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영어 퇴출 본격화? 베이징 시내 교통 표지판서 영문 병기 삭제

최창근
2023년 12월 4일 오후 7:12 업데이트: 2023년 12월 4일 오후 7:12

‘중국몽(中國夢)’을 내세우며 지난날 ‘중화제국(中華帝國)’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중국에서 국수주의(國粹主義) 색채가 강해지고 있다. 이 속에서 중국어 사용 강화, 영어 퇴출이 본격화되고 있다.

12월 4일, 대만 일간 ‘자유시보(自由時報)’는 “중국 베이징시 인민정부가 도로 표지판에 병기된 영어 표기를 모두 없애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영어 수업 금지, 외국 교과서 규제 정책 등에 이어 시진핑 국가주석의 이른바 ‘영어 사용 금지령’이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 CNN은 “중국은 시진핑 주석의 지도 아래 민족주의로 변했다. 시진핑은 중국의 문화적 자신감을 높이고 서구의 영향력에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며 “각급 학교에서 교사들은 서구 교과서를 사용하거나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와 사법 독립 등 ‘서구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보도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최근 몇 년 동안 교과목에서 영어 비중을 낮추기 시작한 학교가 늘어나고 있다. 중국 서북부를 대표하는 대학 중 하나인 산시(山西)성 시안교통대학(西安交通大學)은 지난 9월, 대학 졸업 필수 자격 시험에서 영어 시험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인 상하이시 당국은 2021년, 학생들의 학습 부담 경감을 명분으로 초등학교 영어 시험을 금지했다. 일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 정부 고위직들은 교과목, 대학입시 핵심 과목에서 영어를 폐지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2020년 중국 정부는 초·중학교에서 ‘외국 교과서 사용 규제’ 계획을 밝혔다. 중국 국외 거주 외국인 교사의 온라인 영어수업이 금지됐고 국제 커리큘럼이 있는 학교를 대상으로 한 감시는 강화됐다.

베이징을 비롯한 각급 도시의 도로 교통 표지판에서 ‘영어 퇴출’이 본격화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베이징시 등에서 기존의 중어·영어 도로표지판을 중국어 도로표지판으로 전면 교체했다. 자유시보는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을 인용해 “베이징시 당국이 중어·영어 병기 도로표지판을 전부 중국어 표지판으로 바꾸고 있다.”며 “‘베이징이 첫 발을 쐈다.’는 내용의 토론이 웨이보, 틱톡 등 중국 소셜미디어네트워크 플랫폼에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에도 “베이징시 교통관리국이 도로 안전과 교통 효율을 개선하기 위해 중어·영어 도로 표지판을 모두 중국어로 교체했다.”는 내용의 게시글이 줄 잇고 있다.

앞서 11월 29일, 베이징시 교통관리국은 “모든 중어·영어 병기 교통 표지판을 모두 중문 도로표지판으로 교체해 도로 안전과 교통 효율을 높인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앞두고는 베이징시 지하철 안내 표지판에서 영어 표기가 ‘중국어 병음’으로 교체됐다. 병음은 중국어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한 발음 부호다.

이 같은 역류(逆流)에 비판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도 있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언론인 허(何) 씨는 RFA 인터뷰에서 “중국 공산당이 영어 세계와 결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베이징 거주민 탕(唐) 씨는 “중국 공산당 고위간부들은 자신의 가족을 외국으로 보내고 있다. 일반 민중에게는 문화적 자신감, 제도적 자신감을 이야기하면서 서양 언어‧문화 배척을 요구한다.”며 이율배반(二律背反)을 지적했다.

중국 네티즌들도 영어 퇴출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자유시보는 보도했다. 신문은 중국 네티즌들의 말을 빌려 “얼마 전 시진핑 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만났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계속해서 좌회전을 하고 있다.”면서 “베이징 지하철역의 영어 이름을 중국어 병음으로 바꾼 것도 도로 표지판을 교체한 것도 서구와 단절하겠다는 큰 신호이다.”라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