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인권 운동 상징 투투 대주교 타계…전 세계 애도 물결

이윤정
2021년 12월 27일 오후 8:56 업데이트: 2022년 05월 31일 오후 1:37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남아공 민주화 상징
‘아파르트헤이트’ 맞서 투쟁…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
최초 흑인 대주교, 인종 간 화합 힘써…부패 정권에 저항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인권 운동의 큰 별이 졌다.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Desmond Mpilo Tutu) 남아프리카공화국 성공회(Anglican Church of South Africa) 대주교가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7년부터 투병해 오던 전립선암 악화가 사인이었다.

투투 대주교는 흑인 자유 투쟁, 남아공 민주화, 아프리카 인권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더불어 남아공 백인 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흑인 차별·분리 정책)’에 맞서 투쟁했다. 그 공로로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12월 26일 성명을 내고 투투 대주교의 선종(善終) 소식을 알렸다. 시릴 대통령은 “그의 죽음은 남아공을 해방하고 이를 물려준 세대와의 이별이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폐해에 대한 보편적 분노를 분명히했으며, 공동체·화해·용서의 의미와 깊이를 몸소 보여줬다”며 그의 선종을 애도했다.

투투 대주교는 1931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투투는 1960년, 29세에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영국 런던 킹스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귀국해 1975년 요하네스버그 대성당 주임 사제(dean)로 봉직하다 레소토교구 주교(Bishop)로 승품했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는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흑인차별 반대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84년,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2년 뒤인 1986년, 케이프타운 대주교(Archbishop)로 서품됐다. 남아공 성공회 최초로 흑인 대주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투투 대주교는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과 함께 남아공 민주화 및 흑인 자유 투쟁의 양대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무너지고 1994년 넬슨 만델라가 최초 흑인 대통령이 됐을 당시 복수보다는 진실 규명을 전제로 한 용서와 화합을 주창했다.

투투 대주교는 ‘용서 없이 미래 없다’는 구호를 앞세운 ‘진실·화해위원회(TRC)’를 구성하고 위원장을 맡아 흑백 갈등 봉합에 나섰다. 원한, 차별 없는 인종 간 화합을 호소하며 남아공에 ‘무지개 국가’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모두 함께 살아가는 다인종 사회를 강조한 제안이었다.

투투 대주교는 1996년 성공회 대주교직 은퇴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부정부패에 맞서 싸웠다. 국정농단으로 하야한 제이컵 주마 전 남아공 대통령(2009~2018년 재임)의 부패와 비리 문제에도 날을 세웠다. 데스몬드 투투 평화재단을 창설해 국내외 현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분쟁 지역, 빈곤층, 동성애 등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 보호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투투 대주교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자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프란치스코 로마 가톨릭 교황 등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추모에 동참하며 애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케이프타운 곳곳은 보라색 물결로 뒤덮이고 있다. 보라색은 투투 대주교의 성공회 사제복 색깔이다.

넬슨 만델라 재단은 같은 날 성명을 내고 “투투 대주교는 특별한 사람이고, 사상가이자 목자이자 지도자이다. 남아공과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그의 삶은 축복이었다”라며 추모했다.

투투 대주교 관련 국내 서적으로는 ‘용서 없이 미래 없다(홍종락 역, 홍성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