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무장경찰 제도 개혁…장쩌민파 정변 사전 차단

샤샤오창
2017년 11월 7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3일

19차 당대회가 폐막했지만 중국 공산당 고위층 내부 투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당국이 장쩌민 집단을 겨냥한 행보를 이어나가는 가운데 10월 31일 무장경찰 제도 개혁안이 통과됐다. 장쩌민파의 쿠데타 기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10월 31일 중국 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무장경찰 부대 개혁 기간의 임시 법규 조정에 관한 결정 초안’을 심의해 무장경찰에 대한 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단일 지휘를 받도록 바꿨다. 개정안은 무장경찰 부대에 대한 ‘당의 통일 영도’를 강화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시진핑) 책임제를 정착시키는 데 있다. 또 ‘군은 군, 경찰은 경찰, 민간은 민간’이라는 원칙에 따라 무장경찰 부대의 지휘관리 체제를 개선하고 우수한 군사역량을 결집시켜 부대를 재편성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무장경찰 ‘일통이분(一統二分)’ 제도

무장경찰은 편제와 병역 제도가 정규군과 거의 유사하나 주로 대내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는 무장세력이다. 이들은 공산당 체제 안정을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1982년 6월에 창설된 중국의 무장경찰 부대는 ‘일통이분(一統二分)’의 지휘체제를 채택했다. 구조적으로는 국무원, 중앙군사위가 일괄 지휘하고 각 지방 공안기관이 등급을 나누어 관리, 지휘하는 체제이지만 사실상 ‘양분(兩分)’이 주축을 이루었다.

일통양분제에 따라 무장경찰 부대는 그동안 중앙군사위와 국무원의 이중 관리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 같은 이중 관리 체제하에서 지방 무장경찰은 정법위 계통 및 부속 공안계통으로부터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 각 지방의 ‘안정 유지’ 업무를 수행한다. 즉 중앙군사위는 무장경찰의 모집과 제도 관리 등만 담당할 뿐, 지방의 부대를 직접 지휘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 공안계통은 무장경찰에 대해 비교적 큰 발언권을 행사해왔다.

따라서 공안부장은 무장경찰 부대의 제1정치위원, 당위원회 제1서기를 겸직하며 각 성(省) 무장경찰 부대 역시 성(省) 공안청장이 제1정치위원, 제1서기를 겸하는 구조로 조직이 이루어졌다. 이는 사실상 무장경찰 부대의 분권을 초래했다. 저우융캉(周永康) 시기의 경우, 그는 정법위 서기, 공안부장 등을 역임하며 무장경찰에 대한 지휘권을 적극 행사해왔다. 또 무장경찰 사령원을 최초로 중앙정법위 위원에 포함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체제는 또 다른 세력의 중심을 형성시켰다.

무장경찰은 한때 장쩌민의 사병

장쩌민은 집권 초기 ‘양가장(楊家將, 양상쿤(楊尙昆)-양바이빙(楊白氷) 형제로 당시 군부를 장악한 세력)’이 군권을 장악했던 탓에 무장경찰에 집중투자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 시기 급속도로 발전한 무장경찰은 국내외에서 ‘장가군(江家軍)’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1996년 12월, 중앙군사위는 무장경찰 부대 총부를 부(副) 대군구급(大軍區級)에서 정대군구급(正大軍區級)으로 승격하고, 무장경찰 사령원의 등급을 7대군구의 사령원과 동급인 상장 계급으로 조정했다. 1999년 당시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장쩌민은 새해를 맞아 베이징(北京)시 무장경찰 총대대 11지대를 시찰했다. 그 뒤부터 공산당은 무장경찰 부대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왔다.

무장부대 체계에서 ‘비주력 부대’에 해당되었던 무장경찰은 이후 육·해·공 3군 및 제2포병과 대등한 지위로 올라섰다. 그 규모 역시 불어나 장비 개선 및 구성원에 대한 대우 향상이 이뤄졌다. 무장경찰 수도 급격히 늘었는데, 외부에서 추산한 바에 따르면 총병력은 150만 명에 이르며 이중 절반은 80만 명 규모의 국내 보위 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인권침해 사건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민중들의 폭력에 맞선 권익 수호 집단 사건도 폭증했다. 특히 2000년 이후 저우융캉이 정법위를 넘겨받으면서 각지에서 집단행동이 빈번해졌다.

무장경찰은 장쩌민 집단이 국민들을 탄압하기 위한 주된 폭력 수단이 됐다. 2006년 중국 무장경찰 사령과 정치위원은 무장경찰을 대규모 군중사건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대규모 민중 청원 사건을 진압하기 위한 준비였다.

무장경찰은 장쩌민파의 버팀목

장쩌민과 저우융캉이 장악한 정법위는 무장경찰의 사병화 · 지방화를 꾀함으로써 후진타오(胡錦濤)-원자바오(溫家寶)의 중앙 정부에 대항해왔다. 지난 10여 년간 장쩌민은 무장경찰에 거액을 투자해 ‘제2의 권력 중앙’으로 불릴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또 정법위와 산하 공안계통은 ‘안정 유지’라는 명목으로 지방의 무장경찰 세력을 움직여 국민을 탄압했으나 법적 제한을 받지 않았고 중앙군사위도 손을 대기 어려웠다.

무장경찰 부대는 여러 차례 정변에 참여한 의혹을 받아왔다. 장쩌민, 쩡칭훙(曾慶紅), 보시라이(薄熙來), 저우융캉 등이 무장경찰에 의지해 18대 이후 시진핑에 대한 정변을 시도했던 것이다. 왕리쥔(王立軍)의 중국 영사관 도주 사건 당시 보시라이는 무장경찰을 동원해 미(美) 영사관을 포위한 것이 대표적이다. 저우융캉 또한 3·19정변을 일으키며 무장경찰을 동원한 바 있었다.

2012년 3.19 정변 과정에서 중앙정법위에 주둔해 있던 무장경찰 특수부대는 하늘을 향해 총을 쏘면서 38군에 대항했다. 그러나 38군 부대는 신속히 무장경찰을 제압했다. 베이징 시민들다수가 이날 밤 총성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3.19’정변은 미수로 그쳤는데 주범으로는 당시 중국 공산당 정법위 서기인 저우융캉이 지목됐다. 보시라이 사건의 결정적 증인인 다롄스더(大連實德) 그룹의 쉬밍(徐明)이 장쩌민파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막기위해 사전에 체포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사건 당시 후진타오는 38군 부대를 베이징으로 긴급 투입해 정법위 건물 밖 무장경찰과 대치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무장경찰 부대는 명목상 국무원과 중앙군사위의 이중 관리를 받는다. 그러나 실제 통제권은 국무원의 공안부, 즉 정법위에 있다. 저우융캉이 정법위 서기로 재임 시 연간 안정 유지비용이 군비 지출을 넘어섰으며, 정법위 권력은 ‘제2의 권력 중앙’으로 부상했다. 후진타오-원자바오의 ‘정치 명령이 중난하이 밖으로 전달되기 어렵다(政令難出中南海)’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우융캉이 장악한 무장경찰 세력은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 중국 공산당의 말을 빌면, 저우융캉은 ‘칼자루(刀把子, 공안과 법원, 검찰 등을 총관장하는 정법위원회)’를 손에 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장경찰 부대라는 ‘총대(槍杆子)’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시진핑, 무장경찰내 장쩌민파 세력 청산

시진핑 집권 이후에도 무장경찰 내 장파 세력은 심각한 위협이었다. 한 소식통은 류위안(劉源:상장 출신으로 류샤오치 전 주석의 아들)이 시진핑에게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에 무장경찰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정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직언했다고 전했다.

시진핑이 군대 내에 반부패 운동을 전개할 당시 무장경찰은 주요한 타깃이었다. 따라서 임기가 끝난 무장경찰 고위층은 연임되지 못하고 전부 물갈이됐다.

2016년 12월 29일 중국 당국은 중앙군사위 연합참모부 부참모장이자 무장경찰 부대의 전 사령원인 왕젠핑(王建平)이 뇌물수수죄에 연루돼 군사검찰기관이 입건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왕젠핑은 18대 이후 낙마한 첫 현역 장교라는 불명예를 얻게 됐다. 왕젠핑은 무장경찰 부대 사령원 재직 시 직속상관인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를 보좌했고 궈보슝(郭伯雄), 쉬차이허우(徐才厚)의 수하로 활동했다. 시진핑 당국이 2014년에 왕젠핑을 전출 조치한 것도 주로 그를 무장경찰 권력 기지에서 전출시키기 위해서였다.

중국 공산당의 2016년 6중전회 보고서에 따르면, 중앙후보위원이자 전 무장경찰 부대 부사령원 뉴즈중(牛志忠)은 심각한 기율 위반으로 당적을 박탈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이쑤쥔(戴肅軍) 전 부사령원은 2016년 10월 20일 조사를 받았고, 판창제(潘昌傑) 부사령원, 야오리궁(姚立功) 부정치위원 등은 면직됐.

18차 당대회 이후 무장경찰 부대는 집중 정화작업을 거쳐 여러 고위급 장성들이 실각했다. 광둥(廣東)성 공안청 당위원 부서기이자 무장경찰 간부인 차이광랴오(蔡廣遼), 무장경찰 교통지휘부 사령인 류잔치(劉占琪), 무장경찰 교통지휘부 정치위 왕신(王信), 톈진(天津) 소방 총부대 정치위 쉬하오위안(徐豪元), 무장경찰 교통지휘부 엔지니어 먀오구이룽(繆貴榮), 신장(新疆) 공안 변방 총부대 총부대장 장건헝(張根恒), 무장교통 지휘부 부사령원 디무톈(翟木田), 무장경찰 부건설 총부대 사령원 양하이(楊海), 무장경찰 사업 대학 학장인 선타오(沈濤), 무장경찰 장쑤(江蘇)성 총부대 사령원 위톄민(於鐵民)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장쩌민파 정변의 배후 근절

지난 임기 무장경찰의 고위층 몰락은 중국 공산당 권력 기구의 중요한 부분인 군대, 무장경찰, 정법 및 선전계통, 지방 세력 등이 이전에는 모두 장파에게 있었음을 시사한다.

19차 당대회 이전 장파의 핵심인물로 군권을 장악했던 팡펑후이(房峰輝), 장양(張陽) 등이 급작스레 낙마하면서 시진핑의 군권은 견고해지고 있다. 반면 장파는 큰 타격을 입었다. 19대 이후 시작된 무장경찰 제도 개혁은 국무원, 중앙군사위의 이중 관리 체제에서 군사위 관리로 전환해 지방정부가 더 이상 무장경찰 부대를 지휘해 병력을 동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장쩌민파가 정변을 일으킬 군사적 지원세력이 완전히 근절된 것이다.

위 기사 내용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