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① 신비의 섬 이어도를 아시나요

해양주권의 최전선 이어도

이윤정
2023년 03월 2일 오후 6:51 업데이트: 2024년 03월 9일 오전 9:45

이어도는 오늘날 한국의 해양 주권을 상징하는 해양 영토다. 이어도와 그 주변 해역은 중국·일본 등 주변국들과의 배타적 경제수역 확정 문제, 해상 관할권 문제 등이 걸려 있다. 2003년 이어도에 국내 최초로 해양과학기지가 설치된 이래 중국은 해당 수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왔다.
사단법인 이어도연구회가 2022년 발간한 ‘이어도 오디세이’는 이어도 종합해양기지에 관한 그간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이러한 주변국의 무리한 권리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를 담은 책이다.
에포크타임스코리아는 이어도연구회의 도움을 얻어 책을 바탕으로 이어도에 관한 여러 방면의 이야기를 담은 특집 기획을 마련했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이어도의 위치, 명칭, 가치 등을 살펴 본다.

번지 없는 섬, 이어도

이어도는 어떤 기준으로도 섬은 아니다. 이어도는 해수면 아래 잠겨있는 수중 암초(submerged rock)다. 바닷속에서 보면 밑바닥부터 우뚝 솟은 해저산(海底山)이다. 봉우리 가장 높은 곳, 즉 해수면에 가장 가까운 곳이 수심 4.6m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수면 위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아래 암석 때문에 파도가 여울지는 수면이 보일 뿐이다.

이어도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은 그 이름이 ‘도(島·섬)’로 돼 있는데 기인한 바 크다. 이어도(離於島)라는 이름이 언제, 어떤 연유로,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제주의 구전민요, 설화, 전설 등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제주도 주민들에게 이어도는 바다 너머 어딘가에 있는 죽음 저편의 세계, 이상향이었다.

수면 가까이 있지만 큰 폭풍우 속 파도 사이로만 볼 수 있는 곳, 문이 열려 그곳을 보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섬. 그래서 이어도는 수 세기 동안 뱃사람들에게 환상과 전설의 대상이 돼왔다. 뭍에서 멀리 떠나온 용감한 어부가 바다에 묻히면 가는 파도 아래 섬, 피안의 세계,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들이 쉬는 발할라(Valhalla·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바이킹들의 이상향) 같은 곳으로 여겨졌다.

섬이 아닌데 왜 섬이라고 부를까. 국제법상 섬은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만조 시에도 수면 위에 있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 지역’이라 정의한다. 그러나 통상 섬의 기준은 자연법칙보다 사람들이 정한 약속에 따른다. 이어도의 명칭이 섬이 된 것은 설화 이미지의 은유적 표현이자 문화적 관습이라 할 수 있다.

이어도는 섬이 아니고 영토가 아니기에 주소가 없다. 주소가 없으니 지도에도 실리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주도엔 ‘이어도로’란 주소가 곳곳에 있다. 또 ‘국가지점번호’가 부여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국가지점번호란 국토와 인접 해양을 격자형으로 일정하게 나눠 지점마다 부여한 체계다.

한·중·일 삼각 요충지

이어도는 동중국해(East China Sea) 한가운데 있다. 수면 아래 암초가 숨어 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망망대해다. 좌표상 북위 32도 07분 22.63초, 동경 125도 10분 56.81초로 찍힌다. 지도에서 보듯 한반도와 중국대륙, 일본열도를 잇는 삼각형의 중앙이다.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항로의 중간 기점이자 한반도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중요한 길목이다.

동중국해는 제주도 남쪽부터 대만에 걸쳐있는 서태평양의 연해다. 동중국해는 남북 1300km, 동서 740km로 면적이 한반도의 6배인 130만㎢에 이른다. 동중국해는 ‘아시아의 페르시아만’이라 불릴 만큼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동북아시아 한·중·일의 앞마당 같은 바다인 만큼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3국이 각자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이 중첩돼 있다. 하늘로 눈을 돌리면 이어도 해역 상공은 3국 모두의 방공식별구역(ADIZ)에 속한다.

이어도 위치도 및 지형도(우측 상단) | 이어도연구회 제공

이어도는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 중 한국과 가장 가깝다. 대한민국 영토 최남단 마라도에서 서남쪽으로 149㎞(80해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가깝다고 해서 자동으로 관할권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어도는 1952년 한국 정부가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을 선언한 ‘평화선’ 선포 수역 안에 있다. 한국은 1970년 ‘해저광물자원 개발법’을 제정하면서 30만㎢ 대륙붕을 7개 해저 광구로 나눴다. 이어도는 제4광구에 해당한다. 중국은 대륙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대륙붕이라며 자국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어도는 10m 안팎의 높은 파도가 몰아칠 때 비로소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잿빛 파도를 뚫고 솟아오른 신비의 존재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정상부터 수심 15m까지 직벽에 가까워 바람이 불면 흰 포말 형태의 파도를 일으킨다. 지금은 철골 구조물 해양과학기지에서 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황금어장·지하자원의 혈맥

수면 아래 실제 이어도는 어떻게 생겼을까. 이어도의 해저 모습은 국립해양조사원이 다중음향측심기와 인공위성 레이더 고도계 등 첨단장비 계측으로 작성한 3D 입체 지형도로 확인할 수 있다. 대륙붕 바닥에서 봉우리가 솟아오른 형상이 마치 백제 금동향로를 닮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이어도는 생성진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북고남저(北高南低) 지형이다. 남북으로 기복이 크고, 동서로는 서쪽보다 동쪽이 기복이 심하다. 남쪽이 가파른 것은 파도에 의해 깎인 파식대(波蝕臺) 지형이 이뤄진 때문이다.

이어도는 잔류성 지형이다.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화산암편과 응회암질 퇴적물이 쌓였다가 빙하기 때 차별적 풍화와 침식에 깎여나갔다. 이어도가 한때 파랑도란 이름으로 불렸듯이 이곳은 주기적으로 파랑 에너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해역이다.

이어도의 수중생태 | 이어도연구회 제공

이어도 주변 해역은 천연자원의 보고다. 지질조사 결과 습곡 구조의 퇴적층이 두텁게 발달한 대륙붕 상이어서 석유 부존 가능성이 높게 평가돼왔다.

이어도 바다는 한·중·일 세 나라 수산업의 주요 어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연간 총어획량이 100만t 안팎인데, 그 가운데 70% 정도가 동중국해에서 나온다. 광물·수산자원 외 해양바이오, 조력·파력 등 에너지자원, 심층수·해수를 이용한 탈염 식수 등 해양수자원, 레저·크루즈·스포츠 등 해양공간자원, 조사·관측·측량 등 해양과학 기술자원 등도 점차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사고 배 이름 딴 공식 명칭 ‘소코트라’

이어도가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0년이었다. 이전에도 중국, 네덜란드,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이 17~19세기 인근 해역을 관측했다는 기록은 여럿 있다. 암초 등 지형물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이어도의 존재나 위치가 명시된 것은 없었다.

영국 P&O증기선사 소속 상선 소코트라호는 일본 규슈를 출발해 중국 상하이로 가던 중 1900년 6월 5일 오후 9시 40분 암초에 부딪혔다. 해도에 나타나 있지 않은 미지의 수중 암체, 다름 아닌 이어도였다. 해도에 암초를 기재할 때는 발견 선박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 연고로 이어도는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라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공식 명칭으로 등재됐다.

지명은 곧 그 장소의 정체성이다. 나아가 국가의 영토적 귀속성을 나타낸다. 한·중·일 세 나라는 각자 문화적 배경과 필요성에 따라 이어도에 자국 언어로 이름 붙여 사용한다.

소코트라호 | 출처=이어도탐사와 해양과학기지/이어도연구회 제공

일본은 ‘하로우수’, 중국은 ‘쑤옌자오’로 불러

일본은 예로부터 이어도를 ‘하로우수’라 불렀다. ‘파랑(波浪)을 일으키는 곳’이란 뜻이다. 사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이어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엔 이어도에 관해 제주도와 유사한 전설도 있다고 한다. 1901년 영국 해군 측량선이 이어도의 위치를 공식 확인, 통보하자 일본은 곧바로 이 암초를 하로우수와 일치시켰다.

메이지유신 이후 해양 진출에 적극 나선 일본은 이어도를 인공섬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전쟁 역사에 묻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련 학자들의 꾸준한 발굴로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일본~중국 항로에서 암초를 확인했다는 영국의 항행 통보를 받은 일본은 1901년 8월 16일 자 수로고시 제1250호에 ‘험초(險礁·위험한 암초) 발견’ 사실을 상세히 게시했다. 이는 일본이 영국 해군이 통보한 암초를 자신들이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던 이어도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이후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어도가 재평가된 것은 1930년대 후반 들어서였다.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꿈꾼 일본은 동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자국과 중국 본토를 잇는 해저 통신선이 절실해지자 나가사키~제주도~상하이를 잇는 코스가 유력하게 검토됐고, 이 가운데 제주도~상하이 코스가 너무 길어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이어도에 대해 알고 있던 일본 기술자들은 이 암초에 해저케이블 중계시설과 함께 등대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이 계획은 태평양전쟁 발발로 무산됐지만, 항해의 장애물일 뿐이었던 이어도에 대한 최초의 지정학적 가치 평가, 실질적 활용안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중국은 이어도를 ‘쑤옌자오(蘇岩礁)’라 부른다. 한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고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세울 무렵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지명이다.

중국이 이어도에 대해 인지한 것은 사실상 약진호 침몰 사건 이후다. 1만5900t급 화물선 약진호는 옥수수, 잡화 등을 싣고 1963년 4월 30일 산둥성 칭다오 항을 떠나 일본 모지항으로 항해하던 중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 그 암초가 이어도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이어도를 장쑤성(江蘇省) 외해의 암석 해초(海礁)라는 의미로 ‘蘇岩礁’라는 이름을 붙여 사용해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설득력은 그리 높지 않다. 장시성 바깥 바다에 수많은 암초가 있는데 왜 유독 이어도를 그렇게 불렀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약진호 침몰 사건을 계기로 이어도를 의식하게 되었을 뿐 지속적인 관심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쑤옌자오 명칭은 1992년 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901년 소코트라암초로 명명되고 1938년 일본의 인공섬 조성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이어도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여전히 전설 속 환상의 섬, 피안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한국은 언제, 어떻게 이어도의 실체를 확인했을까. 이어도에 대한 관심은 해방 뒤 주권·영토 회복 과정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