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4) -법제를 통일하다

2016년 7월 27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13일

5. 화폐 및 도량형을 통일하다

전국 시대에는 각국의 문자와 화폐, 도량형이 제각기 달랐다. 제나라와 연나라 등 국가에서는 도폐(刀幣)를 발행했고,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등 국가에서는 삽 모양의 지폐가 통용되었으며 진나라와 동주에서는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원형 동전이 유통되었으나 초나라에서는 조개 화폐가 사용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적으로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원형 동전을 발행해 사용하도록 하고 거북이 등껍질, 조개, 옥 등으로 만든 6국 각자의 화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전국적으로 통일해서 금, 동으로 만든 원형 화폐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그중 금으로 만든 화폐는 상폐(上幣), 동으로 만든 화폐는 하폐였다. 이런 동전들은 2천여 년이 지난 청나라 때까지도 사용되었다.

도량형은 화폐(교환수단)과 함께 국가의 세수와 관련된 중요한 요소다. 도량형의 도(度)는 길이, 양(量)은 용적, 형(衡)은 중량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은 7개국의 도량형이 제각각이었다. 나라마다 사용하는 길이의 단위와 양을 제는 도구의 크기와 단위도 달라 상품 교역과 세금 부과에 혼선을 피할 수 없었다.

진시황은 명령을 내려 전국적으로 금, 동으로 만든 원형 화폐를 통일해서 사용하도록 했다. 그중 금으로 만든 화폐는 상폐(上幣), 동으로 만든 화폐는 하(下)폐였다. 이런 동전들은 2천여 년이 지난 청나라 때까지도 사용되었다. | Fotolia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바로 직후 조령을 내려 진나라의 제도를 기준으로 도량형을 통일했다. 또한 길이·부피·무게의 단위를 십진제로 변경한 후 실제 바뀐 도량형을 사용하는지 정기감찰을 실시했다. 또한 관부의 책임 하에 각종 기구를 개선하거나 새로 제작해 전국에 배포, 사용하도록 했다. 수레바퀴 폭을 통일한 ‘거동궤(車同軌)’ 역시 이 같은 노력의 하나였다.

6. 문자를 통일후대를 이롭게 하다

‘문이재도(文以載道)’라는 말처럼 문자는 사람과 신(神) 사이의 소통에 이용된다. 상나라 갑골문 단계에 이르렀을 때 한자는 성숙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이르러 각 열국이 오랜 기간 분열된 후 같은 글자를 다르게 발음하는 현상이 늘어나 문자의 형태까지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 사람들 간의 문화적 교류에 지장이 생기고 서로 오해하는 일이 발생했으며 문화 역사를 정확히 기재하는 데도 지장이 있었다.

진권(秦權) 위에 새겨진 소전체. 이사(李斯)의 글씨로 추정되고 있다. | 위키피디아 커먼스

6국을 멸망시킨 후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는 한편으로 6국의 옛 문자를 폐지하도록 명령하고 정위(廷尉) 이사(李斯)로 하여금 문자 통일 사업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사는 원래 진나라 자체를 기초로 하여 자형이 일정하고 획수가 간단하며 쓰기 편리한 소전(小篆·진전[秦篆]이라고도 함)체를 표준 문자로 삼아 전국에 보급함으로써 ‘서동문(書同文)’을 실현했다. 소전체는 6국 문자의 우수한 부분을 취해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획 수가 간단하다는 특징을 갖추고 있어 보급하기 쉬웠다. 한편 민간에는 소전체보다도 한층 간단한 문자인 예서(隸書)가 유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 중국 문자의 전신이다.

문자 통일은 역사 문화가 정확히 보전되도록 함으로써 후대 사람들이 신전 문화와 정법(正法), 정리(正理)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 후손들을 이롭게 하였다. 후세에 ‘만불이 속세에 내려오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갈(萬佛臨凡·萬法歸一)’때가 오면 후대 사람들은 오해 없이 대법(大法)과 대도(大道)를 얻고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 인류의 마지막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7. 궁과 왕릉천문대를 건설하다

진시황은 인류 역사를 창조하고 중화 문화의 찬란함을 떨치고자 하늘의 궁전을 인간 세계로 옮겨옴으로써 유명한 아방궁(阿房宮)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란과 후세 사람들에 의한 파괴로 인해 끝내 준공되지 못했고 후세에 전해지지도 못했다.


청나라 원요(袁耀) <아방궁도(阿房宮圖)> |위키피디아 커먼스

청나라 원요(袁耀) <아방궁도> 12첩, 채색 견본, 높이 194.5cm, 가로폭 60.5cm, 베이징 고궁박물관 소장 | 위키피디아 커먼스한 왕조의 천자와 민중, 문화와 복식, 사회상과 특징은 모두 그 왕조에만 국한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성군과 훌륭한 임금들은 궁전, 왕릉, 지하 궁전들을 지어 당대의 가장 훌륭한 문화를 집대성한 후 지하에 매장, 해당 왕조의 문화적 성취를 보존하고자 했다. 이는 즉 각 왕조 및 각 왕조에 대응되는 천국 문화의 특징을 보존하는 것이기도 했다.

진시황 병마용 | 위키피디아

1974년 진시황 여산묘(驪山墓) 동쪽에서 발견된, 총면적 2만여㎡에 달하는 병마용에는 신장 1.8m 가량의 도자기 인형 7천여 개 및 실제 말 크기의 도자기 말 7백여 필, 전차 130승가량이 진열되어 있었다. 인류 문명의 보물이자 문화, 예술, 기술의 정수인 이들 유물은 2천여 년간 지하에 안전하게 잠자고 있었다. 현대인들은 병마용에 들어가 발굴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천여 년 전 후세인들 및 전 세계를 위해 이처럼 귀중한 유물을 남겨 준 진시황의 업적에 대해 감탄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진시황릉에 부장된 도제 마차 | Traumrune/위키피디아

하늘과 별을 관찰하는 것, 신의 계시를 얻는 것은 인류가 신을 믿고 경배하며 신령의 계시를 얻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방식이다. 고대 서적에서는 사람들이 하늘과 별을 관찰하고 점성술을 통해 인류의 변화와 길흉화복을 알고 각종 행위와 활동에 있어 참고로 삼았다.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3대 왕조 모두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를 다수 지었다. 수많은 지상 천문대는 천인합일의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늘 위의 별자리에 대응해 지어졌다. 천문대 가운데 다수는 신령들에게 제사 지내기 위한 용도의 제대(祭臺) 부근에 있었다.

진나라를 건립한 이후 진시황은 천문대를 진나라 전역으로 확대 보급했다. <한서 지리지>에서는 산시(陝西) 위린(榆林)을 ‘정림(楨林)’이라고 일컫고 있는데 ‘정(貞)’은 ‘정복(貞蔔)’, ‘성점(星占)’이라는 뜻으로, ‘정림’이라는 지명은 곧 천문대가 무척 많아 숲을 이룰 정도라는 의미다. 천문대 건설은 진 제국 시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진시황은 일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 332개(성수(星宿) 1424개)를 지면 위에 그대로 옮기고 흙을 다진 것으로 외곽선을 만들거나 흙을 깎아 토대(土臺)를 만들어 표시했다. 총 1424개에 달하는 원형 혹은 타원형 모양의 이들 토대는 2만8천㎡의 면적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진나라 당시 상군(上郡) 지역의 절반에 해당하는 천문대의 분포 범위는 동쪽으로는 황하, 서쪽으로는 장성, 남쪽으로는 수연하(秀延河) 하류, 북쪽으로는 우르도스 고원 동북부에 이르며 천문대의 수량이 무척 많다.

2008년 산시성 위린에서 발견된 진나라 천문대 유적은 그 윤곽이 여와보천(女媧補天·여와가 하늘을 보수하다)의 형상을 띠고 있다. 여와의 머리는 북쪽, 다리는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옆으로 기울인 몸과 높이 치켜든 머리, 팔을 구부려 평평하게 받치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보천(補天)하는 모습이다.

여와의 신장은 809진리(秦裏·진나라의 길이 단위, 1진리=0.42㎞)로 약 337㎞에 해당하며, 사타구니 폭은 365진리로 약 152㎞다. 여와의 신장은 곤륜산의 거대함을 상징하고, 사타구니 폭은 하늘 전체의 위도를 나타낸다. 키와 신체 각 치수를 합하면 구오지존(九五之尊)이 되는데 이는 여와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와 형상을 띠는 천문대는 아래쪽(남쪽)에서부터 위쪽(북쪽)으로 분포하며 총 아홉 가지 부분으로 나뉘는데 부분마다 약간씩 분포된 성수 혹은 성관(星官)은 각각 9층천(天)을 상징, ‘하늘은 9개 층이 있음(天有九層)’을 표현했다.

일부 중요한 천문대 옆에는 제성대(祭星臺)가 있다. 제성(帝星, 속칭 자미성, 작은곰자리 베타성)을 제사 지내는 제성대처럼 중요한 제성대의 경우 타원형을 띠며 그 장축은 1진리(420m)로 진시황 제성을 제사 지내는 데 사용되었다. 그 이전의 3대 왕조, 춘추전국시대 천문대에 비해 수백 배 큰 진나라 천문대는 최고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그 이전의 누구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수많은 체제적, 문화적 변혁을 완성하고, 다수의 거대하고도 세밀한 건축물을 건설한 것은 실로 비범하고도 위대한 업적이다. 만리장성, 아방궁, 여산묘 및 진나라 천문대 등 진나라적 특징이 가득한 건축물과 문물은 진시황 덕분에 인간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6국 합병 이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불과 11년간 진시황은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로 이처럼 거대한 업적을 완성, 이후 몇천 년간의 중국 역사에 기초를 다지고 훌륭한 시작을 이루었으니 후세인들은 진시황을 가리켜 ‘천고일제(千古一帝)’라 하였다.

8. 법도를 지침으로 삼고 법으로 교화하다

도가, 음양 이론에 도통했던 진시황은 역사상 일어났던 왕조 교체가 천체 운행 규율에 따른 변화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사기 진시황본기>에서는 “진시황은 종시오덕(終始五德)의 순서에 근거해 주나라는 화덕(火德)을 얻은 것이라 진나라가 주덕(周德)을 대체하면 주나라는 수덕(水德)으로 흥성하는 진을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그때가 수덕이 시작되는 시기임을 고려해 연호를 고치고 조정의 하례의식을 모두 10월 초하루로 변경했다. 또한 의복과 부절 및 깃발의 색깔을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숫자는 6을 기본적인 수로 설정해 부절과 법관은 모두 6촌, 수레의 길이는 6척으로 하고 6척을 1보로 규정해 수레 한 대는 여섯 마리의 말이 끌도록 정했다. 또한 황하를 ‘덕수’로 개칭, 수덕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음양가 추연(鄒衍)은 “수(水)가 장차 화(火)를 대체할 것”이라며 주나라의 덕이 이미 쇠하였으니 장차 수덕(水德)을 갖춘 제왕에 의해 천하가 통일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바 있다. 대(大) 진나라가 창건되기 오백 년 전 “옛날 진나라 문공이 사냥을 나가 흑룡을 잡았으니 이것이 그 수덕의 시작이었다.”(<사기 봉선기>). 즉 진나라가 수덕으로써 주나라(火)를 대체할 것이 이미 이때부터 드러난 것이다. 오행은 각각 다섯 가지 색상에 해당하고, 수는 검은색에 해당하기 때문에 진나라 왕조는 의복 및 깃발을 모두 검은색으로 하였다. 또한 오행 가운데 수는 숫자 6에 해당하므로 진나라 왕조의 기물 가운데는 6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 많았다.

국정 관리에 있어 법을 가르침으로 삼은 진시황은 법리를 이용해 국가를 관리했으며 ‘이리위사(以吏爲師: 관리가 스승처럼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것)’를 중시했다(<사기 진시황본기>). 그는 손수 법률을 제정하고 몸소 강법(講法)했다. ‘황제가 보위에 임하여 밝은 법을 만들고(<태산각석(泰山刻石)>)’ ‘법도를 공평하게 하여 만물의 기강을 잡으며(<낭야각석(瑯琊刻石>)’ ‘밝은 법을 널리 베풀고 천하를 다스리시니 영원토록 법칙이 되었다(<지부각석(之罘刻石)>)’. 진시황은 또한 엄격한 법률 제도 및 감시 체계를 완성해 백성들로 하여금 법률과 제도를 잘 알고 ‘이리위사’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리(吏)’란 법률을 잘 아는 관리들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진시황이 직접 제정한 리법(吏法)을 가리키기도 한다.

인류가 아직 도덕적이고 고상했던 상고 시대에는 국가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법률을 다수 제정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요임금의 사법관이었던 고요(皋陶)가 해치(獬豸: 해태)를 키우던 당시처럼 사람과 신이 공존하던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에는 죄과의 유무 판별을 해치에게 맡겨 옥사를 다스리도록 했기 때문에 해치를 가리켜 임법신수(任法神獸)라고도 했다. 이 신수(神獸)는 옥사를 재판하는 자리에서 죄가 있는 자를 향해 뿔을 움직여 보였으며 죄상이 심할 경우에는 심지어 죄인을 뿔로 받아 죽이기도 했으니 범죄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사’는 ‘퇴보사’이기도 해서, 인류의 도덕성이 나날이 떨어지고 신으로부터 점차 멀어진 인류가 더 이상 심법(心法)을 통해 스스로를 단속하지 못하게 되자 외재적인 규범, 즉 법률에 의존해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진나라가 세워졌을 당시 인류의 도덕성은 이미 상고시대 인류에 비할 바 없이 타락했다. 진시황은 대일통 국가체제를 건설, 신을 믿고 수련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는 한편 법률 체계를 제정해 국가를 관리했다.

1975년 12월 출토된 운몽진간(雲夢秦簡)에는 진나라 법률제도, 행정법규 등이 기록돼 있는데, 소전(秦篆)체로 씌어져 전국시대 말이나 진시황 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운몽진간은 죽간 총 1,155매로 이뤄졌으며 이중 80매는 훼손됐다. 내용은 크게 <진률18종(秦律十八種)>, <효률(效律)>, <진률잡초(秦律雜抄)>, <법률답문(法律答問)>, <봉진식(封診式)>, <편년기(編年記)>, <어서(語書)>, <위리지도(為吏之道)> 등 10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중 법률 부분에는 진나라에서 시행된 20여 가지 단행법규 조목들의 원문 총 600개가 기재되어 있다. 기재된 진나라 법률 형식에는 주로 율(律), 영(令), 식(式)이 있다. 영(令)은 또 제(制)나 조(詔)라고도 했는데, 제(制)는 특정 사건에 대한 황제의 비준을 가리킨다. 식(式)은 법률 문서 및 형식으로서 <위리지도>처럼 법률 문서의 구체적인 형식이나 법 집행자들에 대한 행정 관리제도와 법률문답 등이다.

그 가운데 진률 18종에는 전률(田律), 원률(苑律), 창률(倉律), 금포률(金布律), 관시률(關市律), 공률(工律), 균공(均工), 공인정(工人程), 요률(徭律), 사공(司空), 군작률(軍爵律), 치리률(置吏律), 효(效), 전식률(傳食律), 행(行), 내사(內史), 위잡(尉雜), 속방(屬邦) 등이 기재되어 있다.

운몽진간을 살펴보면 진나라 법률은 국가, 사회, 가정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쳐 무척 치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나라 법률의 출토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나라의 제도가 결코 후세 사람들의 말처럼 폭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려줬다. 진나라 당시 이미 따라야할 법이 갖추어져 있었고 엄격하게 집행됐으며 관리와 서민 모두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다.

‘무릇 관리란 반드시 청렴결백해야 하며 자신이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사적인 정에 얽매여 직무를 남용하지 않으며, 빈틈없이 치밀하고, 침착하고 가혹하지 않으며, 상벌을 합당하게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진시황은 ‘훌륭한 군주는 관리들을 다스리지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신조 아래 관리들은 백성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면서 관리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위리지도>에 따르면 관리의 다섯 가지 덕목(五善)은 첫째, 군주에게 충성과 신의를 다해 공경하는 것. 둘째, 청렴하며 남을 헐뜯지 않는 것. 셋째, 일을 함에 신중하는 것. 넷째, 주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 다섯째,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양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금기(五失)로는 허탄, 자만, 권력남용, 거역, 인재보다 재물을 중시하는 것 등이 있다.

위리지도는 ‘관용하고 충성 신의하며, 화목하게 지내고 원망하지 말며, 지나간 잘못을 지나치게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업신여기지 말며, 윗사람을 존경하고 극하지 말아야 한다. 또 간언을 귀담아 들어야 하고, 백성들의 능력을 잘 알고 다스려 바르게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섯 가지 덕목을 모두 갖춘 관리들에게는 큰 상이 내려졌다(<어서(語書)>). 위법한 행위를 하거나 직무를 태만히 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들에게는 벌금을 물렸으며 심한 경우에는 유배를 보냈다. 진시황의 ‘이리위사’가 그처럼 성공적이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진나라 법률 가운데 <봉진식(封診式)>은 재판 원칙 및 사건 조사, 현장 검증, 심문, 압류 등에 관한 규정과 사례를 다룬 것이다. 그 가운데 <신옥(訊獄)>편을 보면 “무릇 신옥을 할 때는 반드시 우선 그 이야기를 들어 보고 기록해야 하며 각자 할 말을 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곧바로 확인하려고 들면 안 된다. 할 말이 끝나고 다 받아 적은 후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재차 확인한다. 재차 확인하는 경우 그 말을 다시 한 번 듣고 받아 적은 후 다시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다시 확인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용의자의 발언권을 보장한 것으로서 피고와 원고 모두 각자 할 말을 하도록 한 후 반복해서 그 내용을 확인하고 기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서양보다 수천 년 앞서 실시된 것이다.

죄인을 형신(刑訊)하는 경우에도 엄격한 규정이 적용됐다. “재차 심문하는데도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말을 바꾸며 인정하지 않는 자는 법률이 허용하는 경우 몽둥이로 때린다. 때릴 경우 반드시 ‘이 자는 수차례 말을 바꾸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았기에 몽둥이로 맞는 심문을 당하게 됐다’는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처럼 용의자가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계속 거짓말로 둘러대는 상황, 즉 형을 가할 수 있도록 법률에 정해진 경우조차 기록을 먼저 남기지 않고서는 형을 가할 수 없었다.

<법률답문>은 문답의 형식으로 진나라 법률 조문, 술어(術語) 및 목적을 설명한 것으로 오늘날의 ‘법률 해석’에 해당한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진나라 법률의 주요 부분(형법)을 해설했으며 소송 절차에 대한 설명도 나와있다.

진시황은 이처럼 법제를 만들고 시행해 민풍을 다스리고 천하를 교화했으며 ‘음란한 행각을 금지시켜 남녀 모두 정결하게 했다.’(<회계각석(會稽刻石)>) 그 결과 민풍이 크게 개선됐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길이 남을 ‘속동륜(俗同倫, 풍속이 윤리를 따르다)’ ‘행동륜(行同倫, 행동이 윤리를 따르다)’의 전통이 열리게 됐다.

진나라 법률이 완성되고 발표, 시행된 것은 통일 이후 이루어진 수많은 노력을 상징한다. 진나라 왕조의 통일은 법률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측면을 포괄한 전면적인 통일이었다. 비록 진나라 왕조는 15년밖에 존속되지 못했으나 진나라 왕조가 창설한 황권 체제, 법률, 경제, 문자 체제는 이후 각 왕조들에 의해 부단히 채택돼 2000여 년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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