의 좀비는 누구인가’의 일부 내용을 발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