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돌아온 탕자… 그리고 사랑과 용서

에릭 베스
2020년 3월 8일
업데이트: 2020년 3월 9일

최근 폼페오 바토니(Pompeo Batoni)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를 우연히 접했다가 받았던 놀라움을 잊을 수 없다. 그림 속 두 인물 사이의 애정과 온기가 실상을 본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그림과 그림 속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뭘까?’ 찰나에 느꼈던 강렬한 감동은 나를 또 한편의 회화 속 이야기로 이끌었다.

폼페오 바토니(1708–1787)는 이탈리아의 ‘마지막 노장’으로 묘사돼 왔다.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으며 당시 이탈리아 초상화를 지배했다. 그는 또한 종교적이고 우화적인 화풍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18세기에는 부유한 젊은이들의 통과의례였던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큰 인기를 끌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귀족계층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거치던 일종의 현장체험 즉, 수학여행과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고전 문화 유산이 풍부한 곳을 여행하며 선구적인 해외 문화를 경험하고 그곳의 문물을 익혀 자신들의 전통과 깊은 연결성을 찾고자 했다.

당시 그랜드 투어를 했던 많은 부유한 귀족들은 이탈리아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바토니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웅장한 역사적 배경에 역사적인 복장을 입혀 세련되고 우아한 초상화를 그려주는 바토니의 그림을 그들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초상화는 의뢰인과 전통의 연관성을 나타내주는 물리적 표현이기도 했다.

초상화의 인기와 함께 바토니의 우화적이고 종교적인 그림들도 높이 평가됐다.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는 그랜드 투어로 구체화됐던 서구의 전통 원리를 성서적 비유를 빌려 표현한 작품이다.

폼페오 바토니의 ‘젊은 남자의 초상(Portrait of a Young Man)’ 1760~65년경.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Public Domain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11-31에서 예수는 두 아들을 둔 아버지를 소개하며 탕자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두 아들 중 작은아들이 여행을 하고 싶다며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산을 나눠 줬다. 그러나 먼 고장으로 떠난 작은 아들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허비했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까지 들었다. 그는 결국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됐는데, 너무 굶주린 나머지 돼지 사료라도 먹고 배를 채우고 싶었다. 그는 과거를 후회하며 결국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본 아버지는 한걸음에 달려가 아들을 안았다. 아들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환대하고 기뻐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고 일렀다.

아버지는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며 돌아온 아들을 환영하는 큰 잔치를 벌였다.

그러나 큰아들은 이 잔치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가까이서 아버지를 섬긴 자신보다 동생을 편애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며 큰아들을 위로하고 동생을 위해 축하해 줄 것을 간청했다.

폼페오 바토니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73년,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Public Domain

바토니와 ‘돌아온 탕자’

바토니는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순간을 묘사했다. 나는 이 장면이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팔꿈치를 들어 일으켜 세우고, 그의 망토로 아들의 벌거벗은 등을 감싼다.

바토니는 작품 속에 아버지와 아들만을 등장시켰다. 단 두 인물이지만, 바토니는 몇 가지 구성법을 통해 아버지를 주요 초점으로 유지했다.

첫째, 아버지는 구성상 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몸을 낮췄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중요한 계층 구조가 시사됐다.

다음으로, 아버지의 옷에는 여러 가지 질감이 있다. 바토니는 아버지에게 금과 보석을 착용시켰고 벨벳 원단에 털 장식이 있는 망토를 입혔다. 반면, 아들에게는 벌거벗은 등에 비천해 보이는 옷으로 간신히 하의만 입혔다. 이렇게 상반된 디테일과 질감의 표현은 아버지를 아들보다 더 중요한 구성 요소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바토니는 색채를 이용했다. 아버지의 옷차림은 아들의 옷보다 훨씬 화려하다. 바토니는 빨강과 초록의 보색대비를 아버지의 옷에 접목시켰다. 두 색의 대비로 인해 아버지의 옷은 아들의 갈색 옷보다 시선을 오래 사로잡는다.

심지어 아버지의 피부도 아들의 피부보다 더 많은 색을 띠고 있다. 아버지의 장밋빛 뺨과 손은 아들 피부를 전체적으로 덮고 있는 누런 색조보다 더 생기가 넘친다.

전통적 가치 ‘사랑과 용서’

나는 바토니의 초점 구성이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그림에 등장한 아버지는 단순한 아버지 이상의 상징성이 있다. 그의 행동에서 아버지는 ‘사랑과 용서’라는 전통적인 가치를 대표한다.

세속적인 삶을 선망하며 먼 나라를 여행하고 싶어 하는 작은아들의 욕망에서 젊은이들의 호기심이 엿보인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얻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큰아들에게선 특권의식이 드러난다.

두 아들은 아버지가 상징하는 ‘사랑과 용서’란 가치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쾌락을 좇는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가치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국 큰 고통을 겪게 된다.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반지와 새 옷을 받고 “다시 살았다”며 축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인 가치관 덕분이었다.

큰아들도 인생의 쾌락에 유혹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자신이 받은 사랑과 보살핌이 부족했다고 느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그의 집착과 욕망은 질투라는 파괴적인 길을 따라 여행을 시작했다.

큰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를 거역한 적이 없고 집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항상 부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과 용서’란 가치를 수용하지 않는 한 그는 진정으로 부유할 수도, 진정으로 살아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 큰아들에게 아버지의 품 안에서 한 번도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그의 풍족한 삶을 상기시켜 준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큰아들이 동생을 사랑하고 용서하도록 격려했다. 아버지는 ‘사랑과 용서’의 원천이다.

전통 유지와 실천

전통은 그것을 따르고 지키는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계속 증명하기 때문에 지속되고 유지될 수 있다. 그랜드 투어는 젊은이들을 서구 문화의 외형적 표현 즉, 아름다운 건축, 예술 작품 및 최고의 세련됨에 노출시켜 전통적 가치를 유지할 것을 장려했다.

그러나 서구 문화가 제공한 내면의 세련됨, 즉 ‘사랑과 용서’의 전통적인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원칙을 염두에 뒀을 때, 바토니처럼, 우리도 이러한 가치를 되살리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그랜드 투어를 하는 것은 어떨까. 역사적으로 이러한 원칙들은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유익했다.

이제 바토니의 그림은 내게 삶의 쾌락을 좇아 전통적 가치관에서 벗어난 길을 가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돌봐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축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질투와 특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공격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대신 나는 사랑과 용서를 구현하고 장려하며, 나 역시 전통과의 연관성을 물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겠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은 나와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미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인간의 경험에 대해 무엇을 제안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는 필자가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Reaching Within: What traditional art offers the heart)’ 시리즈를 연재하며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본문 중 성서 인용부분은 현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어휘에 더 가까운 가톨릭성경을 기준으로 인용했습니다.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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