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와 색채의 완벽한 조화로 그려낸 아름다움…귀도 레니

로레인 페리에(Lorraine Ferrier)
2024년 01월 4일 오후 10:29 업데이트: 2024년 02월 5일 오전 11:27

풍부한 색채감각과 세련된 지성주의로 수많은 걸작을 남긴 화가, 귀도 레니(1575~1642)는 17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유럽 전역의 교황, 귀족, 군주들의 후원을 받았다.

‘자화상’(1602), 귀도 레니.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레니는 ‘신성한 존재(The Divine)’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신을 시각적 형태로 묘사하는 능력을 크게 인정받으며 동료들과 차별을 이뤘다. 그의 작품은 우아함,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레니의 작품에 대해 전문가들은 ‘타고난 재능의 결과가 아닌 그림과 채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한 엄청난 노력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인 ‘소묘와 색채의 결합’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영구 소장품 중 하나로 1685년 루이 14세가 구입한 작품이다.

소묘와 색채의 결합

‘소묘와 색채의 결합’(1624), 귀도 레니. 캔버스에 오일. 파리 루브르 박물관 | 공개 도메인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채와 아름다운 인물 묘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단순한 인물화가 아닌 우화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레니가 표현하고자 한 주제의 동기는 그가 유년기 시절 받은 예술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레니는 유럽 최고의 예술 중심지 중 하나였던 볼로냐에서 태어나 바로크 양식을 정립한 예술가 안니발레 카라치, 아고스티노 카라치 두 형제의 지도를 받았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 베로네제 등 자연주의와 고전주의 예술가의 양식을 참고하길 권유했고, 레니는 그들에게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카라치 형제는 당시 유행하던 인위적인 매너리즘 미학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대신 르네상스 시대의 미학을 따르며 그림과 색채의 조화를 추구했다.

미술의 근본을 논하다

14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우화적, 종교적, 고전적 주제를 다룬 회화에 대한 연구가 발전했다. 특히 작품을 구성하는 규칙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고, 그에 대한 논문이 많이 생산됐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화가에게 있어 소묘와 색채 중 어느 것이 근본인가’라는 화두를 두고 많은 논쟁을 벌였다. 당시 대부분은 소묘를 우선으로 뒀다. 그들은 소묘는 남성적이며 지성을 다루지만, 색채는 여성적이고 감각을 다룬다고 여겼다.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그들의 계보를 잇는 예술가 카라치 형제와 레니는 예술적 특징의 기본이 되는 소묘와 색채의 평등을 주장했다.

그림으로 구현된 조화

‘소묘와 색채의 결합’의 왼쪽에는 한 남성이 있다. 그는 금빛 망토를 두르고 펜을 들어 종이에 뭔가 그리고 있다. 오른쪽 여성은 보라색 천을 머리에 두른 채 한 손에는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다. 여성이 쓴 천의 끝자락은 남성의 망토 끝에 닿아있다. 남성은 여성을 안아주며 서로의 시선을 부드럽게 마주한다. 인물의 배경과 책상은 검은색으로 칠해 인물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

이 작품은 레니가 추구한 조화를 우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립과 다툼이 아닌 이해와 포용, 조화를 강조한 이 작품은 원형 캔버스에 그려져 그 주제를 재차 강조한다. 레니는 다양한 색채와 섬세한 묘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동시에 예술적 성취도 함께 이뤘다.

레니의 유산

‘성 요셉과 아기 예수’(1640), 귀도 레니. 캔버스에 오일. 휴스턴 미술관 | 공개 도메인

레니는 엄격한 고전주의 기법을 따라 경건한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했던 예술가다. 그는 루벤스, 카라바조와 함께 19세기까지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았으나 20세기에 이르러 미술 사조의 변화로 경시됐다. 그러다 21세기 들어 다시 주목받으며 전 세계에 고전 예술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로레인 페리에는 영국 런던 교외에 거주하며 에포크타임스에 미술과 장인 정신에 대해 글을 씁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기사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