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사랑한 교황의 초상화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까지

미셸 플라스트릭(Michelle Plastrik)
2023년 09월 8일 오전 11:08 업데이트: 2024년 02월 5일 오전 11:29

고대 로마는 문명과 더불어 종교의 전성기이자 화려한 예술이 꽃피운 시기이다. 그 중심에는 가톨릭교회와 교황, 그리고 유럽의 각지에서 예술의 성지인 로마에 모인 수많은 예술가가 있었다.

벨라스케스와 교황 이노센트 10세

스페인 세비야 태생의 바로크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스페인 황금기의 거장 중 한 명이다. 그는 스페인 국왕 필립 4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 갔고, 자연주의적 색채 구현과 채색 기법으로 작품에 세련된 정교함을 더했다.

로마 교황청은 1600년대 중기에 이르러 스페인과의 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했고, 스페인 국왕은 총애하는 화가인 벨라스케스에게 교황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 로마와의 관계에 기여하고자 했다.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1650), 디에고 벨라스케스. 캔버스에 유화, 141×119센티미터 | 이탈리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벨라스케스는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성격과 외모를 미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붉은 뺨과 찌푸린 미간은 성급한 그의 성격을 있는 대로 묘사했고, 팔걸이에 올려놓은 팔과 단호한 표정은 강인한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강렬한 붉은 실크로 만들어진 망토와 모자, 의자 뒤편의 휘장은 교황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낸다. 벨라스케스는 마치 그림 속 교황과 관객이 직접적으로 마주 보고 있는 듯 그려내 그가 어떤 인물인지 단번에 파악하게 한다.

라파엘로와 교황 율리우스 2세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에는 ‘아테네 학당’을 그린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와 예술 애호가이자 르네상스 예술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교황 율리우스 2세(1443~1513)가 있다.

라파엘로는 뛰어난 예술적 통찰력을 지녔지만 37세의 나이로 단명하고 만다. 그의 죽음은 곧 르네상스 전성기의 종결이라 여겨졌다. 비보에 크게 슬퍼한 율리우스 2세는 라파엘로의 묘소를 판테온(로마 옛 신전)에 마련하라 명했다. 이를 통해 율리우스 2세가 얼마나 예술을 아꼈는지, 예술가들에 대한 애정과 이해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상’(1511), 라파엘로 산치오. 포플러나무에 유채 | 런던 내셔널갤러리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는 기존에 그려진 교황의 초상화의 틀을 깬 작품이다. 그 이전의 초상화는 대부분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거나 추기경들에게 둘러싸인 교황을 묘사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이러한 전통을 깨고 율리우스 2세를 캔버스 3/4을 차지하도록 크고 선명하게 그려내 관객과의 거리를 가능한 한 좁게 배치했고, 교황이 다른 인물을 동반한 것이 아닌 혼자 앉아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는 이후 수 세기 동안 교황 초상화의 표준이 되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모습에는 자신감 넘치고 매서운 성미가 그대로 나타나 있는 데 반해 라파엘로가 그려낸 교황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앙다문 입술은 고민이 많은 듯하다. 교황이 앉은 의자와 예복의 망토는 붉은빛이 대부분이지만, 그가 입은 옷의 흰색과 짙은 녹색의 배경은 붉은색과 어우러져 조화롭게 보인다. 더불어 붉은색, 흰색, 녹색은 선함, 믿음, 희망이라는 신학적 미덕을 상징하기도 한다.

티치아노와 교황 바오로 3세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상’(1543), 티치아노 베첼리오. 캔버스에 유화 | 이탈리아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

티치아노 베첼리오(1488~1576)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상’(1543)은 각각 라파엘로와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그림의 계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종교화, 신화화, 초상화에 능했던 티치아노는 색채의 대가로 불렸다. 그의 작품 속 색채는 따뜻하고 풍부하며, 유화 기법 구사에 능숙했기에 색의 깊이와 강렬함, 풍부함을 자유자재로 묘사했다. 라파엘로 이후 예술계에 등장한 티치아노는 이후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차세대 주요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교회 쇄신을 이끌고 예술계 발전에 큰 후원을 해온 교황 바오로 3세는 당시 많은 귀족과 왕족의 후원받으며 작품활동을 펼쳐온 티치아노에게도 물심양면으로 많은 후원을 베풀었다. 그런 바오로 3세를 위해 티치아노는 교황의 성품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초상화를 그렸다.

티치아노는 앞서 라파엘로가 그린 율리우스 2세의 초상화 속 구도에서 큰 영감을 받아 바오로 3세를 캔버스를 거의 채우도록 배치했다. 아래를 바라보며 관객에게서 시선을 멀리하고 있는 율리우스 2세와는 다르게 바오로 3세는 엄숙한 표정으로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바오로 3세는 노인의 모습이지만 가볍거나 위협적이지 않고 진중하고 엄숙한 기운과 자신감을 뿜어내고 있다. 어둡고 흐리게 묘사된 배경은 시선을 교황에게 향하게 한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초상’(1543)의 세부, 티치아노 베첼리오. 캔버스에 유화 | 이탈리아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

티치아노는 색과 빛을 활용해 붉은 벨벳 망토의 광택과 반사된 빛이 마치 실제인 양 느껴지게 한다. 하얀 옷의 빳빳한 질감과 교황의 강인한 손의 주름과 살결 또한 그 질감이 온전히 느껴지게 묘사되었다.

아름다움을 찬양한 이들의 얼굴

라파엘로가 구도와 배치를 혁신적으로 한 데 이어 티치아노는 인물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섬세하게 묘사했고, 벨라스케스는 좀 더 과감하게 붉은빛을 사용하면서도 인물의 성품을 가감 없이 묘사했다. 대를 이은 3인의 예술가와 3인의 교황의 초상화는 후대에 제작된 초상화의 기본 양식이자 귀감으로 지금의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미셸 플라스트릭은 뉴욕에 거주하며 미술사, 미술 시장, 박물관, 미술 박람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