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 레이건, 트럼프 그리고 악(惡)에 대한 통찰력

더스틴 바스
2020년 05월 21일 오후 4:25 업데이트: 2020년 05월 21일 오후 5:30

어떤 민주주의 국가들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오간다.

한쪽에만 치우친 정책은 오래갈 수 없다. 이때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지는 선거와 의회제도를 통해 탐색해간다.

이상주의자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고 현실주의자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 똑같은 유리잔을 보고 전자는 “아직 반이나 찼네” 하며 희망을 갖지만, 후자는 “벌써 반이나 비었군” 하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진다.

우리 사회는 둘 다 필요하지만, 만약 유리잔에 가득 찬 것이 죄다 나쁜 것뿐이라면, 그때는 국가에 현실주의적인 시각이 필요할 때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20세기의 위대한 현실주의자였다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들은 창조주로부터 ‘악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대립을 꺼렸지만, 이들은 맞서서 말할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윈스턴 처칠

1919년 처칠은 당시 많은 이들처럼 ‘볼셰비즘’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었다.

처칠이 다른 이들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권력을 가진 위치에서 공개석상에서 볼셰비키당에 대해서 말하는 능력이었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 특히 ‘세계적인 사악함’에 대한 발언은 정확한 워딩으로 듣는 사람의 뇌리에 콕콕 박히곤 했다.

파리 강화회담 동안 처칠은 볼셰비즘을 “질병, 역병”으로, 볼셰비키당을 “실패자, 범죄자, 환자, 비상식적인 사람들과 미친 사람들의 연합”이라고 불렀다.

처칠은 같은 해 11월 6일 망명 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귀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에 대해서도 생생한 묘사를 남겼다.

“독일인들은 레닌을 러시아로 보내버렸다. 장티푸스나 콜레라균이 담긴 병을 대도시의 상수도에 부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처칠은 레닌을 개인적으로 거의 사이코패스처럼 묘사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용어가 없었지만 말이다.

“무자비한 복수심은 차가운 동정심에서 솟아오른다. 겉모습은 평온하며 센스 있고 사무적이면서 유머 감각을 지녔다. 그의 무기는 논리다. 그 기질과 기회주의자적 면모, 북극해처럼 차갑고 넓은 연민, 교수대에 오른 사형수의 올가미처럼 팽팽한 증오, 세계 구원이라는 목적성과 그 파멸적인 수단.”

“절대적인 원칙을 내세우지만, 언제든 바꿀 준비가 돼 있다. 살인과 학습에 능하고,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생각하는 성격. 흉악함과 박애 그러나 좋은 남편이자 상냥한 손님, 행복감, 집안일을 돕거나 아기를 돌봐줄 것처럼 믿게 만드는 전기작가들, 꿩사냥을 즐기듯 하는 황제 도살자.”

주변국 정부와 언론이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위협 앞에 전쟁 대신 평화를 선택하며 침묵을 지킬 때도 처칠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 일부 언론의 ‘이상주의’는 오늘날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1935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독일 재군비를 선언하자, 그해 5월 영국 월간지 ‘스트랜드 매거진’의 편집자 리브 쇼는 “역사는 히틀러를 괴물 혹은 영웅으로 말할 것”이라고 했다.

리브 쇼는 “아직 이야기의 결말이 나지 않았기에, 히틀러가 저지른 일과 어두운 면을 다루더라도 우리는 결코 밝은 면,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썼다. 히틀러에게 끝까지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3년 후, 이상주의자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뮌헨으로 가서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나 ‘뮌헨 협정’을 맺고 귀국해 이렇게 말했다.

“친애하는 국민들이여, 영국 역사상 두 번째로 총리가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소. 이제 평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소. …… 집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맘 편히 주무시길.”

그러나 1년 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몇 달 만에 독일에 점령당할 위기에 몰렸다. 영국인들은 이상주의자 체임벌린을 쫓아내고 현실주의자에 희망을 걸게 됐다.

로널드 레이건

독일과 일본의 몰락은 소련과 붉은 중국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국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년 뒤인 1946년 모스크바에 머물던 소련 주재 미국 대리대사 조지 캐넌은 8천 단어에 이르는 ‘긴 전문’(long telegram)을 워싱턴으로 보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소련 봉쇄정책 시발점이 됐다.

한 달 뒤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미주리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연설했다.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이었다.

“발트해의 슈체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쳐졌다. …… 대전 때 만나본 러시아와 동맹국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는 확신하게 됐다. 그들은 강함을 가장 숭배하고 군사적 약점을 가장 얕잡아 본다.”

철의 장막이란 표현은 19세기부터 사용됐지만, 냉전의 상징으로 사용한 건 처칠이 대표적이다.

처칠의 충고는 사실로 판명됐다. 1950년까지 미국은 군사력을 2차대전 종전 당시의 10% 수준으로 대규모 감축했다. 이는 한국전쟁에 치명적이었다. 뮌헨 협정을 맺은 체임벌린 총리처럼 섣불리 “평화의 시대”라고 선언해버렸다.

소련에 대한 미국의 봉쇄정책은 트루먼 이후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행정부를 거치면서 점점 약화됐다.

베트남 전쟁에 관한 판단실수에 따른 피로감에 이상주의자였던 카터 당시 대통령은 궁극의 이상주의를 수용하게 됐다. 바로 사회주의다. 이러한 무른 대응은 추후 미국에 비싼 대가로 돌아왔다. 특히 혁명수출에 힘썼던 이란과의 외교관계가 그랬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국외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까지 정확히 지적한 현실주의자였다.

레이건은 1964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위한 찬조연설인 ‘선택의 시간’(A Time for Choosing)에서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 인류가 마주했던 것 중 가장 위험한 적과 전쟁 중입니다. 우리가 그 전쟁에서 패배하면, 그래서 우리의 자유를 잃는다면, 역사는 우리를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할 일은 다 했지만 그걸 막는 일은 거의 한 게 없는 사람들이라고.”

이날 연설은 16년 뒤, 이상주의자들이 가장 미워하게 되는 대통령을 탄생하게 한 명연설로 남았다.

레이건은 소련에 대해서도 주저 없이 말했다.

1983년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복음주의 기독교협회 전국대회에서 레이건은 공산주의자들을 “현 세계에서 악의 중심”으로 규정하고, 소련을 “악의 제국(The Evil Empire)”이라고 불렀다.

그는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 있다면, 우리의 적에 대한 순진한 유화 정책이나 희망적 사고는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걸어온 과거에 대한 배신이자 자유에 대한 낭비”라고 했다.

같은 해 9월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군 요격기에 격추돼 탑승하고 있던 269명이 사망하자, 레이건은 해당 사건과 소련 정권에 대한 비난을 강화했다.

레이건은 “개인의 권리와 인간의 삶의 가치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다른 나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지배하려는 사회에서 비롯된 야만적 행위”라면서 “그런 비인간적 만행에 놀랄 필요 없다”며 마음을 굳게 먹을 것을 당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했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레이건과 함께 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와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다. 그가 없었다면 레이건의 노력은 효과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7년 6월 서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이 장벽을 무너뜨립시다”라고 한 레이건의 연설은 그 어떤 지도자의 연설보다 강력하고 상징적이었다.

연설은 희망과 자유에 대해 말하면서 호전적이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또한 소련을 겨냥했지만, 나머지 세계에는 초대장이 됐다.

수십 년 동안, 미국과 소련은 서로 가장 나쁜 면만을 봤다. 그러나 레이건은 소련 지도부에 이상적인 생각을 심으려 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미국을 의심의 눈초리가 아닌 희망이 담긴 시선으로 보기를 바랐다.

흥미로운 점은 연설의 가장 묵직한 부분이 결론부가 아니라 중간이라는 것이다.

베를린 장벽을 등진 채 연설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만약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동유럽의 번영과 자유를 원한다면, 이 문으로 오시오.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문을 여시오. 그리고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했다.

2년 후, 베를린 장벽은 실제로 허물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레이건이 베를린 장벽에서 연설한 그 해에 도널드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을 출판했다.

소련이 붕괴하자, 중국이 부상했다. 주변국,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은 국경 밖까지 확장됐고, 중국을 대적할 국가는 없었다.

정보기관은 중국의 위협을 경고했지만, 지도자들은 느슨한 태도를 유지했다.

2017년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국제질서를 어지럽히고 인권을 탄압하는 정권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유엔 연설에서 이란을 “사람을 죽이려 든다”고 비난했고, 북한을 “타락한”이라고 압박했다.

트럼프는 유엔에서 만약 미국이나 동맹국이 위협받는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한 “로켓맨(김정은)이 자신과 독재 정권을 위해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 정권을 “민주주의로 위장한 부패한 독재 정권”이라고 비난하고 이란 핵 협정에서 탈퇴했다. 시리아와 아사드 정권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비난에 그치지 않았고, 어떤 형태로든 군사적 행동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미국 내 목소리가 다소 엇갈린다. 트럼프는 중국 내 인권상황에 대한 실망감을 인권탄압국이 차지하고 있는 유엔 인권이사회(UNHRC)를 향해 표출했다. 중국은 국가의 규모나 발전 정도에 비해 인권상황이 매우 열악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중국을 유리잔으로 비유한다면, 자유세계 국가의 지도자에게는 기대할 만한 국가일까, 아니면 의구심을 품게 하는 국가일까. 대통령의 시선은 초기에는 전자에 가까웠지만, 신종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계속해왔다. 트럼프의 신념대로 경제보복으로 중국과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모든 지도자에게는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정복했고 누군가는 실패했으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물론, 중국 공산당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악이다.

중요한 건 트럼프가 체임벌린이나 카터 같은 이상주의자냐 아니냐가 아니다. 그가 처칠이나 레이건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느냐다.

 

기자 출신의 더스틴 바스(Dustin Bass)는 기업가 겸 작가다. 역사에 관한 팟캐스트 ‘역사의 아이들’(The Sons of History)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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