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③ 대만 핵 무기 개발 카운트 다운, CIA, 그리고 스파이

[기획연재] 대만의 핵 무장은 가능할까? 좌절된 대만의 핵 개발 진상 ③

최창근
2022년 08월 13일 오후 7:06 업데이트: 2022년 08월 15일 오후 4:45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兩岸) 간 긴장이 고조됐다. 핵무기 보유국이자 미국에 대적할 만큼 국방력을 증대해 오고 있는 중국에 비하여 대만의 국방력은 절대 열세이다. 이 속에서 대만 방위를 위해서는 핵 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대만 정부는 국제규범에 따라 핵무기 관련 생산·개발·획득을 하지 않는다는 ‘3불 정책’을 확인하고 있지만 ‘핵무기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던지고 있다. 실제 대만은 독자 핵 개발을 시도했었고 성공을 눈앞에 두었으나 내부 ‘간첩’으로 인하여 좌절된 역사가 있다. 비밀리에 추진됐던 대만 핵 개발 역사는 어떠했을까. ‘에포크타임스’는 관련자 증언,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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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대만이 핵 무기를 개발하려 했던 이유는?
② 1970년대 핵 개발을 둘러싼 대만과 미국의 갈등

미국 정부는 대만 핵 무기 개발 계획을 저지하기로 했다. 내부 스파이 포섭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전면에 나섰다. 당시 타이베이 미국대사관에는 무관(武官), 미국군사원조기술단(MAAG) 등 다수의 미군 장교가 타이베이에 주재했다. 군복을 입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원 소속이 중앙정보국이었다.

미국 스파이들은 대만 핵 관련 인재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교제’를 명목으로 당사자들에게 접근했다. 미국 정보 요원들의 눈에 한 사관생도가 눈에 들었다. 장셴이(張憲義), 그는 대만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의 하나인 중정이공학원(현 국방대학 이공학원) 생도로서 신주(新竹) 국립칭화대학 원자력공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훗날 장셴이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대학생이던 1960년대 후반 대만 주재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접근해 왔다고 증언했다.

대만 서부 신주시의 국립칭화대학. 베이징 ‘칭화대학’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대만을 대표하는 이공대학이다.

1943년 중국 하이난(海南)섬에서 태어난 장셴이는 1945년 광복 후 대만 중부 타이중(臺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강점기 대만총독부 설비기사였던 아버지 장야오능(張曜能)이 공군 기술장교로 전직했기 때문이다.

타이중 제2고등학교(第二高級中學)를 졸업한 장셴이는 1963년 중정이공학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2년 과정 이수 후 국립칭화대학 원자력공학과 1기로 편입했다. 중국 베이징(北京)에 시원을 둔 국립칭화대학은 1955년 대만 신주에서 복교(復校) 후 재기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중 원자력공학과는 대만 원자력 연구의 메카였다.

대학 졸업 후 장셴이는 1968년 국가중산과학연구원 주비처(籌備處) 연구원이 됐다. 이듬해인 1969년 국가중산과학연구원이 공식 개원했다. 옌전싱(閻振興)이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행정원 교육부장, 국가과학위원회 부주임위원, 원자능위원회 주임위원 등을 역임한 저명 학자이자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였다. 중산과학연구원은 대만 방위 산업의 중추였다. 원장·부원장을 비롯한 연구원은 기본적으로 군인 신분이었다.

국가중산과학연구원이 개원한 1969년 장셴이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테네시대학 원자력공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4년 후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귀국 후 국가중산과학연구원 제5연구소로 복직해 원자력반응팀장을 맡았고, 중교(中校·중령) 계급장을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 중앙정보국(CIA)·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장셴이를 비롯한 대만 유학생을 집중 감시했다. 장셴이가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1975년 중앙정보국 요원이 접근하여 정보 제공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대만 귀국 후에도 미국 정보 당국의 연락은 이어졌지만 장셴이는 만남을 회피했다. 미국 측은 “우리 회사가 당신을 채용하고 싶다.”며 ‘스파이’가 될 것을 종용했다.

국가중산과학연구원 근무시 군복 차림의 장셴이.

장셴이가 미국에 포섭된 것은 1981~82년 무렵이다. 1981년,훗날 주한국 대사, 주중국 대사를 역임하는 제임스 릴리(James Lilley)가 미재대만협회(AIT) 타이베이 사무처장(대표)으로 부임했다. 중국 태생인 릴리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중화권에서 활약한 중앙정보국 공작원이었다.

대만이 핵 무기 개발에 속도를 내던 비상한 시기, 대만에 부임한 릴리는 장셴이 포섭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장셴이에게 접근한 중앙정보국 요원은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유지하고 싶다. 그 점에서 핵무기 개발은 대만 주민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설득했다.

제임스 릴리. 중국 산둥성 칭다오 태생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공작관으로 중국, 대만, 한국 등에서 활동하였고, 훗날 주대만 미국 대표, 주한국 미국 대사, 주중국 미국 대사, 국방부 차관보 등을 역임했다.

미국의 포섭 공작 속에서 1984년 장셴이는 41세 나이로 상교(上校·대령)로 승진했고, 제1연구소(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 됐다. 그 무렵 ‘핵무기 개발이 대만의 국가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장셴이는 중앙정보국의 스파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한 조사를 거쳐 정식 정보원이 됐다.

‘정보원’이 된 장셴이는 정보 거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핵 무기 개발 계획 주요 내용과 일정, 국가중산과학연구원과 정부 관계 기관 간에 오간 보고서, 관련 회의 내용, 수퍼컴퓨터 관련 기술, 반응기·감속기를 비롯한 원자력 관련 주요 부품 수급 내용, 지대지 미사일 개발 진척 상황 등 고급 정보가 누설됐다. 당시 장셴이는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강경파’로 인식되고 있어서 내부 의심을 받지 않았다. 정보 거래 회동은 타이베이 북부 번화가 스린(士林) 야시장 부근에서 2~3개월 단위로 이뤄졌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장셴이를 ‘완벽한 최고의 정보원’이라 평가했다.

장셴이가 스파이로서 암약하던 1980년대, 미국 정부는 대만의 정국(政局) 상황을 우려했다. 1978년 총통이 된 장징궈의 지병이 악화일로였기 때문이다. 만약 장징궈가 사망한다면 정치적 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중화민국(대만) 헌법에 의하면, 총통 유고 시 공식 계승자는 부총통이었다. 1984년 장징궈는 리덩후이(李登輝)를 부총통으로 지명했다. 리덩후이는 본성인(대만인) 태생으로 미국 코넬대학에서 농업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학자이나 테크노크라트였다. 문제는 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당국(黨國) 체제하에서 리덩후이의 국민당 내 입지가 약했다는 점이다. 리덩후이 자신도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리덩후이(좌)와 장징궈(우). 장징궈는 대만 본토화와 민주화의 일환으로 대만 출신의 농업경제학자 리덩후이를 발탁했다. 장징궈의 신임 하에 리덩후이는 정무위원, 타이베이 시장 등 요직을 거쳐 1984년 부총통이 됐다.

미국이 주목한 인물은 하오보춘(郝柏村)이었다.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포병과 12기로 졸업·임관한 하오보춘은 군부 강경파의 대표였다.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절대 신임하에 방위 최일선인 진먼(金門)섬 주둔 사단장, 총통부 시위장(侍衛長·경호실장), 육군 총사령(참모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며 일급상장(一級上將·대장)으로 진급하여 1981년 참모총장(합참의장)에 임명됐다. 하오보춘은 국가중산과학연구원 원장을 겸하며 핵무기 개발 계획도 책임졌다.

하오보춘은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미국은 하오보춘의 이런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만약 장징궈가 사망할 경우 군권에 이어 핵 무기 통제권까지 하오보춘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참모총장 시절 하오보춘. 대만 보수파 군인으로서 장징궈 총통 재임기인 1981년 참모총장(합참의장)으로 임명되어 1989년까지 재임하며 ‘영원한 참모총장’으로 불렸다.

하오보춘이 공격적으로 핵 무기 개발을 추진한 원인은 안보 문제였다. 당시 대만 군부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버틸 수 있는 기간을 최단 3개월에서 최장 6개월로 전망했다. 1986년 4월, 하오보춘은 원자력연구소 임원들도 참석한 회의에서 “3개월에서 6개월 이내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추라.”고 지시했다. 실제 당시 대만은 3~5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그 무렵 대만은 핵 연로 재처리 시설도 완공했다. 1983년 시작된 건설 프로젝트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한 핵 연료를 재처리하여 무기화를 위한 시설이었다. 미국 정보 당국은 이 시설은 연간 10~20kg 상당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대만은 재처리 시설을 국제원자력기구에 신고하지 않았다.

핵 무기화의 관건인 탄두 설계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장셴이는 1987년 대만은 핵탄두 설계를 거의 마무리했다고 증언했다. 핵탄두 지름은 약 60~70cm였으며 무게는 900kg에 달했다.

다음 문제는 핵 소형화 기술이었다. 전폭기나 탄도 미사일에 핵 탄두를 탑재하기 위해서는 탄두 지름을 약 50cm까지 줄여야만 했다. 대만은 당시 소형화와 운반체계 확보 작업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당시 대만 군부의 최종 과제는 핵 무기를 1000km가량 운반할 수 있는 운반체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국 본토 주요 도시를 타격하기 위해 필요한 거리였다. 대만은 1970년대부터 탄도미사일 개발에 나섰으나 미국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하오보춘은 1984년 9월 30일 자 자신의 일기에 불편한 심기를 기록했다. 그는 “미국은 우리의 미사일 개발이 핵무기 개발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을 수 있다. 미국은 대만의 지대지(地對地) 미사일 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적었다.

아울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2년 대만에 F-16 등 고성능 전투기를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대만 국산방위전투기 징궈호. 징궈호라는 명칭은 장징궈 전 총통에서 유래했다.

대만은 국산방위전투기(IDF) 사업을 시작해 자체적으로 전투기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대만이 F-16과 같은 전투기를 구입하는 것은 막았지만 미국 회사들이 기술을 지원하거나 대만이 자체적으로 개발에 나서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IDF의 첫 시제품은 1988년 12월, 공개됐다. 장징궈(蔣經國) 총통의 이름을 따 ‘징궈(經國)호’라는 이름이 붙는다. 징궈호는 1992년 생산됐고 1994년부터 대만 공군에서 실전 운용됐다.

결과적으로 1980년대 후반 대만은 실전 배치가 가능한 핵 무기와 운반체계를 확보했다. 이 속에서 군 통수권자 장징궈 총통의 건강은 악화됐고, 유고 시 핵무기는 군부 강경파 손에 쥐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