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어디갔나…달라진 中 지도부, 재난 상황서 모습 실종

강우찬
2023년 08월 17일 오후 1:50 업데이트: 2023년 08월 17일 오후 3:33

시진핑, 홍수 한창이던 1일 ‘중요지시’ 외에 별 언급 없어
리커창과 함께 현장 찾았던 2020년 충칭 홍수 때와 대비
민심 수습하는 연출조차 ‘생략’…“내부 권력쟁탈” 관측도

이달 초 중국 베이징과 인근에는 5호 태풍 ‘독수리’의 영향으로 140년 만에 최악의 폭우가 쏟아졌다.

여기에 베이징 침수를 우려한 당국의 댐 방류로 하류와 주변 지역에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면서 공식적으로만 100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5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시진핑 공산당 총서기의 수습 조치는 관영매체를 통해 몇 차례 ‘중요 지시’를 내리는 데 그쳤다.

신화사는 1일 “시 주석이 홍수 예방 및 구호와 관련한 중요 지시를 통해 인명 피해 발생”을 지적하며 실종자 수색과 이재민 지원, 교통과 전력 시설 등의 신속한 복구를 촉구했다고 전했다.

이후 일주일이 넘도록 시진핑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의 홍수 관련 행보는 보도되지 않았고, 8일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시 주석이 여러 차례 중요 지시를 내리고 직접 배치하고 지휘했다”는 리창 국무원 총리의 발언이 기사화됐다.

리창 총리도 현장을 찾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홍수 현장에 모습을 나타낸 고위 관리는 수자원 관리를 담당하는 장궈칭(張國淸·59) 국무원 부총리뿐이다.

인민일보는 이날 “시 주석이 장궈칭 국무원 부총리를 허베이와 톈진의 재난 구호 전선에 파견해 긴급 복구와 이재민의 생활 지원 업무를 지도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이는 2020년 충칭 홍수 때 시진핑과 리커창 당시 총리가 함께 수해 현장을 방문하고 2021년 허난성 정저우 홍수 현장에는 리커창이 내려가 구호 작업을 둘러보고 이재민을 만난 것과는 대조된다.

시진핑(왼쪽 네번째) 중국 국가주석이 31일 인민해방군 상장 진급식에 참석한 모습. 2023.7.31. | 중국 중앙(CC)TV 화면 캡처

사라진 당 지도부…후진타오 시절과 명확한 대비

중국 전문가들과 반체제 인사들은 이번 홍수로 중국 공산당 당국의 재난 관리체제에 큰 허점을 노출했다고 지적한다.

평론가 리닝(李寧)은 이번 북부지역 재난 현장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도자의 실종’을 들었다.

그는 “후진타오-원자바오 시절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중대한 재해나 위험이 발생할 때마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친민슈(親民秀·민중과 친밀한 모습)’를 연출하며 시늉에 그칠지언정 현장에서 상황 수습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런데 이번 북부 지방 홍수 때는 공산당 최고 권력 집단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아무도 현장을 찾지 않았다”며 “시진핑은 지난달 31일 베이징에서 열린 인민해방군 상장(대장) 진급식에만 참석했을 뿐 홍수 기간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인민일보의 움직임도 눈길을 끈다.

인민일보는 홍수 상황이 가장 심각했던 지난달 31일부터 이달 4일까지 홍수에 관한 기사를 단 2편만 지면에 게재했다. 지난 2일 전날 시진핑의 지시에 따라 리창 총리 주재로 열린 상무회의와 같은 날 4면에 작은 박스기사로 낸 홍수 소식이 전부였다.

(AP=연합뉴스) 지난 2일 홍수로 잠긴 중국 허베이성 줘저우시. 2023.8.4. | AP/연합

수해 기간과 겹친 공산당 전·현직 간부들의 집단 휴가

묘연했던 시진핑의 행방에 관해서는 지난 3일 신화통신 기사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이날 차이치(蔡奇·67) 중앙판공청 주임이 베이다이허에서 여름휴가 중인 중국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 57명을 방문했다. 공산당 서열 5위인 차이치 주임은 시진핑의 비서실장 역을 담당한다.

로이터통신은 이를 근거로 “중국 북부 지역 대부분이 물에 잠겼지만, (시진핑 등) 중국 최고 지도부가 이 해변 휴양지(베이다이허)로 휴가를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베이다이허는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300km 떨어진 해변 휴양지다. 중국 공산당 전·현직 간부와 그 가족들은 매년 7월 말이나 8월 초 이곳에서 집단으로 여름휴가를 보내며 주요 정책을 논한다. 파벌 간 정치적 거래와 타협이 이뤄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 회의와 기간이 겹치더라도 심각한 재난 상황에서 모습 한 번 비추지 않은 시진핑과 당 고위층의 행보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이 기간,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후진타오 등 전임 주석들이 재해 현장을 방문한 모습을 담은 영상과 사진을 올리며 시진핑과 비교하는 게시물이 다수 등장했다.

외신도 가세했다. 호주 ABC 중문판 등 일부 외신은 “북부지역에 물난리가 났는데 시진핑은 어디로 갔느냐”며 추궁하는 한편, 원자바오 전 총리가 심각한 얼굴로 재해 지역을 둘러보고 후진타오 전 주석이 구호품을 직접 나르는 사진을 싣기도 했다.

2008년 5월15일 원자바오 당시 중국 총리가 쓰촨성 남서부 칭촨현 지진 피해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신화통신/AP/연합

중국 법조계 출신으로 캐나다에서 활동 중인 중국 평론가 라이젠핑(賴建平)은 “시진핑은 집권 2기 들어서 피해 지역을 잘 시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라이젠핑은 “중국에는 어느 지역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바로 최고 지도부에 보고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시진핑을 비롯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7명 모두 즉각 홍수 관련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이들은 이에 대응할 능력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누구도 취해야 할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의욕의 문제다. 이재민들은 생활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지만, 지도부의 대응은 이러한 문제가 이들에게 시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논평했다.

중국 공산당의 간부 사관학교인 ‘중앙당교’의 기관지 ‘학습시보(學習時報)’ 전 부편집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덩위원은 호주 ABC와의 인터뷰에서 “시진핑이 현장에 가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덩위원은 “작년 정저우 대홍수 때도 시진핑은 현장에 가지 않았다”며 “그는 자신을 지존으로 여기고 그의 전임자들처럼 현장에 나가는 대신 전반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분석했다. 현장이 아니라 중앙에서 장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라이젠핑은 에포크타임스에 “공산당 정권은 늘 독재 유지를 최우선으로 해 왔다. 지금 이들이 가장 몰두하고 있는 것은 권력과 이익 쟁탈 그리고 미국 등 전 세계와의 대결, 중국 내 민주주의 요구 억압, 대만해협에서 벌어질 전쟁에 관한 계산일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