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 ‘포퓰리스트’ 넘어 진정한 대중 정치인으로…아르헨 새 대통령

인플레이션, 부패, 9번째 채무불이행...좌파 정치의 파행에 휘둘려 온 아르헨티나인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마르코스 쇼트게스
2023년 11월 23일 오후 4:30 업데이트: 2023년 11월 24일 오후 3:27

“오늘은 모든 선량한 국민에게 좋은 날이다. 국가 재건이 시작됐다.”

19일 결선 투표 끝에 역전승을 거두며 아르헨티나 새 대통령이 확정된 경제학자 하비에르 밀레이의 당선 연설에서 이렇게 말하자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는 자유를 외치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중앙은행 폐지 등 파격적인 정책 제안으로 ‘아르헨티나의 트럼프’으로 불리는 밀레이 당선인은 예상을 뒤엎고 결선투표에서 55.7%의 득표율로 11%포인트 격차의 승리를 거뒀다.

그는 물가 상승과 정치 부패에 대해 과감한 개혁을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다만, 비대한 관료조직, 정치판 뒤흔들기에 능숙한 야당 길들이기라는 과제가 눈앞에 놓여 있다.

1970년대까지 세계 10대 부국이었으나 좌파 포퓰리즘이 판을 치면서 경제가 몰락한 아르헨티나에서 이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극단적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로까지 평가되는 밀레이 정권의 출범은 아르헨티나는 물론 좌파 정권이 많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밀레이 정권의 최대 과제는 오랜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 문제를 안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가에 있다.

2023년 11월 16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에서 열린 결선투표 전 집회에서 지지자들이 전기톱을 든 하비에르 밀레이의 조형물을 들고 있다. | Tomas Cuesta/Getty Images

‘영향력 있는 인물 1위’에 오른 경제학자

20여 년간 대학에서 수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던 밀레이는 2010년대에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해 2019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됐다.

2020년에 신당을 창당하고 2021년에는 아르헨티나 국가의회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이번 대선 승리로 하원의원 당선 2년 만에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밀레이 당선인은 거침없는 언행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동시에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초선의원 신분으로 대담하게 대선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특기인 음악과 스포츠 경험을 살려 아르헨티나의 열정적인 국민성에 호소하며 자신의 정치 이념을 알렸다.

그의 대선 공약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국민을 괴롭히는 인플레이션 해소와 기득권 해체다.

미국 마이애미에 본사를 둔 ‘팬암 포스트’의 정치 분석가 로데릭 나바로는 밀레이의 공약을 분석한 후 “아르헨티나를 미래의 세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나바로는 “그는 포퓰리스트가 아니라 정말 대중적인 지도자가 됐다. 아르헨티나의 쇠퇴의 시대를 끝내고 번영, 안전, 양심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서막을 열었다”고 극찬했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투표소. | ALEJANDRO PAGNI/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인플레 대책으로 달러화 도입, 정부부처 수 절반으로

아르헨티나의 전년 대비 인플레이션율은 선거 기간 동안 142%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했다.

중앙은행의 분석가들은 연말까지 185%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측한다.. 외화보유고가 부족하고 국민들의 페소화에 대한 신뢰가 급락하는 상황에서도 연방정부는 지출 과잉에 따른 재정난에 빠져 있다.

밀레이가 제시한 대책은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중앙은행을 폐지하고 미국 달러를 화폐로 도입해 인플레이션 해소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가상화폐 ‘비트코인’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밀레이 당선 이후 비트코인은 페소화 대비 급등했다.

또한 재정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연방정부 부처 숫자를 현행 19개에서 절반인 8개로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사라지는 11개 부처에는 환경-지속가능개발부, 여성-젠더-다양성부, 교육부 등이 포함됐다. 다만, 정부의 근간이 되는 내무부, 외무부, 국방부는 유지한다.

밀레이 당선인은 교육부를 “세뇌부”라 부르고 교육부가 10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포괄적 성교육’을 “세뇌”라고 부르며 강력하게 비판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밀레이 당선인의 앞날이 만만치는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라틴 아메리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사회주의 이념인 ‘카스트로 차비즘’의 강한 반발에 직면할 것으로 보고 있다.

볼리비아의 전 국방부 장관이자 비영리단체 ‘민주주의를 위한 미주 연구소’ 대표인 카를로스 산체스 벨레자인은 에포크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좋은 정부가 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비(非)사회주의 대통령의 실패가 계속되고 있다. 좌파에서 우파로의 변화는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됐지만, 카스트로-차비즘 역시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된 바 있다”며 “21세기 사회주의의 패배 여부는 밀레이의 손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는 밀레이의 대선 승리가 전 세계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과 그에 동조하는 일부 진보좌파 진영에 충격을 주고 격렬한 반발을 일으키는 이유다.

한때 세계적 자원 부국,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르헨티나는 한때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강대국이었으며, 20세기 초에는 독일과 프랑스보다 더 부유했다. 파리에서는 ‘아르헨티나 사람처럼 부유하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좌파 정권에 의한 쇠퇴로 아르헨티나는 ‘실패의 대명사’가 되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의 “세계에는 4가지 종류의 국가만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그리고 일본과 아르헨티나”라고 비유했을 정도다. 일본은 자원이 부족하지만 근면한 국민성과 교육의 힘으로 초강대국이 된 ‘성공의 대명사’로 아르헨티나와 대조를 이뤘다.

아르헨티나의 정치는 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페론 전 대통령은 1946년부터 1955년, 그리고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통치한 포퓰리즘 독재자였다.

이번 대선의 좌파 후보로 역전패한 재무부 장관 세르히오 마사, 현 대통령이자 레임덕에 빠졌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역시 ‘페론주의자’로 불리며 철저히 페론 전 대통령의 뒤를 따랐다.

사회주의 정권의 메카로 불리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현재 좌파 정권이 들어서지 않은 나라는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3개국뿐이다. 밀레이 정권의 탄생은 지역 내 좌파 정권에 긴장감을 줄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3차례 당선된 후안 도밍고 페론과 그의 아내 에바가 그려진 깃발을 흔들고 있는 여성 | EITAN ABRAMOVICH/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밀레이 당선인은 반공주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는 거래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 러시아, 그리고 좌파 정권이 들어선 룰라 대통령의 브라질을 지목하고 있다.

선거기간, 밀레이 당선인은 전 폭스뉴스 앵커 출신 터커 칼슨과의 독점 인터뷰에서 “우리는 (남미)대륙의 도덕적 길잡이가 되고 싶다. 자유, 민주주의, 다양성, 평화의 수호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와 어떤 행동도 추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밀레이의 소속 정당인 ‘라 리베르타트 아반사(La Libertad Avanza)’는 자유 전진이라는 의미이며, “국민들이 1900년 초의 풍요로움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발전을 지원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를 수십 년간 사로잡은 페론주의는 노동자 임금 인상, 현금성 보조금 지급, 복지·공공지출 확대, 산업 국유화 등으로 나타났다. 그사이 아르헨티나의 풍요로움은 연이은 채무불이행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으로 대체됐다.

남미 ‘좌파 물결’ 뒤집어…트럼프 전 대통령은 축전

밀레이의 승리는 좌파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온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흐름을 뒤집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나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탄생에 비유하는 소셜미디어 게시물이 안팎으로 퍼지고 있다.

실제로도 두 사람은 밀레이의 당선을 반겼다.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에서 “너무 자랑스럽다”며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 것”이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2023년 11월 20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한 남성이 신문을 읽고 있다. 1면에는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의 사진이 실렸다. | LUIS ROBAYO/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보우소나루 역시 선거 다음 날 아침 미레이와 전화 통화하는 영상을 소셜미디어 엑스(X·구 트위터)에 올렸다. 영상에서 보우소나루는 “당신의 일은 아르헨티나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레이는 12월 10일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한다. 보도에 따르면 보르소나루는 취임식에 초대받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