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을 담는 보물, 과거의 ‘상자’ 열어보기

미셸 플라스트릭(Michelle Plastrik)
2023년 08월 24일 오후 11:19 업데이트: 2024년 02월 5일 오전 11:29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보물을 담는 보물들

미국 뉴욕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세계 5대 박물관 중 한 곳이자 미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박물관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많은 이들의 기증과 후원을 통해 수집한 소장품 수는 현재 약 300여만 점에 이른다. 그 많은 소장품 중 역사적 가치가 있는 여러 ‘상자’들은 소재, 형태, 기능, 심미적, 학술적 측면에서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중세 유럽의 상자

우윳빛 색감이 포근하면서도 매끈한 질감이 돋보이는 이 상자는 중세 유럽에서는 매우 귀한 재료였으며 오늘날은 사고팔 수 없는 상아로 제작되었다. 상아는 중세 초기부터 로마네스크 시대까지 주로 책 표지와 교회 용품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상아가 유럽으로 유입되는 양은 12세기에 대폭 감소했지만, 13세기 중반 고딕 양식기에 이르러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주로 수입되며 재활성화되었다. 이에 예술품 제작에 상아를 사용하는 비율도 높아졌다. 상아로 만든 조각상, 빗, 필기구, 보석 상자와 같은 고급 사치품을 소장하는 것이 유행했고, 특히 상자의 겉면에 부조로 특정 장면을 조각하는 것이 인기를 얻었다.

14세기 프랑스의 ‘구애하는 연인이 새겨진 상자’

‘구애하는 연인이 새겨진 상자’ 14세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공개 도메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시품 중 ‘구애하는 연인이 새겨진 상자’는 14세기 프랑스 왕실에서 사용했던 제품이다. 이와 같은 상자는 왕실 귀족들 사이에서 축제나 행사 때 선물로 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옛 장인들이 주로 다룬 주제 또한 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14세기 이전 초기 이러한 형태의 작품은 대부분 나뭇잎 모양, 도형 등 형상적인 장식으로 꾸며졌으나 14세기 조각가들은 고대 서사시, 로맨스 등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 장식품에 서사를 녹여냈다.

이 작품에 구현된 장면은 목가적인 환경을 배경으로 펼치는 낭만적인 구애와 사랑의 일반화된 모습이다. 이 주제는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주제 중 하나였다. 때로는 격려받는 여인의 모습, 여인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 사랑하는 이에게 반지를 건네는 구혼자, 말을 타는 이들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카소네’

‘카소네’, 1425~1450년 경. 소나무와 잿소, 부분 금도금, 성형 및 도장.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공개 도메인

카소네(Cassone)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수납 가구 중 하나이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탈리아 중부에서 주로 생산되었는데, 당시 카소네 제작에만 전념하는 장인이 많았을 정도로 카소네는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카소네의 외면에는 신화, 고전, 성서의 장면을 새겨넣었고, 개인적인 상징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제작되기도 했다.

카소네는 주로 결혼을 앞둔 남성이 제작을 의뢰해 만들어졌다. 남성은 카소네 안에 지참금과 예물을 채워 결혼식 때 신부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카소네는 대부분 외관이 매우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게 꾸며졌다. 정교한 금박으로 장식하기도 했고,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겨넣기도 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결혼식 날 필수적으로 주고받았던 카소네는 결혼의 신성한 결합과 행복을 상징하기에 매우 귀중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로 여겨졌고, 안방에 배치되어 부부가 된 이들 양가의 화합과 결합을 의미했다.

16세기 영국의 ‘반짇고리’

‘반짇고리’, 1626~1649년 경. 비단 바느질, 거울 유리, 가죽, 은사, 양모, 금박 목재 | 로얄 컬렉션 트러스트

16세기 영국에서는 수공예가 특권층 여성의 여가 활동으로 인기를 끌었다. 고급 재료를 구입해야 하고, 자수를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에 특권층만 향유할 수 있는 문화처럼 여겨졌다.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 제8대 여왕이었던 메리 또한 자수를 즐겨 많은 수예품을 만들었다.

자수를 놓아 만든 상자의 외면에 새겨진 내용은 이전 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신화, 성경 속 내용, 목가적인 주제 등을 외면에 새겨넣었다. 상자의 내부는 젊은 여성들이 보석, 세면도구, 필기구, 재봉 도구, 편지 등 개인 소지품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했고 때로는 숨겨진 칸을 만들어 더 특별히 개인적인 물품을 보관하기도 했다.

16세기에 제작된 이 반짇고리는 비단으로 만든 긴 땀 형태의 자수로 덮여 있다. 상자의 정면에는 두 남녀가 각각 목가적인 풍경 앞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다. 상자는 총 세 곳으로 열리며 칸막이와 서랍, 그리고 숨은 수납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 작품은 메리 여왕의 후원 아래 운영되었던 성공회 공동체의 여인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여왕이 구입해 왕실에 반환하였고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어 많은 사람이 관람하고 있다.

파리지앵의 ‘스너프박스’

‘스너프박스’, 1734~1735년 경. 다니엘 구어스 작.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공개 도메인

16세기 후반,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담배가 수출되기 시작했고 이후 18세기에 이르러 담배는 스너프(코담배) 형식으로 피우는 것이 당시 귀족의 고급스러운 취향과 높은 지위와 부를 나타내는 의식으로 발전했다. 귀한 스너프를 보관하기 위해 스너프박스라는 이름의 상자가 제작되었고,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제품이기에 보석과 초상화, 자개, 금, 도자기 등으로 장식된,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많이 탄생했다.

18세기 파리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명품 시장의 중심지였고, 동시에 스너프박스 생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또한 겉모양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스너프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뚜껑을 단단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기에 당시의 장인들은 무거우면서도 아름다운 금과 각종 보석을 활용해 상자를 보다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제작했다.

네 개의 역사적인 상자

시대별로 각기 다른 특징과 의미를 가진 이 네 개의 상자는 당시에는 귀중품을 보관하기도 했고, 개인의 취향을 보여주는 동시에 부와 높은 지위를 보여주는 사치품이기도 했다. 또한 이 상자들은 소유자에 대한 정보를 겉 장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했으며 많은 장인이 더 아름답고 많은 의미를 담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자들은 현재까지 남아 그 원형을 유지한 채 전시되어 많은 관람객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미셸 플라스트릭은 뉴욕에 거주하며 미술사, 미술 시장, 박물관, 미술 박람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영상화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