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의회 연구원, 中 간첩 혐의 체포…중국 체류시 포섭 의혹

한동훈
2023년 09월 12일 오후 2:11 업데이트: 2023년 09월 12일 오후 2:11

중국서 근무하다 영국 건너와 외교위원장 연구원으로 영입
평소 대중 강경파 비난, 중국 관련 법안에도 영향 줬을 의혹

영국 의회 연구원을 포함한 영국인 2명이 중국 측 간첩으로 활동한 혐의로 체포된 사실이 알려져 영국 정계에 파문이 일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지만,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지난 9~10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에서 리창 총리에게 이와 관련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정치권에서는 중국에 대한 규정을 ‘체계적 경쟁자’에서 ‘영국에 대한 위협’으로 변경해야 할지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앞서 작년 10월 전임 리즈 트러스 총리는 중국을 ‘위협국’으로 규정하려 했으나 같은 달 낙마하면서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고, 후임 수낙 총리는 중국에 대한 실리적 접근을 표방하며 기존 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영국 정치권을 향한 중국의 위협이 가시화하면서 보수당을 중심으로 논의가 다시 급물살을 타는 모양새다.

1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타임스’의 일요판 ‘선데이 타임스’에 따르면, 영국 대테러 경찰은 지난 3월 영국 의회 연구원인 20대 남성과 또 다른 30대 남성을 중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벌인 혐의로 체포했다.

이 연구원은 의회 내 기밀이나 민감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집권 보수당의 여러 고위직 의원과 접촉해왔으며, 수년간 의원들과 함께 대중관계를 포함한 국제정책 관련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파악됐다.

11일 ‘타임스’는 후속 기사에서 이 연구원이 보수당 소속의 크리스 캐시(28)로 앨리시아 키언스 하원 외교위원장의 정책 연구원으로 영입됐으며, 톰 투겐다트 안보장관과도 가깝게 지냈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타임스’가 전날 ’20대 연구원’이라며 익명으로 보도했던 캐시의 신원을 공개한 것은 이번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한 조치로 해석된다.

캐시 연구원은 영국 의회 사교계에서 활동했으며 지난해 한 정치부 여기자와 데이트를 여러 차례 시도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보도에 따르면, 캐시 연구원은 영국 보수당 의원들로 구성된 대중정책 연구단체인 ‘차이나 리서치 그룹’의 리더를 맡아 연구활동 외에도 의원들이나 관련 인사들과 활발한 접촉을 이어왔다.

이로 인해 보수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중국의 침투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노동당 키어 스타머 대표는 “중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이곳 의회 연구원 한 명이 체포됐다는 소식은 베이징(중국 지도부)이 저지른 심각한 안보 침해”라고 비판했다.

캐시 연구원은 11일 변호인 성명을 통해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자신은 “중국 공산당이 가져오는 도전과 위협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교육해 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국은 캐시 연구원이 과거 중국에 거주하며 일할 때 중국 정보기관에 포섭됐으며, 특히 중국에 비판적인 정치인들 사이에서 인맥을 맺고 활동하도록 영국에 보내졌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번 사건은 수낙 총리 취임 후 화해 무드를 타던 양국 관계에 찬 물을 끼얹은 셈이 됐다. RFA에 따르면, 수낙 총리는 G20 정상회의 기간 중국 리창 총리에게 중국의 영국 민주주의 개입과 관련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중국은 ‘반중 조작’이라며 발끈했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1일 정례기자회견에서 “중국이 영국에 대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며 “허위 정보 유포와 반중 정치 조작, 악의적인 비방의 중단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수 인사들은 중국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영국 보수당의 전 대표인 이언 던컨 스미스는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보수당 의원 역시 “중국 공산당의 날카로운 발톱이 영국 기관에 깊숙이 침투했다”고 말했다.

영국 내 일부 인사들은 캐시 연구원이 평소 대중 강경파 인사들을 자주 비난해왔다고 지적했다.

‘대중국의회간연합체'(IPAC)의 홍콩 담당 간사 광쑹칭(鄺頌晴)은 “(캐시 연구원은) 영국 의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종종 의원들에게 중국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로비를 해왔다”고 말했다.

IPAC는 미국을 주축으로 영국, 독일, 일본, 캐나다, 호주 등 28개국 의원들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결성한 의회 간 연합체다. 한국은 참여하지 않고 있다.

광쑹칭 간사는 “(캐시 연구원은) 대중 강경 인사들을 자주 비난했다”며 “IPAC 공동 설립자 겸 보수당 소속 중국 인권활동가 루크 드 풀포드에 대해 ‘위험한 인물’이라며 자주 공격했고, 중국 문제와 관련해 믿을 수 없다고 깎아내렸다”고 말했다.

이어 “적잖은 사람들이 그(캐시 연구원)의 말에 영향을 받아 IPAC에 비호감을 가졌고 몇몇 안건이나 조치에 관해 지지하지 않게 됐다”며 “그(캐시 연구원)는 중국에 온건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방적으로 반대하면 안 된다고 강조해왔다”고 덧붙였다.

광쑹칭 간사는 캐시 연구원을 침투시킴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영국의 일부 법안을 좌절시켰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했다.

그녀는 “신장의 강제 노동 제품 구매를 금지하는 법안이 추진됐지만, 일부 영향력 있는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이러한 의원들은 그(캐시 연구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캐시 연구원은 현재 보석으로 풀려나 재판을 기다리고 있으며, 투겐다트 안보장관과 키언스 하원 외교위원장은 사건에 대한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키언스 위원장은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사건 수사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현재 논평을 삼가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