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핵개발 기지 ‘221공장’의 어두운 역사

2018년 1월 26일 업데이트: 2019년 10월 23일

전 세계 핵보유국 8개 국가 중 중국과 북한만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한 처지에 놓여 있다. 중국 공산당은 핵보유국 지위를 얻기 위해 국민들의 허리띠를 졸랐고 그렇게 만든 자금을 연구 개발에 투자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바지보다 핵을 원한다”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주고, 물건이 필요하면 물건을 주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면 된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다”라고 말한 바 있다. 30여 년 동안 국민을 채찍질해 강행한 결과는 상처로 남았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여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최근 ‘뉴욕타임스’가 중국 서북 고원지대 칭하이(青海)성에 진인탄(金銀灘)이라는 곳이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공산당의 선전 가요와 1953년에 촬영한 영화에 따르면 진인탄은 ‘울창한 초원, 유목민이 야크와 양을 이끌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1958년 이후, 초원의 아름다운 모습은 찾기 어려워졌다. 중국 과학자와 구소련 고문단이 이곳에 중국판 로스 앨러모스(Los Alamos) 연구소를 세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현재 이 이름보다 ‘221공장’이라는 별칭으로 기억되고 있다.

마오쩌둥이 계획한 ‘혁명의 성과’를 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이 핵무기 연구개발기지는 이미 폐허로 변했다. 그러나 그곳에 거주하던 천여 호 가까운 장족과 몽고족은 이 프로젝트의 피해자로 여전히 살고 있다. 221공장 박물관의 소개에 따르면 이들 유목민은 이주를 자원했으며, 지원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중국 정부가 수천 마리의 양을 보상금으로 지불했다는 것이다.

이는 과연 사실일까? 뉴욕타임스는 올해 80세인 경찰관 인수성(尹曙生) 씨의 사례를 소개했다. 인씨는 1963년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박물관의 소개와는 전혀 다른 사실이 드러났다. 221공장은 중국 공산당이 추진하던 대약진의 한 부분으로, 당시 칭하이성 상당수 지역의 유목민들은 이에 저항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씨는 그들이 자신의 토지와 가축 몰수에 반대해 당국에 저항했다고 증언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국 당국은 반란을 우려하고 핵공장 건설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인씨는 당국이 유목민을 그곳에 거주하게 했을 리 없고 쫓아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씨가 2012년에 작성한 회고록에 따르면 공산당 관료는 진인탄 인근 유목민 700여 명을 ‘반혁명 분자’라는 죄목으로 체포했다고 밝혔다.

당시 ‘반혁명죄’가 얼마나 무거운 죄였는지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이른바 ‘죽지 않아도 껍질이 한층 벗겨’지는 죄였던 것이다. 현재 중국에는 ‘반혁명’이라는 죄는 사라졌지만 ‘국가정권 전복죄’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즉 이름만 바뀌었을 뿐 사실상 맥락은 같은 말장난인 것이다.

인수성 씨는 이들 유목민은 반혁명죄로 투옥돼 이중 17명이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진인탄의 유목민 9,000명은 어쩔 수 없이 이주를 해야 했고 24시간 내에 이주준비를 마쳐야 했다. 데려갈 수 있는 야크는 몇 마리에 불과했다. 또 이주 과정 중 경위들에게 구타, 학대를 당하기 일쑤였고, 몇백 명이 사망했다.

대이동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한 몽고족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우리는 사람에 속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유목민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유목민이 강제 이주된 이후 과학자, 기술자, 사병 등 3만여 명이 221공장으로 입주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이전에 쫓겨난 유목민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221공장의 전성기에는 작업장 18개를 포함해 각종 실험실과 건축물이 약 570평방 킬로미터, 220평방 마일에 걸쳐 들어섰다.

현재 폐허가 된 핵 작업장 인근에 거주 중인 몽고족 유목민 56세 펑춰줘마(朋措卓玛) 씨는 당시 그곳에 있던 과학자들에게 고기와 우유를 공급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중국의 핵개발은 극비였기 때문에 출입통제 구역로 지정되어 있었으며 출입증을 필요로 했다고 증언했다.

이 비밀 도시에서는 마오쩌둥의 지시 하에 수소탄 연구 제조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정치 활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66년 마오쩌둥이 문화 대혁명을 일으켰을 당시, 이 핵 실험장은 정계에서 문제가 됐다. 급진파에 대한 청산, 심문, 적대 투쟁이 핵 연구단지에까지 퍼진 것이었다

약 4,000명의 직원이 구류되거나 취조를 받았고, 50여 명은 처결, 구타 끝에 사망했고 아무런 이유 없이 자살로 처리됐다. 당시 중국의 유명 과학자였던 첸진(錢晉)은 취조 중 몽둥이로 구타당해 며칠 후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진인탄을 취재하던 한 여성 작가는 당시의 중국이 현재의 북한과도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마오쩌둥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순수한 정신 같은 것이었어요. 그가 하라는 대로 했지요”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 국민은 공산당의 정치 운동으로 공포에 떨었다. 이 공포가 극에 달해 자주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속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다할지라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비판, 괴롭힘, 구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움직였고, 마오쩌둥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이성은 논할 수조차 없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청춘과 평생을 바치고, 자손까지 바친다’는 식이었다.

퇴직한 중국계 물리학자 웨이스제(魏世杰)는 221공장의 기폭 및 폭발 작업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원자 폭탄과 수소탄, 그리고 인공위성의 발사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 희생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중국 공산당의 핵폭탄 개발은 전제 통치자를 위한, 해악만 가득한 허영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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