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의 드로잉…통찰력이 낳은 선(線)의 예술

데브라 아문슨(Debra Amundson)
2024년 01월 24일 오후 9:07 업데이트: 2024년 02월 5일 오전 11:27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는 신화나 역사, 종교 작품과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비너스의 탄생’, ‘프리마베라(봄)’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멀리서 봐도 큰 감명을 주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그 진가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유려한 곡선과 사실적인 묘사로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데, 이는 피나는 노력과 연구의 결과다.

거장의 드로잉

‘오순절의 경건한 예루살렘인들’(1505년경), 산드로 보티첼리. 펜, 갈색 잉크, 종이에 구아슈 | Wolfgang Fuhrmannek

드로잉(소묘)은 보통 도면이나 도안을 그리는 것으로 작품 구성 단계에서 연구용으로 쓰인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드로잉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예술 가치를 지닌다. 특히 그의 드로잉에서는 우아한 선의 사용 방식이 돋보여 그가 작품을 구상할 때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보여준다.

보티첼리는 숙련된 드로잉 기술을 사용해 우아한 선으로 움직임을 표현했다. 인물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매우 정교하게 그려냈다.

‘동방 박사의 숭배’의 구경꾼 드로잉(1500년경), 검은 분필, 갈색 잉크, 리넨 | 피츠윌리엄 박물관

보티첼리 특유의 섬세한 선은 인물 묘사에 표현력을 더한다. ‘동방박사의 경배’ 속 구경꾼 묘사를 연구하며 그린 이 드로잉에는 주름이 많이 잡힌 옷이 등장한다. 얇은 천 아래 인체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묘사해 우아함과 유동성을 표현했다.

‘신곡’ 중 ‘지옥’의 삽화, 산드로 보티첼리 | 데이브 래퍼티

보티첼리는 미술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식견도 높았다. 그는 단테(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의 대표작 ‘신곡’을 위한 삽화 제작을 의뢰받고 수년간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지옥’, ‘연옥’, ‘천국’ 3장으로 이뤄진 이 서사시의 각 장에 대한 삽화를 그렸다. 그가 삽화 연구 과정에서 그린 드로잉을 통해 우리는 ‘신곡’의 정서적 깊이와 복잡한 내용을 통찰한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다.

보티첼리의 섬세함과 통찰력

‘팔을 들고 서 있는 청년’, 산드로 보티첼리. 황토 종이, 흰색 구아슈 | 공개 도메인

그는 인체 묘사에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 누드 드로잉을 그리기도 했다. 자세에 따라 변하는 근육의 움직임을 깊이 연구해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깊이와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묘사했다. 그는 한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빛의 각도를 다르게 한 여러 장의 드로잉을 그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명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완벽히 이해한 뒤 최종 작을 완성했다. 

그의 드로잉 작품 ‘여성의 머리 연구’에는 섬세한 머리 장식을 한 여성이 있다. 귀를 덮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향하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조명을 배치했는지 알 수 있다.

‘여성의 머리 연구’(1485년경), 산드로 보티첼리. 갈색 종이에 금속 포인트, 흰색 구아슈 | 영국 애쉬몰린 미술관

그가 남긴 드로잉 작품 중 일부는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사회 계층을 살펴볼 수 있는 초상화도 있다. 보티첼리는 높은 심리적 통찰력으로 인물의 본질을 파악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인물의 본질을 단 몇 줄의 선으로 묘사한 그의 드로잉 작품은 인물의 당시 기분과 성격, 특징까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게 한다.

‘왼쪽을 내려다보는 여성 두상 옆모습’(1468년경), 산드로 보티첼리 | 옥스포드 그리스도 교회 제공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 두상 옆모습’(1468년경), 산드로 보티첼리 | 옥스포드 그리스도 교회 제공

불멸의 예술

보티첼리의 작품 중 상당수는 1497년 일련의 사건으로 소실됐다. ‘허영의 불꽃’이라 알려진 이 화재는 당시 도미니코회의 사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의 주도로 발생했다. 화장품, 옷, 예술품 등 개인의 사치나 허영을 상징하는 물건을 태워버리는 행위였는데, 이로 인해 보티첼리의 걸작 중 많은 작품이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성모 승천’(1493년경), 산드로 보티첼리 | 보스턴 미술관

16세기 후반부터 그의 작품은 유행에 뒤처져 명성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19세기 초에 이르러 다시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작품들은 후대에 많은 교훈과 화두를 던지고 있다.

데브라 아문슨(Debra Amusdson)은 작가이자 블로거, 세계 여행가이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