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영원한 뮤즈이자 사랑, 아내의 초상화

로레인 페리에(Lorraine Ferrier)
2023년 10월 23일 오후 11:24 업데이트: 2024년 02월 5일 오전 11:29

빛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 반 레인(1606~1669)은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빛과 어둠을 배합해 밝은 부분에 시선이 집중되게 하는 기법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자화상’(1669), 렘브란트. 캔버스에 유채 | 공개 도메인

렘브란트는 자화상이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뮤즈는 바로 아내 사스키아다. 렘브란트는 아내를 모델로 삼아 결혼 생활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녀의 모든 것을 화폭에 묘사했다. 그의 작품에서 그녀는 여인이자 아내, 어머니로 그려졌으며 고대 로마의 여신에 비유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를 꽃과 다산의 여신 플로라에 비유한 그림을 다수 그려냈다. 신혼의 달콤한 순간부터 임신,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혼 생활의 주요 순간을 신화 속 여신에 투영했다.

사랑의 시작

‘약혼자로서의 사스키아’(1633), 렘브란트. 양피지에 은첨필 | 공개 도메인

렘브란트는 1633년, 암스테르담의 미술상에서 사스키아를 처음 만났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약속했다. 약혼 며칠 후,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양피지 위에 은첨필(銀尖筆. 금속 끝에 은을 용접한 미술도구)로 섬세하게 초상화를 그려냈다. 그림 속 사스키아는 렘브란트가 선물한 꽃을 들고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다. 그림 아래에는 렘브란트의 필치로 ‘내 아내의 초상화. 약혼한 지 3일째 되는 날 그린 초상화다’라고 적혀있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가 결혼하고 약 1년 뒤, 그는 그녀를 모델로 한 플로라 그림을 처음 그렸다.

‘플로라’(1634), 렘브란트.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그림 속 사스키아는 순수하고 수줍은 표정으로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서 있다. 그녀는 나뭇잎으로 덮인 지팡이를 들고 있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는 고개가 꺾인 채 시들어 가는 튤립과 여러 꽃으로 장식된 왕관이 씌워져 있다.

당시 예술가들은 ‘고개가 꺾인 튤립’에 의미를 부여해 그림 속에 등장시켰다. 그림 속에 등장한 튤립은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품종이다. 이 품종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기존 한 가지 색이 아닌, 두 가지 색으로 변한다. 신기한 외양에 당시 사람들은 이 꽃에 열광했고, 예술가들은 꽃이 ‘마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듯 죽기 전 다양한 색으로 주인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여겼다.

‘플로라’(로마 제국). 로마 카피톨리노 미술관 소장 | 공개 도메인

사스키아는 은색으로 수놓은 비단 드레스를 입고 있다. 풍성한 드레스와 꽃 왕관은 고대 로마의 플로라 조각상과 흡사한 모습이다. 플로라는 손에 꽃다발을 쥐고 있지만, 사스키아는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다.

아이를 가진 사스키아

결혼 1년 후, 렘브란트는 ‘아카디아 의상을 입은 사스키아’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사스키아는 이 작품에서 또 한 번 플로라로 묘사되었다.

‘아르카디아 의상을 입은 사스키아’(1635), 렘브란트. 캔버스에 오일 | 공개 도메인

두 번째 그림 속의 사스키아는 이전과는 다르다. 수줍고 순수한 모습과 다르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자연스레 흘러내려져 있고, 마치 그림을 그리는 렘브란트를 직접 바라보는 듯 몸과 시선이 화면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그녀의 자세는 고대 로마에서 제작되었던 플로라 조각상과 매우 흡사하다.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 또한 마찬가지다. 꽃다발에는 튤립, 장미, 프리뮬러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꽃들은 개화기가 서로 다르다. 이는 1600년대 중세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바니타스’ 사조의 특징 중 하나로 삶의 덧없음을 의미한다.

렘브란트는 플로라가 꽃과 다산의 여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 속 사스키아의 손에 풍성한 꽃다발을 들렸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짚고 있다. 거기에 높게 부른 배는 그녀가 아이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는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유년기를 넘긴 자식은 한 명뿐이었다.

작별 인사

렘브란트는 결혼식을 올린 지 9년째 되던 해인 1641년, 사스키아를 모델로 한 플로라 그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인 ‘붉은 꽃을 든 사스키아’를 그렸다. 이 작품은 앞서 두 작품하고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붉은 꽃을 든 사스키아’(1641), 렘브란트. 참나무에 유채 | 공개 도메인

렘브란트는 진한 붉은색과 밤색을 사용해 아련하면서도 침울한 초상화를 그렸다. 결혼을 축하하거나 출산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화려한 색채는 일절 사용되지 않았다. 이 초상화는 사스키아의 마지막 숨결을 담아 그녀의 생애를 기리고 있다. 사스키아는 창백하고 지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왼손은 가슴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꽃 한 송이를 우리에게 건넨다. 그녀 뒤편의 배경은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환한 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닿아 시선을 그녀에게 집중하게 한다.

화려한 꽃다발이 아닌 꽃 한 송이만 들고 있는 이 그림에는 렘브란트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렘브란트는 사랑을 느낀 첫 순간부터 화폭에 그녀를 담았었다. 그리고 그는 출산으로 인한 급격한 건강 악화와 결핵으로 결국 서른 살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난 사스키아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림으로 그려냈다.

렘브란트는 화가로서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사스키아를 만나 9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붉은 꽃을 든 사스키아’는 렘브란트가 사스키아에게 작별을 고하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로레인 페리에는 영국 런던 교외에 거주하며 에포크타임스에 미술과 장인 정신에 대한 글을 씁니다.

*류시화 기자가 이 기사의 번역 및 정리에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