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공산당 통일전선기구 국내조직 산파…친중 화교사회 代父 한성호

최창근
2021년 11월 16일
업데이트: 2021년 11월 17일

중국서 지주의 아들로 탄압받다가 구사일생으로 한국행
청년 시절, 국민당 가입해 반공활동…이후 공산당으로 전향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연합총회 산파

화교(華僑)는 재외 ‘중국인’을 통칭하는 말이다. 중화(中華)에서 유래한 ‘화(華)’와 임시로 머무르다는 뜻의 ‘교(僑)’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화인(華人) 혹은 화예(華裔)라고 하기도 한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 패전으로 인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분단 후, 해외 화교 사회도 중화민국(대만)계와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계로 양분됐다.

한국 현실도 다르지 않다. 한국 화교 사회는 1992년 한중 수교를 기점으로 그 이전에 자리 잡은 중화민국(대만)계 구(舊)화교 사회와 한중 수교 이후 정착한 신(新)화교 사회로 나뉘어 있다.

친중국 성향 신화교 사회의 구심점은 2002년 결성된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中國在韓僑民協會總會)이다. 같은 해 출범한 중국 공산당 해외 통일전선 조직인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연합총회(韓華中國和平統一促進聯合總會)도 존재한다. 두 단체를 만들고 성장시킨 장본인은 한성호(韓晟昊·2018년에 91세로 작고)이다.

한성호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한국에 정착했고, 대만 국민당 정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훗날 한의사가 되어 노태우 대통령의 비공식 주치의로 활동했다. 한중 수교과정에는 ‘밀사’로 파견되어 물밑작업을 수행했다. 그 공로로 1993년 외국인 최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 받았다.

중국 국무원 교무판공실(僑務辦公室·화교업무사무처) 고문, 중국전국귀국화교연합회 고문 등도 맡았다. 한 중국동포(조선족) 신문은 그를 두고 ‘재한화교계의 수령’이라 칭하기도 했다. 친대만·국민당에서 친중국·공산당으로 전향하고 한국 신화교 사회의 대부가 된 한성호의 삶은 어떠할까.

중국 관영 인민일보 온라인판 인민망이 한국어판에 게재한 한성호 관련 기사 | 화면 캡처

지난 10월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했다. 고인(故人)의 공과(功過)를 논할 때 ‘공’으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것은 외교 부문 업적이다. 대통령 임기 첫 해인 1988년 ‘7·7선언(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 후 북한·공산권 국가를 대상으로 전향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총리가 추진했던 동방정책(東方政策·Ostpolitik)에 빗대어 북방정책(北方政策·Nordpolitik)으로 이름 붙여진 대 공산권 포용정책은 노태우 대통령 재임 중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1989년 동유럽 헝가리와 수교를 시작으로 1990년 몽골·소련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남북한 관계에서는 1990년 제1차 남북 총리급 회담이 개최됐다. 1991년 9월 17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성사시켰다.

북방정책의 ‘대미(大尾)’는 1992년 한중 수교이다. ‘동해(東海)’라는 작전명이 붙은 수교 협상은 대통령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외무부(현 외교부) 장·차관, 외무부 아주국장과 소수의 실무진을 제외하고는 ‘극비’에 붙여진 채 추진됐다. 외무부 본부대사로서 한중 수교 실무협상팀을 지휘한 권병현 대사(제4대 주중한국대사,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역임)가 부친 노환을 이유로 사무실을 비우고 신정승(제7대 주중한국대사 역임) 외무부 아주국 동북아2(중국 담당)과 과장이 ‘건강상 이유’로 사직한 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안가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북한과 대만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실행됐던 동해 작전은 청와대·외무부 등 공식 외교 라인을 통해 추진됐다. 반면 이른바 ‘비선(秘線)’을 통해서도 한중 수교 물밑 작업은 이뤄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고종 사촌 처남이자 이른바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정무 제1 장관·체육청소년부 장관,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 기업 선경그룹(현 SK그룹) 산하 이순석 ㈜선경 사장 등이 ‘밀사’로서 수교 작업에 관여한 사실은 훗날 알려진 사실이다.

한중수교 과정에 있어서 한 화교(華僑)의 역할도 지대했다. 이 기사에서 다루는 한성호가 그 주인공이다. 2020년 출간된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중 관계의 모색’에서 저자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성균중국연구소 소장)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화교 한의사이자 노태우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한성호 원장(신동화한의원)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에게 북방정책을 설명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교량 역할을 부탁했다.

실제로 그는 한국 정부의 생각을 홍콩에서 무역업을 하던 장시주(張錫九) 사장(산둥성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을 통해 중국 정부에 전달했고 한성호 원장도 1988년 4월 16일, 산둥성을 방문해 당시 장춘윈(姜春雲·산둥성장 겸 산둥성 중국 공산당위원회 부서기)을 만나 한중 경제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6월 11일부터 6월 18일까지 산둥성을 재차 방문해 경제무역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수교 협상 전이라는 점에서 장춘윈 산둥성장은 국제민간촉진위원회 산둥성 지부 고문, 즉 민간 신분으로 한국 측 대표단을 맞이했고 1988년 8월 25일 산둥성 대표단도 서울을 답방했다.”

고 한성호 씨는 한중수교의 밀사로 활약한 공로로 노태우 대통령 퇴임 직전인 1993년 2월, 외국인 최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 길림신문 캡처

노태우 대통령 부부의 知己, 한중 수교 밀사로 활약

한성호는 한국 정부의 공식 수교 협상 개시 전, 밀사로 방중하여 한중 수교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 공로로 노태우 대통령 퇴임 직전인 1993년 2월, 외국인 최초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한성호의 본명은 한조선(韓朝先)이다. 1927년 8월, 일제 침략기 만주국(滿洲國) 지린(吉林)성 창바이(長白)현, 오늘날 창바이조선족자치(長白朝鮮族自治)현에서 태어났다. 원적(原籍)은 산둥(山東)성 쥐(莒)현이다. 부모 대에 창바이현으로 터전을 옮겼고 아버지는 사금(砂金)을 발견하여 거부가 됐다.

한성호는 16세에 만주국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인 지린사도대학(吉林師道大學·오늘날 지린사범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창바이현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중국 공산당이 장악한 동북(東北·지린·랴오닝·헤이룽장성) 지방에서는 토지개혁이 실시됐고 지역 유지였던 한성호 일가도 타도 대상이 됐다. 반혁명분자로 몰려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그 속에서 아버지는 실종되고 어머니는 자살했다.

한성호도 투옥됐다. 대지주의 아들이자 만주국이 설립한 대학 학생이란 것이 주원인이었다. 그는 국민당 특무(特務·간첩, 스파이)로 몰려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러다 압록강을 건너 1948년 서울에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한성호는 반(反) 공산당 성향을 지니게 됐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한성호는 영쑹(永淞)호에 승선하여 대만으로 피난했다. 6개월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국민당)에 입당했다.

국민당 입당 후 한성호는 국민당 한국지부 조직훈련과 과장·대만 다다오통신사(大道通迅社) 주서울 특파원·재한화교청년회 반공항러구국총회(反共抗俄救國總會) 총회장 등의 직함으로 국민당 조직 활동 및 반공 활동을 수행했다. 같은 시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國民黨 中央委員會 調査統計局·약칭 ‘중통’)에도 스카우트 되어 6·25전쟁 기간 동안 첩보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52년, 그간의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왕둥위안(王東原·제2대 주한국 중화민국대사)대사의 추천으로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당(黨)·정(政) 간부 훈련기관 대만 혁명실천연구원(革命實踐研究院) 당무(黨務) 훈련반 제20기로 입소했다. 훈련 기간 중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강의를 수강하고, 수료시 장제스·장경국(蔣經國·장제스의 장남) 부자를 친견하기도 했다.

한성호(우측)가 26세였던 1952년 9월 대만 타이베이 양명산에서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수료를 기념해 당시 연구원 원장이었던 장개석(중앙)과 함께 찍은 사진 | 자료사진

공산당 박해 피해 한국에 정착, 국민당 정부 위해 활동

한국으로 돌아온 후 주한국중화민국(대만)대사관 교무(僑務·화교업무) 담당 서기관으로 일했다. 당시 한국 화교사회의 문제였던 마약·도박·매춘 관련 시설 운영 일소에 앞장섰다. 주한대사관 총영사에게 건의하여 한성호는 교풍(僑風)촉진위원회를 결성, 사행 업소를 운영하는 화교들을 처벌했다. 주한대만대사관 관원들의 부패·풍기문란 문제도 앞장서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한성호는 대만(중화민국) 국적의 재한화교사회와 등을 지게 됐다. 대만대사관과 관계도 악화됐다.

대사관 화교 업무 담당 서기관 직을 사직한 한성호는 1955년 서울을 떠나 전라북도 군산시 군산화교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동양의약대학에 입학, 한의학을 전공했고 이후 경희대 한의대에 편입·졸업했다. 이후 제34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다.

한의대 재학 중이던 1957년, 대만 내정부 조사국(內政部 調査局·현 법무부 조사국,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유사한 방첩·특수수사 기구) 동북구 판사처 조직과장 직도 사직하여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청산했다. 그러다 1960년 군산에 한의원을 개원했다.

군산과 광주에서 활동하던 한성호는 1970년 다시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1953년 창간된 화교 대상 신문 ‘한화일보(韓華日報·현 한중일보 전신)’ 운영을 맡았으나 경영난은 호전되지 않았다. 신문은 1972년 최봉렬에게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한성호는 거액의 부채를 떠안았다.

그 무렵 한성호는 한 군인과 인연을 맺게 됐다. 1972년 당시 육군 제8사단 제21 연대장이던 노태우 대령이다. 부인 김옥숙의 난치병을 한성호가 치료했고, 이후로 노태우-김옥숙 부부와 한성호는 지기(知己)가 됐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직선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취임식 직후인 1988년 3월 1일, 대통령 관저로 한성호를 초대했다. 노 대통령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성호 씨가 1988년 3월 노태우 대통령 부부와 대통령 관저에서 찍은 사진 | 자료사진

“지구상에서 중국의 영향은 날로 증대되고 있다. 한국도 비교적 발전한 국가이지만, 국내 자원이 부족한 문제가 있다. 장기적으로 발전하자면 해외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중국은 한창 발전하고 있는 거대한 해외 시장이다. 경제 발전 측면에서 바라보면, 중국과 속히 우호관계를 맺고 경제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한중 양국이 서로 왕래하지 않고, 비 우호적인 상태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양국 우호 관계를 맺는 일을 한성호 원장이 맡아 주길 바란다.”

반공활동을 벌이던 20대 청년에서 어느덧 60대에 접어든 노(老)화교에게 노태우 대통령은 재임 중 꼭 이루고 싶었던 한중 수교 물밑 작업을 부탁한 것이었다.

이후 상술한대로 한성호는 민간 경제사절단 자격으로 중국 산둥성을 방문, 당·정 관계자들을 만나 한중 관계 개선에 일조했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 재임 4년 차이던 1992년 8월, 한중 외교장관이 베이징에서 ‘한중수교협정서’에 서명함으로써 한중 양국은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됐다. 한성호가 친중국·공산당 인사로 극적 전향하는 시기였다.

베이징에서 한중수교 협정에 서명한 1992년 8월 24일, 명동의 주한국중화민국(대만)대사관이 ‘마지막 국기 하강식’을 끝으로 철수했다. 이듬해 2월 5일, 구 대만 대사관 청사에 주한국중화인민공화국(중국)대사관이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입주할 때 한성호는 중국 국기를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 2014년 3월 10일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 제국주의 규탄 대회에 참석한 한성호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가운데 발언 중인 인물) | 신화/연합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명동 대사관을 승계받는 것에도 한성호가 일조했다. 대사관 부지는 1882년 조선 정부가 체결한 최초의 근대 외교 협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의거 주조선 상무위원(商務委員)으로 부임한 진수당(陳樹棠)이 구입한 것이 시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만주족의 청(淸)이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中華民國) 정부 수립 후 중화민국 정부가 승계해서 사용해 오던 외교 자산이었다.

훗날 인접한 한국한성화교소학교(韓國漢城華僑小學校) 교지(校地)를 떼어낸 후에도 총면적 2천9백73평에 달했다. 시가는 3천 억원 이상으로 추산됐다. 명동 대사관은 ‘중화’의 정통을 승계한다는 상징성과 더불어 자산가치도 지닌 곳이었다.

한중수교 협상 과정에서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수교 전제 조건으로 대만대사관이 사용하던 명동 대사관 부지 소유권 이전을 요구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성이 인정되면 대사관 부지 등 그동안 ‘중국 정부’ 소속으로 인정됐던 자산들은 중국정부에 귀속되는 것이 외교 관례였다.

노태우 정부 출범 후 한중 수교가 가시화되자 대만 정부는 대사관 부지 매각을 희망했다. 1991년, 첸푸(錢復) 대만 외교부 부장은 입법원(국회) 대정부 질의 답변 중, “한중 수교가 이뤄질 경우 명동 소재 대만 대사관을 중국에 넘겨줘야 할 가능성에 대비, 대만정부가 한국정부와 대사관을 이전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대만 정부가 추산한 부지 매각 대금은 미화 4억8천만 달러(약 3600억원) 선이었다.

한국 정부도 대만의 대사관 부지 매각이나 명의 이전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전담팀을 두고 대사관 매각·명의 이전 문제를 주시하며 외무부에 일일 보고 했다. 한국 기업의 대사관 부지 매입 시도를 저지시키기도 했다. 대사관 매각이나 명의 이전이 성사되지 못했던 또 다른 원인은 한국 화교사회의 반발이었다. 한성호는 친중국 성향 화교들을 규합, 대만 측의 대사관 매각·명의 이전 저지에 앞장섰다.

한중수교 10년 차이던 2002년 한성호는 또 다른 역할을 부탁받는다. 제3대 주한중국대사로 부임한 리빈(李濱)이 한성호를 예방, 반독촉통(反獨促統·대만 독립 반대, 통일 촉진) 조직 건설을 부탁한 것이다.

1988년 1월, 장징궈 대만 총통이 지병인 당뇨병 악화로 타계했다. ‘중화민국(대만)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李登輝) 부총통이 총통 직을 승계했다.

이후 리덩후이는 1990년 국민대회(國民大會·현재는 폐지된 대만 최고 헌법기구, 총통·부총통 선출권 보유) 간접선거를 통하여 6년 임기 총통에 취임하고 1996년 총통 직선제 부활 후 첫 총통으로 선출됐다. 본성인(本省人·1949년 국민당 정부 대만 천도 전 대만섬에 거주하던 한인 원주민) 출신 첫 총통이던 리덩후이는 대만 독립론자였다.

총통 취임 후, 그는 국민당 내 외성인(外省人·1949년 국민당 정부 대만 천도시 이주한 중국 본토 출신) 보수파들을 실각시키고 대만 독립노선을 강화했다. 1996년 총통 선거를 앞두고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리덩후이의 총통 선출을 저지하기 위한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중국 관영 CCTV 경제채널 한국 서울 스튜디오 개소 기념행사에 참석한 한성호 씨 | 신화망

한성호, 리덩후이의 대만 독립 노선에 맞서 ‘반독촉통’ 운동 앞장

1996년, 첫 직선 총통 선출 후 리덩후이는 대만 독립노선을 더욱 선명히 내비쳤다. 총통 퇴임 이듬해인 2001년 대만 독립 지향 정당 대만단결연맹(臺灣團結聯盟·TSU)을 창당,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다. 2000년 3월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에서는 1986년 창당한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약칭 민진당) 출신 대만 독립론자 천수이볜(陳水扁)이 당선, 사상 첫 여야 수평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이 속에서 중국도 대만 독립 시도 견제를 본격화했다. 1988년 베이징에서 중국평화통일촉진회(中國和平統一促進會)가 결성됐다. 설립 목표는 대만독립(臺灣獨立)·두개의 중국(兩個中國·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하나의 중국과 하나의 대만(一中一臺) 등 일체의 대만 독립, 국가 분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중국 공산당의 대외 통일전선(統一戰線) 공작 수행도 주요 임무였다. 중국평화통일촉진회 국내외 지부 결성도 이어졌다. 2000년 홍콩·푸저우 해협양안(福州海峽兩岸)평화통일촉진회가 성립했다. 같은 해 일본평화통일촉진회가 결성됐다. 이듬해인 2001년 태국·캄보디아·필리핀평화통일촉진회가 만들어졌다.

리빈 대사의 부탁을 받은 한성호는 2002년 2월 14일, 서울중국교민협회(현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를 창립했다. 같은 해 2월 23일, ‘반독촉통(反獨促統)’을 내세운 중국평화통일촉진회 한국지부인 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연합총회(韓華中國和平統一促進聯合總會)도 결성했다.

2020년 10월 미국 국무부는 평화통일촉진회가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의 통제를 받으며 공산주의 선전과 악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외국 대행기관’으로 지정, 국무부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한성호는 재한 중국인 조직으로 중화국제문화교류협회, 한중무궁화검도교류회, 중국재한동향회연합총회 등도 결성했다.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자인 한성호는 이후로도 중국의 대외 통일전선에 앞장섰다. 2005년 10월, 베이징대 광화관리학원(光華管理学院·경영대학원) 초청 강연 중 “외국에서 제기되는 ‘중국 위협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질문을 받자 한성호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이 ‘중국 위협론’ 운운하는 것은 중국이 아직도 강대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이다. 앞으로 중국이 진정 강대해진 다음에는 그들이 ‘중국 위협’이라는 단어는 입밖에 내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은 허황된 구호를 외칠 때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애국행위이다.”

그는 대만 독립세력에 대해서도 일갈했다. “내가 대만 독립을 반대하는 것은 중국 영토 완정(完整)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대만이 독립하고 국토가 분열되는 것은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죄이다. 나는 결코 어느 한 정당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보지 않는다. 나는 ‘대애국’을 주장하고 ‘소애국’은 주장하지 않는다. 둘 다 모두 애국이긴 하지만 그들의 공간이 다르고 경중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시할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은 나날이 강대해지고 있다. 대만 국민당이 공산당을 뒤엎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한성호의 사드 문제 활동을 보도한 중국 관영언론 뉴스 | 화면 캡처

2016년 주한미군의 종말단계고고도지역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두고 한중 갈등이 격화됐다. 중국은 한국을 상대로 경제·문화분야에서 보복 조치를 취했다. 그 무렵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에 대하여 “남중국해는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이 아니다” 판결했다.

2016년 7월, 한성호는 자신이 창립 회장으로 있던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한화중국평화통일촉진연합총회를 중심으로 49개 재한 중국인 단체를 규합하여 “재한 화교와 중국인들은 필리핀이 제소한 중국 남중국해 영유권에 대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 판결을 반대하고, 중국 정부의 평화정책을 지지한다. 더하여 사드 시스템 배치를 반대하며, 사드 배치는 한중 양국간 우의를 파괴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중국 관영 신화사(新華社) 인터뷰에서 “재한 화교와 재외 중국인들은 비록 해외에서 생활하지만 언제나 조국과 함께 숨쉬고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난사군도(南沙群島·스프래틀리군도)는 중국 고유 영토이기에 절대 양보할 수 없다. 한국 내 사드 배치는 한중 양국 간 우정을 심각하게 파괴할 것이며, 이는 한국을 화약고로 만드는 행위이다. 재한 화교와 중국인들은 더욱 단결하여 조국 영토 완정(完整)을 수호하고 한중 양국 간 우의의 결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한성호는 재외동포소식지 ‘동포투데이’ 기고문에서 자신의 반 대만 독립·친중국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20여 년 동안 나는 돈과 힘을 쏟아 붓고 모든 노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국(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대만 독립을 반대하는 애국사업에 투신하였다. 분열 세력들에 대해서는 일보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또 독립세력과 가까운 분자들과는 그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나 한성호의 인격이고 품격이다. 비록 찬반의견이 교차되는 염량세태(世态炎凉) 속에서도 나 한성호는 그 어떤 후회도 없었으며 지금까지 자신의 그 주장을 펼쳐가고 있다.”

한성호가 젊은 시절 자신이 헌신했던 반공활동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살아서는 중국인으로 살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던 한성호는 2018년 타계할 때까지 한국 내 친중국 화교 조직 대부(代父)로서 활동했다.

그의 묘비명에는 “한성호 박사가 이룩한 업적은 국외 인사들로부터 극히 높은 찬양을 받았으며 그는 대단한 중국인으로 중국의 기인(奇人)으로 불리웠다”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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