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매체 “항미원조 영화, 한국서 15세 관람가 개봉→무기한 연기”

김윤호
2021년 9월 13일
업데이트: 2021년 9월 13일

지난 8일 오후 시나닷컴 등 중국 매체들은 “당초 오는 16일 IPTV로 한국 상영 예정이었던 항미원조 영화 ‘금강천’의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다”고 보도했다.

이 영화를 수입·배급한 한국회사 (주)위즈덤필름 이 모 대표는 이날 “판권 계약을 폐기했다”며 개봉 취소 소식을 알리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시나닷컴은 같은 날 오후 6시 40분(한국 시각 7시 40분)께 발행한 기사에서 한 국내 일간지 지면 일부를 캡처해 전재하며 “한국 우파 영화인들이 강력하게 항의해 영화 수입사인 위즈덤 필름이 개봉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시나닷컴이 왜 개봉 취소가 아닌 무기한 연기라고 보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영화 ‘금강천’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중공군)의 승리를 그린 영화다. 작년 10월 중국에서 개봉해 11억 위안(약 2천억원)의 입장 수익을 거뒀다. 한국 수입사가 붙인 국내 개봉명은 ‘1953 금성 대전투’다.

항미원조 소재 영화 ‘금강천’의 한국 개봉 무기한 연기 소식을 전한 8일 오후 시나닷컴 기사 | 화면 캡처

이 영화는 중국의 주선율 영화다. 주선율 영화는 중국 공산당의 이념선전 영화를 가리킨다. 사회주의, 애국주의, 집단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을 담았다. 작년 미중 갈등이 고조된 가운데, 반미 애국주의에 편승해 선전선동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항미원조(抗美援朝)’는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지원하다’는 뜻으로 중국 공산당이 한국전쟁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한국전쟁을 보는 중국 공산당의 관점이 담겼다. 중국인들도 흔히 한국전쟁을 항미원조라고 부른다.

항미원조 영화답게 ‘금강천’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중공군)을 미화한다. 다만, 한국군에 대한 승리가 아닌 미국에 대한 승리에 초점 맞춘다. 심지어 2시간여에 이르는 상영시간 내내 한국군은 물론 북한군조차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 회사인 수입사 위즈덤필름이 중공군을 미화한 영화의 한국 개봉을 결정한 것도 이 같은 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눈길을 끄는 것은 시나닷컴, 넷이즈 등 중국 주요 포털이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항미원조 영화 ‘금강천’이 오는 9월 16일 한국 방영이 허가돼, 15세 이상 관람가로 IPTV 개봉한다”고 보도했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 매체들은 서너 문단의 단신 기사에서도 “15세 관람가로 한국에서 방영 허가가 났다”는 점을 두 번이나 언급하며 강조했다.

8일 오전 영화 ‘금강천’의 한국 15세 관람가 개봉 예정 소식을 전한 시나닷컴 기사 | 화면 캡처

사회통제가 엄밀한 공산주의 국가에서 영화는 삼엄한 검열을 거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한국의 현행 영상물 심의 제도하에서 중국의 주선율 영화라고 유통을 막거나 등급 심의를 거부할 방법이 없다는 게 영화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는 영상물의 소재 또는 내용 등을 이유로 등급분류를 보류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헌법에서 금지한 사전검열에 해당해서다.

이런 차이를 모르는 중국인들 시각에선 한국 정부가 공산당의 항미원조 주선율 영화 개봉을 승인한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중화권 평론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또 한 번 중국 공산당에 머리를 조아렸다는 표현까지 쓰며 비판하고 있다.

영화 ‘금강천’의 한국 개봉 취소를 다룬 또 다른 중국 매체 기사나 평론가들의 글에서는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의 황희 장관이 “한국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황희 장관은 이날 “최근 특히 MZ(20·30세대)들의 중국에 대한 정서나 국내 정서는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며 젊은 세대의 반공, 반중정서 고조에 대해 언급한 뒤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 ‘금강천’의 한국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을 전한 기사들. 단, 검색 결과 최상단 항목은 문체부 장관의 발언을 인용해 ‘금강천’의 한국 상영 신청이 철회됐다고 보도한 연합뉴스 중문판 기사다. | 구글 검색 결과

이번 사건은 한국 수입·배급사의 역사의식 미흡으로 인한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중화권 평론가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일종의 ‘간 보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불발로 끝난 이번 사건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한국 내 반중, 반공정서를 타진하고 동조세력의 역량과 대처를 가늠하거나 새로운 동조세력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는 단계적 문화분야 ‘통일전선전술’ 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거대기술기업, 연예계를 대상으로 체제에 비판적이거나 집권세력의 라이벌 계파 인사들을 숙청하는 ‘문화대혁명’ 2.0이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연예인 팬클럽 수천 개가 ‘불건전’이라는 이유로 공중분해 됐다. 그만큼 한국 대중문화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방증이다.

특히 중국 젊은 층을 흡인하는 한국 대중문화는 중국에서 ‘지루한 애국주의 콘텐츠’의 대명사인 주선율 콘텐츠의 확산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영화 ‘금강천’ 상영 무산을 보도한 기사에는 “우리도 한류를 반대해야 한다”는 댓글이 목격된다. 중국 온라인 공간은 수천만명의 댓글부대(우마오·五毛)에 장악돼 있다. IPTV 상영 무산이 비난 댓글을 통해 한류 전반에 대한 반감으로 유도되는 것이다.

중화권 시사평론가 리린이는 “중국 공산당은 오히려 한국의 국민 정서를 이용해, 영화 개봉이 무산되더라도 이를 자국 젊은 층의 한류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시키는 그림을 짰을 수도 있다”며 “중국 공산당은 음모에 능하다. 이를 막으려면 그들의 수법을 꿰뚫어 보고 철저하고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특히 상대국 정치인이나 정부 관계자의 발언은 본래 의도와 달리 역이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그룹 ‘BTS’의 한국전쟁 관련 발언을 비중 있게 보도한 중국 공산당 대변자 언론 환구시보 지면. 한국 연예인들이 중국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 연합뉴스

그러면서도 지난 6월 한국 주간지 시사인과 한국리서치가 18세 이상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의 반중 인식 조사’ 결과를 인용해 “한국인 약 58%가 중국(공산당)을 ‘악에 가깝다’고 평가했다”며 “중국의 대외 선전은 갈수록 반감만 키울 것이고 이는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의 주요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였다.

한편, 주선율이란 용어 자체는 1980년대 말부터 중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널리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장쩌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 시절부터다. 그는 사상통제를 위해 대중 미디어를 통한 주선율 강화를 강조했다.

시진핑 정권 출범 후에는 주선율 영화들이 시진핑 사상을 홍보하고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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