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 용기있는 희생과 수정이 필요하다, 보티첼리

다얀(Da Yan)
2023년 08월 24일 오전 7:15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5:21

폄하됐던 거장,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봄(Primavera)’의 작가이자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는 우리에겐 친숙하면서도 당대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몇 세기 동안 많은 예술가는 보티첼리를 원시적이고 중세적이라 평가했다. 심지어 그의 작품이 라파엘로 산치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이룬 완벽한 미술 세계에 미치지 못한다고 폄하했고, 그가 초기 르네상스의 중요한 거장이라는 명성을 되찾은 것은 불과 100여 년밖에 안 된다.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보티첼리의 작품은 대부분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와 기독교 문화 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설명과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산드로 보티첼리, 1480~1485년 경

고대 신화 속 인물 ‘팔라스’와 ‘켄타우로스’가 등장한 이 신화화(神話畫)는 보티첼리의 작품 중 뛰어난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바위 절벽 아래 먼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두 인물이 자연스레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편의 켄타우로스는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 종족으로, 성질이 난폭하고 억제하기 어려운 열정과 욕망을 지녔다. 그 옆의 여인은 켄타우로스의 머리채를 한 움큼 휘어잡은 채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 여인은 이성과 지혜의 여신 ‘팔라스 아테나(미네르바)’다. 그녀는 과거 경비병들이 주로 사용하던 의식용 미늘창을 한 손에 들고 있고, 켄타우로스는 활을 손에 쥐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할 의지는 없는 듯하다. 이는 인간의 본능적이며 동물적인 열정과 욕망이 신성한 이성에 의해 제어되고 복종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신화 속 인물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당시 시대적 정서를 잘 반영한다. 1400년대 당시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기독교 신학과 고대 철학의 맥락에서 논의해 왔다. 특히 이러한 논의는 정치가, 은행가이자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열정적인 예술 후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1469-1492)의 통치 기간 절정에 달했다.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는 로렌초가 보티첼리에게 의뢰해 제작된 작품이다. 친척의 결혼 선물로 그려진 이 작품은 인본주의적 관심을 고대 문화에 비춰 풀어낸 것이자, 켄타우로스의 자발적인 복종이 결혼에 대한 헌신적인 의무를 나타내는 낭만적인 상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동방박사의 경배

‘동방박사의 경배’, 산드로 보티첼리, 1475-1476년 경

보티첼리는 동시대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고, 후원자들에게 의뢰받아 그들의 요구에 맞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475년작 ‘동방박사의 경배’에는 그림의 의뢰인인 구아스파레 델 라마를 그림 속에 등장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그림을 통해 메디치 가문에게 잘 보이려 했던 그의 요구에 따라 당시를 호령한 메디치 가문의 인물들을 그림 속에 등장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해 세 명의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을 방문한 것은 성경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이다. 작품 속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바치고 있다. 여기서 보티첼리는 동방박사들을 공식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메디치 가문 인물들의 특징을 부여했다. 가문을 번영으로 이끈 장로 코시오 데 메디치에게는 위엄 있는 검은 옷을 입혔고, 메디치 가문의 둘째인 피에로와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 시인이자 철학자인 폴리치아노도 군중 속에 자리 잡게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묘사되어야 할 인물인 로렌초에게는 검을 손에 쥐고 있게 해 그의 용맹함과 기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림의 오른쪽 한편에는 파란 옷을 입고 로렌초 쪽으로 바라보는, 이 그림 의뢰인인 델 라마가 자리 잡고 있고, 그림의 작가인 보티첼리 또한 그림 속 한편에서 우리와 시선을 마주하며 화폭 속 그가 창조한 세계로 초대하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관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지만, 보티첼리는 종교화의 성스러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후원자의 세속적 열망과 의도가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각 인물의 모습 묘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마치 성경 속 한 장면이 아닌, 르네상스 피렌체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이기도 한다.

수도원 방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당시 피렌체 사회에는 세속적인 명성과 재산을 추구하는 풍조가 점점 만연했고, 영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은 메디치 가문과 그가 조성한 인본주의 문화를 퇴폐적이고 타락한 것으로 여겼다. 1494년, 로렌초가 사망한 후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설교자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가문의 추방에 앞장서며 성직자 부패, 빈민 착취, 독재 통치를 규탄하고 기독교 신앙의 쇄신을 촉구했다.

보티첼리는 당시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깊은 영감을 받아 젊은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세속적이고 이교적인 주제에서 눈을 돌렸고, 심지어 자기 작품 몇 가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수도원 방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산드로 보티첼리, 1490-1494

‘수도원 방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보티첼리 본인이 가진 인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깊은 기독교 신앙 간의 혼란과 고민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려진 것으로, 역동하는 시대적 고민과 자기 내면의 고민을 잘 반영했다. 그림 속 아치 형태의 좁은 방에는 4~5세기 초기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철학가이자 사상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독하게 앉아있다. 그는 수첩에 조용히 글을 쓰고 있는 듯 보이지만, 바닥에 버려진 깃펜과 찢어지고 구겨진 종잇조각들을 통해 그의 내면은 평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보티첼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뇌와 찢어지고 버려진 종이에 당시 자기 생각과 깨달음을 투영했다. 종이를 찢어가며 거듭 글을 고쳐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림도 믿음도 용기 있는 희생과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류와 불완전한 부분들 계속 들여다보고 고민하며 계속해 수정해야만 끊임없이 자신을 뛰어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고민과 수정, 노력과 발전을 거듭한 산드로 보티첼리. 그의 노력의 유산인 작품들은 현재까지 우리 곁에 남아 많은 깨달음과 교훈을 주고 있다.

다얀(Da Yan)은 유럽 미술사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상하이에서 자란 그는 미국 북동부에 거주하며 미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