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에 속지 말자…자유주의 시장경제 위협” 한국서도 저항 목소리

이윤정
2023년 09월 11일 오전 8:21 업데이트: 2023년 09월 11일 오전 9:11

ESG(환경·사회적책임·지배구조)가 ‘기후변화의 시대에 지속가능한 투자를 위한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최근 미국에서는 여러 주가 Anti-ESG를 입법화하는 등 상승세가 한풀 꺾이는 추세다. 기후 위기 공포에 기반한 ESG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위협한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에서도 ESG에 저항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경총 “국내 ESG 공시 의무화 시기 늦춰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오는 2025년으로 예정된 기업의 ESG 공시 의무화 시기를 더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총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의견서를 금융위원회에 제출했다고 10일 밝혔다.

경총은 국제회계기준(IFRS) 공시기준에서 탄소 배출량 측정 범위가 너무 넓고 적용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아 의무화 시기를 미뤄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 한국경영자총협회 제공

앞서 IFRS 재단 산하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지난 6월 IFRS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으로 일반 요구사항(S1) 및 기후 관련 요구사항(S2)에 대한 공시기준 등을 확정했다. S1·S2는 내년 1월 1일부터 적용되며 의무 공시는 유예 기간을 거쳐 2025년부터 시작된다. 다만 실제 시행 여부는 각국 정부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금융위원회가 해당 기준 적용과 공시 의무화 일정을 담은 국내 ESG 정보 공시 로드맵을 연내 발표할 예정이다. 2025년부터 자산 2조 원 이상인 유가증권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ISSB의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을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경총은 기업들이 IFRS 공시기준에 부합하는 원천 데이터를 전 세계 사업장에서 주기적으로 집계·검증할 전사 시스템 구축까지 최소 3~4년 이상이 소요된다는 점도 공시 시기 재조정의 이유로 꼽았다.

아울러 IFRS 공시 기준이 기업의 자회사뿐 아니라 실질적 지배력이 없는 지분법 대상 기업들의 탄소 배출량까지 공시하도록 한 점을 들어 주로 인도, 동남아시아 등에 공급망을 구축한 국내 기업들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했다. 인프라가 취약한 현지에서 신뢰성 있는 데이터를 집계하기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국내 탄소 배출 검·인증 시장이 향후 폭발적 수요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협소한 상황인 점과 열악한 재생에너지 조달 여건 등도 공시 시기를 늦춰야 하는 이유로 제시됐다.

“기후 위기 내세워 기업활동 통제”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의미한다. 기업 등에 대해 투자를 결정할 때 ESG 지표를 고려할 정도로 ESG는 트렌드가 됐지만, 최근 미국에선 ESG 운동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박석순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명예교수(전 국립환경과학원 원장)는 “ESG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비판적 사상에서 출발했다”며 기후 위기라는 가공의 재앙을 내세워 기업 활동과 시장경제를 통제하려는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지난 5월 11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ESG 바로 알기’ 포럼에서 “2050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온실가스 배출 제한 목표를 위해 지금까지 환경법과 규제를 통해 정부가 관리해 오던 항목을 기업 가치로 평가해 주식이나 금융거래에까지 영향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ESG는 1972년 설립된 유엔환경계획(UNEP)의 우려와 당시 만연했던 사회 생태주의(Social Ecology)와 맥을 같이한다. 사회 생태주의는 1960~70년대 화학물질 공포, 지구 냉각화, 인구 급증, 식량 부족, 자원 고갈 등으로 인류가 대재앙에 직면할 것이라고 했던 환경 종말론으로 주목받았던 이념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는 오히려 환경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경제성장을 통한 재원이 마련되면서 선진산업국을 중심으로 환경이 회복되는 유턴 현상을 경험하게 됐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이 시기 나타난 현상이 지구온난화였고, 유엔은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를 설립해 산업 문명의 원동력이 됐던 화석연료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원인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박 교수는 “최근 미국에서는 기후 위기 공포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ESG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제도라는 이유로 여러 주가 Anti-ESG를 입법화하고 기업들이 이주하면서 상승하던 기세가 꺾이는 추세”라고 말했다.

Anti-ESG를 입법화한 주(좌), 캘리포니아주를 떠난 기업들(우) | 박석순 교수 제공

다만 캘리포니아에선 ESG로 인해 주를 떠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지난해 9월, 40개 이상의 기후 관련 법안에 서명했다. 새로운 법은 시추 작업으로 인해 주민들에게 방해가 되는 소음과 빛, 유정, 저장 탱크의 독성 가스 방출 등 모든 것에 제한을 강화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텍사스에 버금가는 원유 매장지로, 화석연료 및 석유산업계 사업자들이 많은 곳이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텍사스나 플로리다와 같이 Anti-ESG를 입법화하거나 ESG를 완화하는 조치를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아울러 “유엔기후변화협약을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온실가스 과잉 감축을 약속하지 말고, 과학적 사실을 검토하여 국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기업들, ESG 반드시 폐기해야”

‘ESG에 속지 말자’ 주제로 발표에 나선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ESG는 현재의 시장경제가 잘못돼 있고 특히 기업의 지배구조가 그러한 잘못된 반(反)사회적 가치를 만들거나 사회적 가치를 충분히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실패하고 있다 ▲기업의 이익 추구가 사악하고 기업에 도덕과 윤리적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기업이 생산하는 가치를 사회 전체가 나누어야 한다. 기업이 공통의 선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기업의 지배구조가 ‘주주(Shareholder) 중심주의’에서 ‘이해관계자(Stakeholder) 중심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SG 투자’로도 불리는 ‘깨어난(woke) 자본주의’는 주주뿐 아니라 고객, 근로자, 거래 기업,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가 기업 활동에서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상과 같다”면서 “인간의 이해 추구나 행동 원칙은 무시하고, 전체의 번영을 위해 각자가 최선으로 기여하고 그 결과를 향유하면 번영된 사회가 된다는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이해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경제는 제로섬(zero sum)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ESG는 기업의 성과를 저하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ESG는 수많은 것들을 사회적 가치라고 칭하지만, 수익 창출의 입장에서 보면 제약 요인들”이라고 말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정부의 개입 여지를 크게 확대한다”는 이 교수는 최근 미국의 바이든 정부의 일련의 경제정책과 법률들이 모두 ESG를 반영하고 대기업들에 보조금을 살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사례로 언급했다.

그는 “모든 규제의 고비용은 대기업에 유리하다. 중소기업은 규제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따라서 ESG는 정부와 결탁하는 대기업들의 카르텔에 합류하는 허가제도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ESG는 기업들이 반드시 폐기해야 하는 ‘깨어난 자본주의’의 위험한 도구”라고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