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헌신으로 전통을 지킨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로레인 페리에(Lorraine Ferrier)
2024년 01월 11일 오전 10:15 업데이트: 2024년 02월 5일 오전 11:27

루이 15세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1703~1768)는 폴란드 공주 출신이지만 결혼하면서 프랑스로 이주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42년간 재위했다. 그녀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아 정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당시 국민들의 삶에는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마리 레슈친스카의 초상화’(1748), 장 마르크 나티에. 캔버스에 오일 | 크리스토프 푸앵/베르사유 궁전(RMN-GP)

마리는 남편인 루이 15세와 자녀들, 프랑스 국민에게 무조건적인 헌신을 다했다. 그녀는 신앙심 또한 지극해 하루에 두 번 미사에 참석했다. 17세기 작가이자 파리 의회 의장이었던 샤를 장 프랑수아 에노(1685~1770)는 그의 회고록에서 “마리는 궁정의 화려함이나 위엄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종교적 규범에 충실한 궁정으로 탈바꿈시켜 귀감이 됐다”고 밝혔다.

마리는 매일 궁정에서 왕실 의무를 수행한 뒤, 개인 거처에서 가족이나 측근과 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교육을 받아온 그녀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가족의 초상화

마리의 사저에는 곳곳에 많은 그림이 걸려있다. 작품은 대부분 작가에게 의뢰해 탄생한 가족의 초상화다. 루이 15세와의 사이에 열 자녀를 둔 그녀는 자식에 대한 애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프랑스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와 황태자 루이 페르디난드’(1730), 알렉시스 시몬 벨. 캔버스에 오일 | 크리스토프 푸앵/베르사유 궁전(RMN-GP)

그녀가 첫째 아들과 함께 있는 작품인 ‘프랑스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와 황태자 루이 페르디난드’는 아들이 태어난 지 1년이 되었을 때 그려졌다.

작품 속 마리는 허리를 꼿꼿이 하고 앉아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수많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돼 마치 화려한 드레스 자락처럼 아름답다.

그녀는 의자에 함께 앉아있는 아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다. 페르디난드는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하지만 나이답지 않은 왕족의 기품이 느껴진다. 의자 위에 놓인 금빛 왕관과 의자 전체를 덮은 푸른 망토와 그 위에 수놓인 백합은 왕위에 오를 페르디난드의 운명을 보여준다.

‘루이 15세의 초상화’(1728년경), 작자 미상. 캔버스에 오일 | 제라드 블롯/베르사유 궁전(RMN-GP)

1728년경 무명의 화가가 그린 루이 15세의 초상화에도 이와 유사한 상징과 정교함을 발견할 수 있다. 초상화 속 루이 15세는 페르디난드의 초상화 속에 등장한 망토를 걸치고 있다. 탁자 위에는 왕관과 홀(笏)이 놓여있다. 홀의 끝부분은 신의 축복을 의미하는 손 모양으로 장식돼 있다.

예술에 대한 애정

기록에 따르면 마리는 타고난 미술적 재능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끝없는 배움과 노력으로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고, 그 과정을 즐겼다.

‘농가’(1750), 장 밥티스트 우드리.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마리는 당시 프랑스 화가 중 장 밥티스트 우드리(1686~1755)의 작품을 유난히 좋아했다. 주로 목가적이며 사냥, 자연풍경을 그린 우드리를 동경했다. 그녀는 당시 궁정 화가 중 한 명인 에티엔 제오라트의 지도 아래 우드리의 작품 모작을 완성하기도 했다.

장 밥티스트 우드리의 ‘농가’의 모작(1753), 마리 레슈친스카. 캔버스에 오일 | 제라드 블롯/베르사유 궁전(RMN-GP)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죽음

루이 15세를 도와 가정과 궁정, 국민들의 평안한 삶을 위해 힘쓴 마리는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열망이 강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은 셔츠조차 없으니, 나는 드레스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는 호스피스, 진료소, 자선 재단에 후원하며 진정으로 국민을 걱정했다.

또한 그녀의 신실한 신앙은 그녀가 살았던 곳, 읽은 책, 그리고 수집한 예술품에서도 드러난다.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과 예수회에 관한 주제를 다룬 작품을 좋아했던 마리는 특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졌다. 성 프란치스코는 나바라 왕국(현 스페인 바스크) 하비에르 지역 출신의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 예수회의 공동 창설자이다. 그는 1549년,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인물이며 ‘동양의 사도’로 불린다. 성 프란치스코는 1552년 중국으로 이주해 복음을 전하던 중 중국 광둥성 연안의 상촨(上川)섬에서 숨을 거뒀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1749), 샤를 앙투안 코이펠. 캔버스에 오일 | 크리스토프 푸앵/베르사유 궁전(RMN-GP)

성 프란치스코의 신실함에 큰 감동을 받은 마리는 궁정 화가 중 한 명이었던 샤를 앙투안 코이펠(1694~1752)에게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죽음’을 의뢰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헌신과 믿음에 대한 찬사의 일환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전했다.

생기를 잃고 죽음을 앞둔 성 프란치스코의 얼굴은 어두운 빛을 띠고 있다. 그가 입은 검은 옷과 어두운 벽, 바닥은 왼쪽 천사들의 밝은 색채와 대조를 이룬다. 죽음을 상징하는 어두운색은 천국으로 그를 이끄는 천사들의 신성한 빛과 마주하고 있다.

전통과 신성함을 추구한 왕비

궁정을 고결하고 신성한 장소로 변모시키며 국민과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는 루이 15세의 곁을 충실히 지키며 평생을 국가와 예술, 신을 위해 보냈다. 1768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계속 남아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로레인 페리에는 영국 런던 교외에 거주하며 에포크타임스에 미술과 장인 정신에 대해 글을 씁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