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으로 가는 길을 걷는다는 건…끊임없는 자아성찰의 여정

[시리즈 칼럼]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에릭 베스(Eric Bess)
2019년 12월 29일 오후 12:26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5

성서의 이야기를 작품화했던 바로크시대 초기 대표적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는 1600년 티베리오 체라시(Tiberio Cerasi) 추기경의 의뢰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개종한 사도 바울을 그렸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나서 이름을 바울로 사용했던 사울은 소아시아 타르수스 출신의 바리새인(유대교의 한 분파)이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사후의 삶과 유대 전통의 중요성을 믿고 히브리 성경을 깊이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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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유대교인이었던 사울은 당시 새로운 종교 운동이었던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유대인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고 비유대인들과 지나치게 자유롭게 어울린다고 믿었을 것이다.

사울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체포하고 욕보이고 배척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유대인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여겼던 그는 박해받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돕던 스데반의 투석형(돌을 던져 사람을 죽이는 형벌)을 목격하고는, 스데반에게 돌 던지는 군중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던 사울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 자신을 질책하는 예수의 환영을 보고 놀라 말에서 떨어진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사도행전 9:1-5에서 전하고 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려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아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사울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성경은 사울이 예수의 환영을 본 후 눈이 멀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이어 예수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나타나 ‘선택된 도구’인 사울을 만나보라고 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 그의 눈을 만져 뜨게 했다. 사울은 그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해 로마식 이름 사울을 히브리어 바울로 바꿨다.

카라바조(Caravaggio)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개종’, 1601년, 캔버스에 유채, 이탈리아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체라시 예배당 | Public Domain

카라바조의 그림

화가 카라바조는 사울이 말에서 떨어져 신의 환영을 보는 순간을 묘사했다. 이 예술가는 격렬한 명암대조 기법인 테네브리즘(Tenebrism)을 사용했다. 테네브리즘은 우울한 어둠과 강렬한 빛을 이용, 작품 속 드라마와 감정을 전달하는 미술 기법이다.

이 작품 속의 세 형상은 어두운 배경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빛은 작품의 구성에서 계층적 요소를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그림의 뒤편에 있는 마부는 빛을 가장 조금 받는 그러니까 가장 덜 중요한 요소다. 이에 비해, 말은 더 많은 빛을 받고 대비가 높으며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울은 그중 가장 강렬한 빛을 받고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걸 의미한다.

마부는 그림의 오른쪽으로 말을 이끌고 있다. 마부는 또한 땅을 가리키고 있다. 땅에는 사울이 메시아의 환영을 보면서 그의 두 팔을 펼쳐 높이 뻗고 눈을 감고 누워있다. 마치 신의 환영을 붙잡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것만 같다.

그러나 말과 마부 모두 사울의 추락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들은 평소처럼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은 마부가 이끄는 대로 그저 사울을 넘어 지나갈 것만 같다. 사울은 일생 최고의 경험을 하고 있는데, 그림 속 아무도, 그 어느 것도 그것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카라바조는 왜 사울이 그의 환영을 보고 있을 때, 말과 마부가 전혀 동요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했을까? 사울의 환상이 개인적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걸까? 아니면 세속(世俗)에서 그가 분리됐음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예수의 ‘선택된 도구’인 사울은 더 이상 그의 이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까?

말과 마부는 넘어져 있는 사울을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를 그저 지나치는 것은 어려운 일 같다. 그 구성은 너무 타이트해 세 개의 형상은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고, 카라바조는 사울의 몸을 포어쇼트닝(단축법)을 사용, 우리와 공간을 거의 공유하도록 만들었다.

포어쇼트닝(foreshortening·단축법)은 원근법의 한 형태로, 물체가 실제보다 더 짧게 나타나 압축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회화기법이다. 그림의 깊이와 치수를 극대화하는 데 탁월한 표현 기법이다.

미술 사학자 스티븐 주커와 베스 해리스(Steven Zucker and Beth Harris)는 이 정도 수준의 단축법과 명암대비 묘사는 카라바조가 신을 세상에 내놓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매우 많은 단축기법이 사용됐다. 사울의 몸이 단축됐을 뿐만 아니라 칼도 단축되고 말도 단축됐다. 그리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매우 가깝다. 르네상스에서 우리는 종종 인간의 세계와 신의 영역 사이의 거리를 보았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사울은 우리 세상에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우리는 종종 인간의 세계와 신의 영역 사이의 거리를 보았다. 그러나 사울은 우리 세상에 나타나 있다. 카라바조는 마치 사울이 우리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정밀하고 생생한 묘사를 위해 단축법을 사용했다.

카라바조는 그 이미지를 실제처럼 보이게 해 우리가 신과 더 가까워지기를 원했던 걸까? 그가 명암과 단축법으로 그림을 실물처럼 그리고, 마치 신이 우리와 공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신

오늘날 모든 사람이 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 가르침은 때때로 종교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교훈을 제공한다. 사울의 개종은 우리가 우리의 성품을 고양시키는 면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지 않은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상기 시켜 준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이유를 찾으려고 하기 쉽다. 그러나 바라건대, 우리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우리는 자신이 조성한 타인의 고통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반성하는 방식으로 먼저 인식해야 한다.

사울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신의 개입이 필요했다. 신의 개입은 예수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Why do you persecute me?)”고 묻는 것으로 시작됐다.

“왜”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우리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왜 내가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거지?” 어쩌면 이 질문은 우리를 해로운 습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비록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겠지만, 우리 각자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생각과 행동들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신이 우리의 공간을 공유할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은 나와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간의 경험에 대해 무엇을 제안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것들은 내가 ‘내면으로 접근하기: 전통 예술이 마음에  전해 주는 것’ 시리즈를 위해 살펴본 몇 가지 질문이기도 하다.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